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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선한 목자(요 10:7~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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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10:71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앞장에서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한 목자란, 양들을 하나씩 개별적으로 알아서 보살피고, 또 서로의 음성을 알아들어서 어떤 제스쳐에도 그 뜻을 알아 양들의 필요를 채워 주며, 그리고 목자는 언제나 양보다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합니다. 위험을 당하거나 시험을 만나도 먼저 당하는 순교자적인 자세가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잘 설명을 하셨지만 6절에 보면, 저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분명하게 가르치셨는데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음성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충분히 다루려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좀더 다른 측면에서 다른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이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7-9). 여기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장에서는 목자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므로 나를 통해서 들어오는 양은 순수한 양이고 나를 통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은 다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며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곧 생명의 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꼴을 얻을 수 있고 윤택함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뜻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치는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양을 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의 집 가까이에 양의 우리를 두는 방법입니다. 우리 나라 시골에 소 우리나 돼지우리를 상상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양의 우리를 목자 집 가까이에 놓고, 아침이면 양들을 몰고 들로 산으로 다니다가 다시 저녁이면 우리로 몰고와서 양을 가두어 둡니다. 밤중에 사자나 이리가 와도 안전하도록 문을 튼튼하게 잠그었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양들을 일일이 부르고 점검하여 들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양의 우리가 일정한 장소에 없습니다. 목자는 아예 양들을 따라 풀이 많은 곳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24시간을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밤이 되면, 천막을 치거나 아니면 그냥 들판에서 양들을 동그랗게 모아놓고 그대로 같이 밤을 지냅니다. 예수님 태어나실 그 당시에 목자들이 양을 치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자는 오로지 양을 잘 치기 위해 풀을 따라 이동하는 것으로 양의 우리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을 가면 이런 방법으로 양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풀이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으로 목자는 양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밤중에는 혹시 맹수들이 덤벼들까 하여 거의 밤을 새며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즉 후자의 양치는 방법에서 목자는 바로 양의 문이 됩니다. 양의 우리가 없으므로 목자 자신이 양의 문으로서 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가면 양도 가고 목자가 멈추면 양들도 멈추어서 목자는 양의 우리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양의 문이므로 나를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보호받고 꼴을 얻는다, 즉 예수님을 통해야만 생명을 얻는다는 귀한 뜻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나는 선한 목자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도적과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어찌하든지 잡아서 죽이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고,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여기 목자가 있고 도적이 있는데, 어느 쪽을 따라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여기 예수님이 계시고 저기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누구를 따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양들은 내 생명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목자를 우선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잃어버려진 양이 되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선한 목자를 바라보며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의심하는 것처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선한 목자로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왔으니 믿으라는 중요한 말씀을 우리는 붙잡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삯군과 비교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10:11-13). 양이 많은 경우는 목자 혼자서 다 거느리지 못하여 자연히 삯군을 둡니다. 삯을 주며 품꾼들에게 양을 돌보도록 하므로, 삯군과 목자는 다릅니다. 삯군은 돈 받고 일하기 때문에 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왜 손해를 볼 것인가 하고 도망갑니다. 한 마리의 양을 잃었다 해도 찾아 헤매는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목자와 삯군은 서로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들도 월급 받는 자와 내 사업을 하는 자의 자세가 서로 다르듯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인 의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소련에서 경험한 일로써 1967년도에 논문에 발표된 것을 보면 적어도 공산주의에서는 농사가 잘 안 된다는 결론입니다. 해마다 미국은 풍년인데 소련은 흉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련에서는 집단 농장이므로 내가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많이 일해서 풍년이 와도 내 몫으로 배급받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일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농작물이 잘 될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소련에서 농사지을 수 없는 박토에다가 정치범들을 풀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 박토의 십분의 일을 개인 소유로 나누어주면서 말입니다. 정치범들을 감옥에 가두어 두면 공연히 식량만 없어지니 정배를 보내어 일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후에 놀라운 결과로 십분의 일 농장에서 전체 식량 생산량의 40%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박토에서 4배의 농사가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결론을 얻기를, 소득 증대는 이데올로기로 자극하는 것보다 임금에 의해서 자극하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면 일한 만큼은 소유할 수 있어야 일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너쉽(ownership)이라는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서 분배하는 공산주의가, 능력에 의해서 분배하는 자본주의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생산적인 일이나 발명하는 일에 한해서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삯군과 목자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삯군에게는 내 양이 아니고 내 우리가 아니므로 목숨을 내놓고 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는 맹랑하게도 아버지께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 집에서 죽도록 일을 해도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었다"고 불평을 합니다. 아버지는 기가 막히어 "내 것이 모두 다 네 것인데 웬 말이냐"고 섭섭해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왜 주인 의식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은 보수를 위해 일하는 품꾼이 아닙니다. 보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양이다, 즉 내 소유다라고 하셨습니다. 내 것은 사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주님의 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양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병신 양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공부 잘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만 사랑합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못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잘하나 못하나 내 자식은 내 자식입니다. 너희는 내 양이고 나는 너희의 선한 목자라고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선한 목자는 삯군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양들을 지킵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면 도망가지만, 목자는 끝까지 싸워서 양들을 보호합니다. 어려울 때 도망가는 자는 삯군이요, 어려울수록 더 가까이 가는 자는 주인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어디든지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책임지는 자가 주인입니다. 가령, 회사가 파산해서 부도가 났는데, 회장님, 사장님은 다 도망가고 끝까지 회사를 지키는 자가 수위였다면, 그 회사의 주인은 수위요, 도망가는 자는 삯군입니다.

위험한 순간에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애정입니다. 애정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으로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구호요 감상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재는 척도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내요, 또 하나는 돈입니다. 얼마나 상대방을 위하여 참아 줄 수 있느냐가 사랑을 재는 척도입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하고 그 기다림이 쉬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억지로 하는 인내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참는 것이므로 참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야곱은 14년을 참고 기다렸다가 결혼한 예가 있습니다. 세기적이고도 역사적인 연애입니다. 14년을 참아서 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굉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므로 참아지는 것이지 억지로 하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 돈이란, 물질의 희생을 말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분을 위해 돈을 쓸 때 아까운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랑은 이미 식은 것입니다. 사랑하면 목숨까지도 바치는데, 돈 몇 푼이 문제입니까? 양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선하다란 말에는 도덕적인 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더하기 지혜가 선하다는 뜻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정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처리하는 지혜도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말은 목자가 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안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희생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혜가 동반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처지, 양의 성격, 양의 약점 등을 너무 잘 알고 동시에 양들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은 풀을 먹고 물도 먹고, 그리고 소금을 먹습니다. 그래서, 목장에 보면 군데군데 소금바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열댓 마리의 양을 키웠습니다. 당번이 되면 양들에게 풀을 먹이는데, 집에서 소금을 준비해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목자는 양들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잘 압니까? 혹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것은 꼭 주셔야 합니다. 안 주시면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다"라고 거의 협박에 가까운 기도를 하는 적은 없습니까? 내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더 지혜롭고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미래와 운명을 알고 계십니다. 목자도 양의 운명을 알므로 사랑하고 돌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란, 양과의 밀접한 관계로써 충분한 소통을 의미합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눈길만 보아도 통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강아지를 키워보면 강아지와 식구들의 유대관계란 대단히 민감함을 볼 수 있습니다. 표정과 행동으로써 사람과 동물이 충분히 통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지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까지 포함한 종합적 인식입니다. 서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이요 행동입니다. 알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라가지 않고 낙오되면 죽는다는 것을 양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사랑의 목자만이 아니라, 지혜로운 목자요 능력있는 목자이므로 우리는 믿고 따라갈 뿐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0:16).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목자로 한 우리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로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까지도 다 모여서 한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 : 17-18).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불가피적인 것이 아니며 과거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계속적이고 현재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의무가 아니므로 책임도 아닙니다. 자식을 낳았으니 키워야 하고 자식이 되었으니 효도해야 된다는 불가피성으로 돌리는 한, 사랑은 아닙니다. 내가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누가 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가질 권세도 있으니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자원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랑하라고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사랑에는 때문이라는 이유와 조건이 없습니다. 또한 모르면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모르고 끌려가다가 중간에서 깨닫고 뉘우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이것도 참 사랑은 아닙니다. 참 사랑에는 지혜와 능력이 함께 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어야 하며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황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므로 상대방이 어떻게 대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도 양이 목자에게 어떻게 대하느냐가 상관이 없습니다. 양이 목자에게 효도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만드는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의 대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양이 목자에게 보답해 주기를 원하거나 어떤 여건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방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사랑입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선한 목자의 변변치 않은 양의 문제입니다. 선한 목자의 선한 양이 되어야 하므로 목자를 너무 피곤하게 하거나 지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선한 목자의 선한 양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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