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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기 18장 22절~3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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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기 18223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리니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팔레스타인과 요단 사이에 바다라고 부를 만큼 큰 호수가 있습니다. 이 호수의 이름은 히브리말로 '얌 하멜라흐'-----염해, 소금 바다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해(死海), 죽음의 바다라고 부릅니다. 얼마든지 좋은 이름도 많건마는 왜 하필이면 이 호수를 죽음의 바다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남북으로 길게 뻗쳤는데 길이 약 75킬로미터, 폭은 416킬로 미터되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수면의 높이는 해면보다 394내지 396미터나 낮은, 지구 위에서 가장 낮은 수면입니다. 북쪽에는 요단강을 비롯하여 약간의 담수가 흘러들어오나 이 물이 다시 어디로 빠져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대로 다 증발해 버립니다. 어쩌다 홍수가 나서 사방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도 수위가 겨우 34미터밖에 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수면 위를 날아가는 새는 한마리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는 실로 무서운 바다, 죽음의 바다입니다.

하늘로서 유황불의 심판을 받고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가 여기에 죽음의 바다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유황 냄새가 난다고.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은 본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5천여 년전에 오늘과 같은 바다가 생겼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기록이 고고학적으로도 그 진위(眞僞)가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310절을 봅시다.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거할 땅의 선택권을 받았을 때에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욕심이 났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물이 넉넉할 뿐만 아니라 초원이 푸르고 아름다웠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는 것은 에덴동산 같았다는 말이요, 애굽 땅과 같았다는 것은 그만큼 풍요로웠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비옥한 땅이었고 그처럼 아름다운 도성이 있는 곳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죽음의 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코 자연 자원의 부족으로 최후를 맞은 것이 아닙니다. 한발 때문도 아닙니다. 경제의 문제가 아니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이 땅에 전쟁이 있었으나 이것 또한 멸망의 원인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어느 역사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한번도 전쟁을 겪지 않았던 곳이 있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도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패전했습니다. 왕과 백성이 포로되어 가고, 재산은 무참히 노략질을 당했습니다.

아주 멸망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통하여 저들을 구하셨습니다. 포로들 중에 롯이 섞여 있었던 까닭에 아브라함은 훈련된 자기 사람 318인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이겼습니다. 롯을 도로 찾아왔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복권되고, 빼앗겼던 재산도 회복되었습니다. 성을 다시 쌓았습니다. 소위 경제적 정치적 재건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는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곡을 찔렀습니다. '죄를 짓는 자에게 내려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나가다가는 마침내 아주 무서운 최후를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그처럼 큰 전쟁을 치르고도 뉘우침이나 회개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무너진 성을 복구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로 인하여 망했습니다.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13:13)." 저들은 죄악으로 인하여 망했으며, 특별히 회개하지 않은 악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된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된 자가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독일어로 하면 게보르덴 자인(geworden-sein)이 아니라 베르덴 자인(werden-sei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죄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도 말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다. 그러나 그 죄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은 악마적이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에 머물러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 아니 회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악마적이요 악의 역사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함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 친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에도 사람들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죄를 지었다고 하시면서 소돔사람들은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고 하십니다. 사해(死海)가 될 때까지, 바로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뚝딱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성이 서지 못하였고, 회개하지 않은 죄로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2절에서 경고하십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그는 모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해가는 소돔 고모라로부터 구출되었으나 그 악마의 소굴이 멸망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순간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처는 지금도 사해 언덕에 우뚝 서서 말없는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근심이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대부분이 생리적 필요에 의한 걱정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서 살까! 요즘은 특히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해지나,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사나 하는 일에 무던히도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이처럼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또 다른 걱정은 사회적인 걱정입니다. 인기를 생각하고 평판을 생각하고 체면과 위신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내가 챙긴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입니까? 다 쓸데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근심은 도덕적인 근심입니다.

죄가 있고 죄책이 있습니다. 죄책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은들 그 사람이 건강하겠습니까? 무서운 죄악에 매여 있는데 이제 체면 찾고 위신 찾는다고 해서 그 체면이 과연 유지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도덕적인 근심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근심입니다. 이도 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하나님과의 만남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업을 하시는 어떤 집사님이 일이 점점 커지고 바빠짐에 따라 교회 출석을 등한시하고 잠시 타락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에 목사님이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있는 대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습니다……" 갖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목사님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이윽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고, 아직도 집사님을 사랑하시기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집사님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당하는 사건들을 보건대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까,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오늘도 우리를 끊임없이 재촉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멸망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멸망이 있습니다. 연거푸 주어지는 기회-이를테면 전쟁이나 실패를 당해도 회개가 없고, 발밑에 죽음이 와서 엎드려도 회개하지 않을 때에 최후가 오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최후는 그것 때문만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는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열 명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 볼 때에 그사람의 인격과 행위가 다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가지든 두 가지든 의로운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크게 보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장점만 보시고 나머지는 다 덮어주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봅시다. 먼저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순종하매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소돔 성의 의인 열 명과 같았던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그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모세는 또 어땠습니까? 그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온유하고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의 모든 잘못을 덮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을 펴면 첫장에 마리아와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요셉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19)." 그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약혼녀가 자기와 관계없이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도 '그럴 수밖에 없는 무슨 곡절이 있겠지'하고 저를 용서하며 그 허물(?)을 잘 덮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겸손과 인내-이것을 보고 요셉을 의인이라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완전한 의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완전한 의인이란 있을 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믿음의 의, 최후의 의-순종이든 정직함이든 겸손이든, 그 한 가지 의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전체를 의롭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받은 사람들의 역사를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가지, 이것마저 없다면 끝입니다. 그야말로 최후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가 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경건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을 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속셈이 어떠한지를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조카 롯이 소돔 고모라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아마도 "롯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못합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23)." 조카 아니라 아들이라도 죄인이면 망할 수밖에 도리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의인 오십 명만 있으면 용서하시겠다는 허락을 받고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십에서 다섯을 줄이고, 40으로, 20으로, 끝내는 열 명으로 줄입니다. 그는 두려운 가운데에서 구했습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32)."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에 군사가 부족해서 패했습니까? 아니면 전략이 잘못되었습니까? 사기가 모자랐습니까? 아닙니다. '아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반대로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비록 소돔 고모라가 아무리 죄가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의인 열 명이 저들의 죄를 대속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최후를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요, 다시 회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최후라고 하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는 마지막을 이릅니다. 여기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모든 가치가 다 부정됩니다. 거의 멸망당할 뻔했던 니느웨 성도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저들을 멸하겠다 하시고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요나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4:11)." 곧 어린아이들이 12만여 명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더라도 니느웨 성에 죄가 너무 많아서 벌하실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회개하므로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최후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긍휼조차도 힘입을 수 없는 때를 말합니다. 죄가 관영해서, 죄로 너무 가득 차서 이제는 아무 긍휼도 없습니다. 어떠한 긍휼도, 어떠한 자비도 용납되지 않는 마지막 심판, 이것을 최후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바로 이러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내 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여기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돼지새끼 열두 마리가 소풍을 갔는데 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모두 건너 후에 다 있는지 확인을 해봅니다. 가장 큰놈이 헤아려 보니 열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거 큰일났습니다. 다른 놈이 헤아려 봐도 역시 한 마리가 모자랍니다. 어느 놈이 헤아려도 열한 마리입니다. 그래서 한 마리가 어디 갔나 하고 우왕좌왕하며 안타까워하는데, 실은 한 마리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열두 마리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열두 마리 모두 자기는 세지 않고 남만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더는 세상을 탓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 탓하지 말고, 누구도 허물하지 맙시다. 더구나 지난 이야기, 쓰리고 아픈 과거를 들추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 자신은 점점 더 악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말을 그만둡시다. 여기에서 말을 멈추고, 모든 원망을 끝냅시다. 그리고 내 의를 생각합시다. 이 세상에 아무리 죄가 많고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해도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다면 멸망치 않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회의 죄 문제입니까, 세상의 악 문제입니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인이냐-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의인 열 명 중에 들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레미야 5장에 참 기막힌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의인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물론 죄로 인하여 세상이 망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종말은 죄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를 지탱해나갈 의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의를 봅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 바로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모읍시다. 경제-그만하면 넉넉합니다. 정치-문제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도덕이요, 죄요, 회개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나아가 의인 없는 데에 멸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 열 명을 찾으라, 그리하면 이 성을 사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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