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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사람 없는 세상(요한복음 5장 1~18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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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없는 세상(요한복음 5118)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오늘의 본문에 보면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7)"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없다'-헬라 원문에서는 '안드로폰 우 케코'입니다. 영어로 'I have not a man.'--'사람이 없다'가 아니라 '사람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십팔 년된 병자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문의 뜻대로 하면 '단 한 사람'이 없어서 고독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휴머니티를 특별히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도주의, 예수님의 사람 사랑하심, 예수님의 생활 자세가 드러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없어'라고 하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한 사람이 되어 그를 만나주십니다. 그가 사람이 없다고 했을 때에 말씀은 없었습니다마는 '여기 내가 있지 않느냐, 네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여기 있느니라'하시고 그를 대해주신 것입니다. 한 사람-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을 생각해보십시다. 이때는 명절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는 명절이 셋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그것들입니다. 유대의 명절은 우리 나라의 그것과는 또 다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명절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느라고 야단법석입니다. 역과 터미널이 귀향 인파로 붐비고 고속도로가 자동차로 뒤덮이는 것을 봅니다. 도시에 올라와 있던 사람들이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명절인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시골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올라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명절을 지내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율법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곧 교회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에 모이고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 중심의 생활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명절은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키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명절만 되면 인구가 많지 않던 당시에도 5만 명 이상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어떤 기록에는 15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도 나와 있습니다. 너무 옛날의 일이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한 장소에 15만 명이 모였다면 참으로 굉장한 일인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세 절기마다 모였는데, 그 중 가장 큰 절기가 유월절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시기도 유월절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때는 12세 이상의 남자들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제외하고는 의무적으로 모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60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작은 도시가 시골에서 명절을 지내러 올라온 사람들로 꽉 찼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오니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습니다. 모두가 구경거리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습니까? 이때 제자들이 성전을 보고 감탄의 말을 예수님께 합니다. 이와 같이 시골사람들이 도회지에 올라오면 볼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모임에 참석한다느니 하면서 모두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홀로 남아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 명절을 어떻게 지내시는가 보십시다. 예수님은 가장 외로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얼마 있으면 성탄절입니다. 이 거룩한 성탄절을 어떻게 지내려 하십니까? 누구를 만날 것입니까? 성탄 카드는 얼마나 띄울 것입니까? 다 좋은 일입니다 마는 이번 성탄절은 한번 특별하게 지내보십시다. 이 서울장안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구일까,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그 사람을 이번만은 찾아가 보십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휴머니즘입니다.

여기 유월절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기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등 정신없이 나다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제자도 동반하지 않으시고 홀로 조용히 행동하십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구일까,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생각하신 끝에 찾아가신 곳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가장 외로운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한번 상상해보십시다. 여기에 계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멀리서 팔짱이나 끼시고 우리 인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기다리고만 계시다가 찾아가면 맞아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서 탕자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찾아가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Waiting God'이 아니라 'Seeking God' -곧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적극적인 사랑을 나타내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해주는 것 만큼 나도 사랑할 것이다'-'give and take'로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찾아가시는 하나님, 먼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일부러 찾아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적극적이고도 주도적으로 가장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외롭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질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실상은 고독이 무서운 것입니다.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고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다같이 죽는 것이라면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혼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고 억울한 것입니다. 매도 다같이 맞으면 괜찮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같이 불행하면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제가 겪은 625때의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피란민 속에 끼어 살다보니 그 생활에도 젊은 시절에 겪어서 그런지 그런 대로 낭만이 있습디다. 다같이 깡통 차고 주먹밥 먹으니까 하등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튼 당시에는 그릇 하나도 변변하게 없었습니다. 잡곡으로 밥을 지어서 손으로 꾹꾹 쥐어놓은 주먹밥을 손으로 먹었습니다. 된장이나 소금을 넣은 것이 보통이고 멸치 한두 마리라도 걸리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인 것입니다. 깨끗하고 말고가 없습니다. 대충 쥐어서 죽 늘어놓으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하나씩 받아 가는 것입니다. 그릇이나 종이가 어디 있습니까? 맨손바닥으로 받습니다. 손을 씻었느냐 씻지 않았느냐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받아서는 아무 데고 앉아서 먹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암염(岩鹽)이라는 소금을 하나씩 주머니 속에 넣고들 다녔습니다. 주먹밥을 한입 먹고는 손가락 모양의 암염을 꺼내어 빨고는 했습니다. 이를테면 반찬인 셈입니다. 나이 오십이 넘은 사람들은 다 이런 시절을 지나 살아온 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마는 신기하게도 그 속에 낭만이 있었습니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다같이 가난하고 다같이 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보십시오. 고독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나 혼자 불행하다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고통은 고독입니다. 우리는 욥의 고난 당함을 익히 압니다. 가난하고 병들기도 했습니다만 끝내 그를 괴롭힌 것은 바로 고독이었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친구도 그를 떠납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혼자입니다. 욥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Helpless means hopeless, hopeless means useless.'------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소망이 없다는 것이요 소망이 없다는 것은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 욥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즐거운 명절에 가장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 만나시려고 하셨습니다. 이 높은 의미의 휴머니즘을 이번 성탄절에 꼭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일생을 통하여 가장 뜻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베스(beth)'는 히브리어로 ''을 뜻하는 말입니다. '베스레헴,' 곧 베들레헴의 '베스'는 집을 뜻하는 말이며 '레헴'''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곧 '떡집'입니다. 베데스다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베스'가 집이고 '에스다'가 자비라는 말입니다. '베데스다''자비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바로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못이었습니다. 이 연못가에 있다가 물이 동할 때에 먼저 들어가면 기적적으로 병이 낫는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름도 베데스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자비가 없었습니다. 다분히 미신적입니다마는 환자마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야단이었습니다. 낫든 낫지 않든 소원이나 이루어보라고 오래 앓고 있는 환자부터 넣어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여기 38년된 환자가 있습니다마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또 힘있는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38년된 이 사람,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었는데도 한번도 연못에 먼저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꼭 낫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소원인데도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십니다.

이 환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무려 38년 동안 앓아온 환자입니다. 흔한 말로 긴병에는 효자가 없습니다. 제가 신학대학 다니던 시절, ()가 될까 함자는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박목사님이라는 분이 시간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찌나 슬픈지 한참이나 눈물을 홀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목사님 부인은 8년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자궁암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는데 살아날 가망이 없었습니다. 몸에서는 썩은 냄새가 납니다. 돈도 없고 하여 목사님이 친히 간호를 합니다. 자리보전하고 일어나지 못하니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고 약도 손수 달여서 먹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정성으로 간호해도 낫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루는 한약을 달여 들고는 방 문턱을 넘어서려는데 문득 '빨리 죽든지 할 것이지 저렇게 살아서 나까지 괴롭히노' 싶은 원망이 들더랍니다. 바로 그날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합니다. 박목사님은 그 때문에 괴로워하셨습니다. 8년 동안 잘해오다가 마지막에 왜 그랬느냐는 것입니다. 괴로운 나머지 우시면서 말씀하는 바람에 모두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합니다. 긴병에는 효자가 없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 가서 자동차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13년이나 누워 계신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목사님 부인을 만났더니 눈물 한 방울도 없습니다. 그저 '안녕하셨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엉뚱한 대답을 하십디다. '아직도 안 죽었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귀찮아서입니다.

병 앓기를 38, 누가 이 사람을 돕겠습니까? 소망이 없기에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절망하고 나면 돕는 사람도 없습니다. 도울 필요가 있어야 돕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사람을 돕겠다고 옆에 앉아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38, 이제는 친척도 친구도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38년을 상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까지 겪은 광야생활은 나온 해와 들어간 해를 빼면 38년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아도 많은 은혜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또한 비참한 것은 미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해보았고 의사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고 이제 남은 것이라곤 확실한 것도 없는 미신뿐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지진이 많았던 지역이라 온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물이 돕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유의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4)"-이 미신적인 것에 한 가닥 소망을 걸고 연못가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앓고 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동정해서 그저 죽지 않을 만큼 주는 것을 얻어먹으면서 물이 동할 때만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물이 동한다고 하면 모두들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 이 사람, 엉금엉금 기어가다 보면 다른 사람은 이미 다 들어갔다 나오고 있습니다. 낫든 낫지 않든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미신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잃어버리고 인간적 여망을 잃어버리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반드시 낫는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과학적 근거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의존해보는 것입니다. 한번 들어가나 보자고 와서 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예 소원마저 변질되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타락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낫고 싶다, 꼭 나아야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좋으니 물 속에 들어가 보고나 죽자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도와서 나를 맨 먼저 물 속에 넣어주는, 더도 아닌 그만큼의 휴머니즘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누가 병이 낫는다고 했습니까? 한번 해보기나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가망이 전혀 없음을 알면서도 수술이나 한번 받아보았으면, 병원에 입원이나 해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지막 여망, 미신적인 소원일 뿐입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지금 여기에까지 와 있습니다.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나타나 병이 낫든 안 낫든 나를 맨 먼저 물 속에 넣어주기나 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의 사랑, 그만큼의 인도주의를 바라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사형장에 나가는 사람에게 물 한 대접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미 죽을 사람이지만 그에게 조그마한 동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그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안드로폰 우케코(I have not a man.)'-사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도와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마는 큰 뜻이 그 말씀 안에 있습니다. '네게 아직도 소망이 있느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망이 중요한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절대로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가장 무서운 죄가 절망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마음이야 그렇지 않겠습니다 마는 혹 대화하는 가운데라도 상대방에 대해 실망했다는 말만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했다' '절망했다'라는 말은 마지막에나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 말을 했으면 또다시 만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망,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속을 썩여도 '실망'이라는 말은 쓰지 말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건강하건 약하건, 절대로 써서는 안될 말입니다. 엄청난 죄가 됩니다. 어느 경우에나 소망을 버리지 말 것입니다. 스스로에게도 절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한 절대로 자신에 대하여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실망은 불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범죄 한 것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절망죄'였습니다. 이것이 원망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특별히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소망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하십니다만 이 사람의 대답은 엉뚱한 데로 나갑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절망적이요 빈약하고 변질된 병리적 소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미신적인 신앙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만일에 제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만일에 제가 예수였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몸이 병들더니 정신까지 병들었구나. 이제는 틀렸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순간입니다. 미신적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십니다. "네 신앙이 잘못되었다"라고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생각하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저가 보통 환자가 아닙니다. 38년이나 누워서 지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법도 합니다. "누구는 누워 있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오?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하시고 나를 연못에 넣어주기나 하시오." 생전처음 보는 낮선 사람이 나타나 무려 38년이나 누워지낸 사람을 보고 거두절미 일어나라 합니다. 당자의 소원은 아랑곳없이 말입니다. 여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인가 보십시다. 먼저, 네가 가졌던 소원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연못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 소원은 잘못된 것이니 포기하라는 암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누구냐고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알고서 믿겠다, 생각해보고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누군지 모릅니다. 누구냐고 묻지마라-참 어려운 일입니다. 셋째로, 지금까지의 경험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내 경험에도 다른 사람의 경험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창조적인 사건입니다. 경험에 없었던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어나라 하신다고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지금까지 저가 구했던 소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일어납니다. 벌떡 일어납니다. 38년 동안이나 불가능했던 일이 지금 이루어집니다. 모든 추잡하고 비참했던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만을 생각합니다. 일어나라 하니 아무 잡념 없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직선적인 신앙입니다. 자신의 처지나 과거 따위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경험이나 철학도 하등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깨끗한 마음입니다. 일어나라 하니 ''하고 일어났을 뿐입니다. 말씀에 대한 가장 진실한 응답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능력이요 기적입니다. 기적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어서 시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셨습니다. 일어났으면 그대로 가라 할 일이지 그까짓 자리는 뭣하러 가지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저를 일으킨 분이 가지고 가라 하니 당연히 가지고 갑니다. 그대로 순종합니다. 안식일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리를 들고 가는 이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되었습니다. 무슨 날인지 상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은혜는 모든 율례를 초월합니다. 은혜 앞에서는 걸릴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든 제사장이든 서기관이든 상관할 것 없습니다. 나를 일으키신 그가 가지고 가라니까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바도 아니요 알지도 못합니다.

그후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이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 이제 이 사람은 유대사람들에게 가서 저를 고쳐준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증거 합니다. 마침내 그가 예수임을 안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너무 알고자 하는 것이 많습니다. 알겠다고 하는데 믿음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준 자의 말씀에 절대순종 했을 뿐입니다. 가만히 보면 은혜는 받았다고 하면서 순종은 없습니다. 말씀에 직선적으로 순종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교회를 통하여 은혜 받았습니까? 소망교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소망교회 강단을 통하여 은혜 받았습니까? 소망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은혜는 받았는데 행동은 엉뚱한 데로 가려 하니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이 사람, 은혜 자에게 깨끗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를 높이고 있습니다. 저에게 어떠한 핍박과 비난이 따르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그대로 따른 데에 놀라운 기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휴머니즘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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