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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역사하는 교회(행11장 19~21, 27~30,1 3장 1~3)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은 우리 소망교회가 창립 12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11명이 가정에 모여서 기도회로 시작한 이 교회가 12년 동안에 오늘과 같은 큰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부흥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의 교회됨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교회의 특징은 계속적인 개혁에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는 언제 개혁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개혁 정신을 가지고 교회의 교회됨을 살핀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교회됨의 참모습, 참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참표본을 찾아서 이상적인 본래의 모습으로 새롭게 개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두 개의 참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교회요, 하나는 안디옥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모든 교회의 모교회(母敎會)입니다. 구약에서도 교회의 예표(例表)가 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는, 참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비롯됩니다.
예수님 친히 "내 교회는 내가 세우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한편, 안디옥교회는 그와 대조적으로 당시 로마의 3대 도시의 하나인 안디옥(Antiochia)에 세워진 이방교회입니다. 오늘은 이 안디옥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안디옥교회가 핍박 가운데서 세워진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그 교회가 당한 핍박과 박해, 그리고 많은 고난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왜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있었는가, 왜 그토록 고난이 따랐는가-----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새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마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이유는 거의 교회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교인들이 잘못해서 분쟁도 있고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그러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은혜가 충만한 교회요, 나아가 은혜를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해서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의 것으로 알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권세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한 사람이 와서 거짓말 한마디했다가 당장 죽어 나갈 만큼 권세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 수많은 이적(異蹟)․기사(奇事)가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나아가 방언의 기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언어와 생각이 하나로 통하는 신비로운 교회였습니다. 온갖 능력이 나타나는 권세의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에 왜 환난이 있고 핍박이 있었겠습니까? 충성된 일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야고보는 목베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들 사건으로 해서 모든 교인이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이른바 이산(離散)의 종교 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핍박이 있기 전의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과 은혜 가운데서 행복했습니다. 그 신령한 은혜 속에 살면서, 그 은혜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평안하게 지내다가 주님의 재림을 고이 맞이하자'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동 안 저들은 저들만의 행복에 취한 나머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엄청난 사명의 말씀 ----- 이 위임된 명령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비상 수단을 통하여 저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흩어집니다. 다시 말하여 보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던 사마리아로도 스며들고 이방 땅으로도 갔습니다. 마침내 안디옥까지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발걸음은 정처 없이 방황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이런 걸음으로 이방 땅 곳곳으로 흩어져 가서 복음을 전하고 드디어 온 세상에 두루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이렇게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세워지는 교회는 그 교리가 순수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제 땅에서 쫓겨난 난민이 되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고생하고 사는 사람이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됩니다, 예수 믿으면 소원성취 됩니다"하고 전도를 한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당신이나 믿고 잘살아 보라고." 십중팔구 이런 대답을 들을 것입니다.
핍박받는 교회는 오직 예수, 오직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전할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주님은 곧 재림하십니다"---이 순수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이와 같이 종말론적입니다. 물질이 풍부하고 만사가 평안한 곳에 전해지는 메시지는 때로 세속화하기 쉽습니다. 물질적이기 쉽고 세상적이기 쉽고 자칫 잘못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환난과 핍박 속에 세워졌으리만큼 안디옥교회는 시작부터 순수한 복음, 순수한 진리, 깨끗한 신앙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 대해 그 다음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교회가 성령에 의하여 주도되는 교회라는 점입니다. 11장 24절이나 28절, 13장 2절 등 곳곳에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도 "주를 섬겨(13:2)"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은 '예배'라고 하는 뜻입니다. 주님을 예배하고 있었는데-----금식하며 주님을 섬겨 예배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말씀하시고 성령이 예언하시고 성령에 충만한 삶들로 해서 이 교회가 교회 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무슨 학원이나 강습소 같은 곳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셔서 교회입니다. 흔히들 교회를 사람들이 모여서 친교 하는 곳으로 착각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심으로,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힘입어 믿음을 받고, 성령에 힘입어 밝은 성경적 지식을 받아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이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교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철학이나 교리가 교회를 좌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영의 역사를 얼마만큼 체험하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까?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과거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앞으로 재림하실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제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그름 타고 오실 예수-----그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망의 예수님을 믿는 동시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영으로 오셔서 역사 하시는 현존의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와 함께 계셔서 말씀하시고 감동하시고 깨우치시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게 하시며, 범사에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영-----이것이 바로 성령임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성령이 나를 도우심으로 내가 나되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믿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저들은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이 말은 성경에서 같은 말로 통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들은 교제하며 봉사하며 섬기며 예배하며 교회를 이루어나갔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안디옥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로, 안디옥교회는 일꾼을 소중히 여기는, 일꾼들을 영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어디에나 지도자가 필요하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가령 어느 구역에 일꾼 한 사람-----시쳇말로 극성스러운 교인이 하나만 있으면 그 구역 전체가 부흥이 됩니다. 그런 반면에 지도자 한 사람이 없으면 그 구역은 전체가 그만 희미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고하는 일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난번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보니까 거기에도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지하교회의 지도자들, 참 훌륭합디다. 그렇게 되는 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만난 지하교회 지도자 중에 예순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만난 분은 그분의 따님이었습니다. 이야기인즉 이 할머니는 끌려 들어가 매맞은 것만도 세 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도 밖으로 나오면 또다시 집집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격려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이쯤 되자 공산당원들도 지쳐 가지고 나중에는 다시 할머니를 불러 말하더랍니다. "한번 더 매맞으면 죽고 말 것이니 웬만하면 이제는 좀 그만하십시오" 이에 할머니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대꾸하더랍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었소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오. 끌려가 죽지요 뭐." 그러시고는 또 전도하러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가 저를 만나고 싶어하셨습니다. 새벽마다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 방송을 들어오던 터라 '목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 하도 고마운 나머지 인사라도 한마디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자상하시게도 간접적으로 제게 쪽지 하나를 보내셨습니다. 저를 만났다가는 제게 피해가 미칠 것 같아서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아침에 공원으로 잠깐 나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먼발치서 목사님을 한번 뵙겠습니다.'
저는 아침을 먹다말고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공원 저쪽에 육십 노파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시더니 자전거를 탄 채 제 앞을 지나가시면서 목례를 하십니다. 그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립니다.
여러분, 이 노파와 같은 지도자가 있음으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와 같은 일꾼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만 하더라도 교회학교 선생님이 6백 명도 넘습니다.
성가대원도 6백 명 넘습니다. 집사님들은 2천 명도 더 됩니다. 이와 같은 많은 일꾼이 있어서, 그분들이 수고하심으로 교회가 교회 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안디옥교회는 많은 일꾼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원래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된 일꾼입니다. 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나바를 영접했고, 바나바는 사울을 인도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의 본디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을 해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위해 다메섹가지 가던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를 만나서 회개했지만 누가 알아줍니까? 아무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전도하려고 해도 다 도망갑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수상쩍은 눈초리로 쏘아봅니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기도하고 왔지만 아직도 그를 만나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교회 지도자들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런 바울을 먼데까지 찾아가 데려온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마침내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 사울을 세웁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지난날에는 핍박 자였으나 지금은 회개한 사울을 바나바는 믿었습니다. 사울의 중심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임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이 사람을 택해 쓰신다고 하는 사실과 그 계시성을 믿었습니다. 사울에 대한 그와 같은 신뢰를 바나바는 실천에 옮겼습니다. 안디옥교회로 하여금 사울을 지도자로 맞아들이게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높이고 등용해주지 않으면 인재가 인재될 수 없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잠깐 동안만 성경에 나타납니다마는 이와 같이 덕 있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사울이 사도 바울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가 바나바라고 하는 일꾼으로 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아울러 안디옥교회가 저를 믿어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종으로 영접하였기에 비로소 바울의 활동 무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일꾼을 키웠고 일꾼을 존경했고 소중히 여겼으며, 또한 그 일꾼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듯이 그리스도가 저를 택했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주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있으니 '크리스티아누스'-----곧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교회가 이 안디옥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생사를 초월한 사람, 전적으로 예수께 예속된 사람-----곧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해서 처음에는 욕으로 불리어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어디 한번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도시에 나와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니까 '이 귀한 복음을 어떻게 나만 듣고 있겠는가, 내 고향에는 아직 교회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으니 내가 선교사로 고향에 가서 예수를 전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스승을 찾아가 뜻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우리 고향에 선교사로 가렵니다." 그러자 스승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거 어려울 걸세. 고향에 가서 예수를 전해보아야 누가 자네 말에 귀나 기울여주겠는가.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셨는데……"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조롱하지만 않는다면 만족하겠습니다." "글쎄. 조롱할 것이고 욕을 할지도 모르는데?" "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돌을 던지지만 않으면 그런 대로 위로가 되겠습니다." "만약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돌을 던진다면 칼로 찌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칼로 찌른다면?" "칼로 찌르더라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죽게 된다면?" "예. 그렇다면 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그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제야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가게."
여러분, 이와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예수를 위하여" 하고 입으로는 잘 떠들면서 조금만 섭섭한 소리를 들으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생명과 명예와 마음과 기분까지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바쳐버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다 바치고, 예수를 기쁘게 하고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 ----- 이 소중한 이름이 바로 안디옥교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안디옥교회는 또한 구제하는 교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은혜를 나누어주는 교회입니다. 주는 교회가 아니라 나누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할 줄 아는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예루살렘교회와 같은 유대를 가졌다, 그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이 지금 흉년을 맞아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넉넉하니까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 아닌가 ----- 이래서 작정하고 실행하여 연보를 모았고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그 구제금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벽두부터 그들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처럼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나 하나 평안함으로 만족하실 것입니까? 지금도 어디에선가 우리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교인, 그런 교회를 말입니다.
동시에 안디옥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사도 바울이나 바나바가 그 얼마나 중요한 인물들입니까? 꼭 있어야 할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그들을 따로 세우라고, 그들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이들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방 땅에 선교사로 파송 했습니다.
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일꾼들이지만 보냈습니다. 이것이 안디옥교회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안디옥교회가 그 처음입니다.
교회란 본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곧 교회입니다. 반드시 먼 나라로 가야만 선교사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증인의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이런 분이 있습니다. 본래 장로의 딸이었는데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를 해서 믿지 않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더랍니다. 시집살이 10에 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도저히 그냥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저들의 우상 숭배를 견딜 수 없고, 시어머니의 등쌀을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래도'하고 참을 만큼 참아왔는데, 이제는 남편까지 한술 더 떠서 방탕한 사람이 되어버렸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교회에 몰래몰래 몇 주를 나왔답니다. 이윽고 제게 와서 하소연하기를 교회에 나와보니 이제는 살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혼을 해버리고 예수만 열심히 믿으며 살겠다고 합니다.
제가 이분에게 말했습니다. "이혼을 한다 만다 하는 것은 내가 간여할 바 못 되니 부인 마음대로 하십시오 마는, 내 이 시간에 한 마디만 하고 넘어가겠으니 잘 생각해보십시오"하고 저는 그 부인에게 한 달만 더 참고 살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뭐, 한 달쯤이야 더 살아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 한 달 동안은 부인께서 그 집에 보내진 선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 보십시오. 밉든 곱든, 좋건 나쁘건 그래도 십 년 세월 동안이나 봉사하던 가정인데, 그 사람들이 다 지옥 가도록 내버려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제가 그 가정에 선교사를 파송한 셈이 되었습니다. 부인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돌아갔습니다.
과연 부인은 그 한 달 동안 잘 참고 웃으면서 견디어냈습니다.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있어도 '나는 며느리가 아니고 선교사다, 저 할머니도 구원해야 한다' 하고 생각했으며, 남편이 못마땅해도 선교사의 마음으로 인내했다고 합니다. '저 남자도 내가 구원해야 될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드디어 남편이 묻더랍니다. "당신, 사람이 확 달라진 것 같은데 웬일이오?" 그런 남편에게 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당신의 아내가 아니라 선교사입니다." 이 작전(?)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그분의 시어머니와 남편은 마침내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못 받은 사랑, 지금까지 못 누린 행복에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 잊어버리고 생의 목적을 깨끗이 바꾸십시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선교의 대상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직장도 미션 필드(mission field)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선교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나를 통하여 저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나를 통하여 저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설교도 힘들고 부흥도 되지 않아서 선배 목사님을 찾아 부흥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네 마는……" 하고 선배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인들을 보니까 주일날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 월요일에도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화요일에도 들은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4백 명쯤 된다네."저희 교회 어떤 장로님은 지난 주일의 설교 테이프를 하나 사가서는 일주일 동안에 스무 번이나 듣는다고 합니다. 스무 번을 듣는데도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린답니다. 어떤 분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한번 들어야만 잠이 온다고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들은 말씀을 한 주일 내내 간직하여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생각하고 그 말씀 안에서 결단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 그 말씀을 전하며 사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예배당을 새로 지어 입당할 때, 그는 세 가지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시여, 이 예배당에 거하시옵소서. 이 예배당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예배당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수는 많지만 바람 한번 불면 다 날아가 버릴 쭉정이는 말고, 그 수야 얼마가 되든 알곡으로 채워지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알곡입니까, 쭉정입니까? 들락날락하기만 하는 교인입니까, 참 크리스찬입니까? 증인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 부흥은 교회의 교회 된 본질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교회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이 목적이냐가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만이 함께 하고, 성령이 교회로 교회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목적이 될 때에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는 교회가 됩니다. 살아 역사 하는 교회란 교인들의 윤리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묶는 계명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 될 때에 성령께서 교회가 살아 역사 하도록 친히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참 교인이 되고, 그로써 참 교회가 되고, 그로써 주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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