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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 육신(요 1:1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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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육신(1:14)

 

이 본문은 신학자 칼 바르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말씀입니다. 그의 저서Dogmatics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는 구절을 계속 인용하며 이 말씀을 해석한 것이 그 책 내용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도 있고, 요한복음을 한 구절로 요약한 핵심적인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이미 요한복음 서두에서 공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를 우리 성격에서 번역한 것인데, 우리나라 말로써는 그 의미를 그대로 옮길 수 없는 특수 용어입니다. 옛 성경에 보면 로고스를 길 도() 자로 번역을 하여 "태초에 도가 있었느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슨 말로 번역을 하더라도 로고스가 원래 가지고 있는 개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는 언어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원래 철학적 용어이므로 이 말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고, 단지 뜻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 헬라적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언어와 문화적 현실을 감안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에게는 로고스로,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방인들에게는 주(LORD)라는 말로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 자체의 배경이나 어원을 알려고 애쓰는 것 보다는 저자가 이 용어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 말에 "여덟 자 몽둥이를 내휘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덟 자나 되는 큰 몽둥이로 내휘둘러도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해석을 달리하여 여덟 자나 되는 몽둥이를 휘두를 수 있는 방이면 그 방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 하고 해석을 한다면 원래 그 말이 뜻하는 내용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바로 아는 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는 태초부터 계셨고, 그는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창조주이심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헬라 철학에서 쓰고 있는 로고스 개념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만, 사도 요한이 자기 나름대로 특수하게 그 개념을 정리해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헬라철학의 로고스와는 전혀 다른 비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어휘 중에서 하필이면 사도 요한은 "육신"이라는 단어를 썼느냐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영어 성경에 보면 "The Word became flesh"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flesh는 고깃덩어리인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말로써 결국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이 "말씀이 사람되었다" 라고 표현하지 않고 육신이라고 했을까요? 그 당시 노스틱이라고 하는 특수한 사상이 있었는데, 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사람됨을 왜곡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완전한 인간 되심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나 인간이라는 단어보다는 육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강한 표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인성을 나타내는 강한 표현의 수단이 육신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다음, 본문에는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사도 요한의 간증이 있습니다. "보았다"라는 말 역시 특수 용어로써 눈으로 똑바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어른들을 뵙거나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을 볼 때에는 눈의 시선이 양복의 윗단추 두 번째 위치 정도에서 머물러야 예의바른 태도였습니다. 똑바로 쳐다보거나 응시한다는 것은 불손한 태도라는 개념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 마주쳐다보며 눈빛을 보고 얼굴 표정 등을 읽어가면서 말해야 의사소통이 더 잘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필자는 강의나 설교할 때에 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아래만 쳐다보는 사람은 이야기를 듣는 건지 아닌지를 잘 몰라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서로 눈과 눈을 마주보며 말을 해야지 목소리만 듣겠다면 녹음 테이프를 듣는 게 편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았다"라는 의미는 멀리서 보았거나 우러러 본 것이 아니라, 뚫어지게 똑바로 보았다는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똑바로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 있고 똑바로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요한 11:1에 보면 좀더 강한 표현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 즉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확실하고 틀림없는 사실로써 예수님이 입으신 육은 완전한 육신이었음을 말하기 위해 위와 같은 표현을 쓴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가 완전한 사람 됨을 육신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꼭 밝히고 있는 이유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그 당시의 노스틱주의(Gnostism)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헬라 철학적 입장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헬라철학은 이원론 사상으로써 하나님은 높은 분이고 사람은 낮은 존재이며, 정신적인 것은 모두가 깨끗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은 다 더럽고 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깨끗한 이성이, 육체라는 악한 감옥에 갇혀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존재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번갯불을 보듯이 번쩍하고 육체를 벗어나는 이성이 있으며, 그들이 바로 철학자라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은 다 더럽고 악하다라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불교 사상과 많이 통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의 사고로써는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 "만나 보았다", "우리가 보았다"라고 증거 하니 노스틱주의자 나름대로 해석을 하여 "보이기는 보였지만 그 몸은 보통 몸이 아니었다"라고 왜곡을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eeing body(볼 수 있을 정도로 나타난 몸)로서 나쁘게 표현하면 하나의 현상 내지는 허깨비로 그냥 번쩍하고 보일 수 있도록 나타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3년 동안을 허깨비에 홀려서 다닌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높이다 보니, 절대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이 그 당시 만연한 헬라 사상이었고, 사도 요한은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육신이 되었다"고 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 14:2-3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다"라고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인간의 지혜로써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역설(paradox)입니다. , 고의로 논리를 뒤집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실인데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경험하는 것으로 사실은 사실인데 앞뒤로 이치를 맞출 수가 없고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음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신학적인 용어로는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carnal은 육체라는 뜻이고 incarnate는 육신을 입었다라는 뜻으로써 incarnation하면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다가 "성 육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성 육신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직접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이 관계를 "대화적 관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화적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 어느 선교사가 그곳의 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실수로 개미의 집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본 스님은 많은 생명을 죽였다고 깜짝 놀라며 안타까와 했습니다. 선교사는 대단히 민망하여 말하기를 "내가 밟고 싶어서 밟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에 눈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이니 정말 미안하오. 어떻게 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더니, 윤회설을 믿고 있는 그들이기에 다음과 같은 방법을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겠소" 윤회설을 믿는 입장에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 개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선교사는 스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정색을 하고 "그래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어린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어린아이들의 언어를 써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이 되어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란 말은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듣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둘째로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죄악 많은 세상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간 역사에 오셔서 인간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필자가 늘 고맙게 생각하는 일 중의 하나는 우리가 연대를 계산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를 쓰는 일입니다. 공산당까지도 이것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역사의 중심이 되셔서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으며 모든 판단의 기준, 정의의 기준, 진리의 기준이 되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학, 철학, 법학, 심리학, 예술 모두의 근원은 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건물 중에도 세계적인 건물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것들이며, 음악, 미술 등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세계적인 거작의 내용은 모두가 예수님에 관한 내용뿐입니다. 그가 오셨다는 그 사실이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셋째로 성육신은 우리의 문화권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그 문화의 보자기 속에 들어가서 살기 때문에 문화권이 다르면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 나라에 오시면 우리를 위해서 한국말을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국 문화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사용하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문화의 옷을 입으셨다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성경은 전부가 히브리, 헬라 문화권에서 설명된 내용들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문화 속에서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을 믿는 믿음이며, 특별히 나를 위하여 사람되어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셨는데 "거하신다"의 헬라 원어의 뜻은 천막을 친다라는 말입니다. 천막이란 영구적인 집이 아니고 임시 거처하는 장소인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시어 임시로 천막을 치시고 그 천막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교리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항상 함께 계셔서 내가 당하는 사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혹 실패했거나 병상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사건을 당한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사도 요한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행한 제자로서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면서 그 분의 남루한 옷이나 기대에 어긋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내용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렸으니 창피하고, 구유에서 출산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면서 요셉은 약혼을 왜 했느냐라고 따진다면 그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고, 특히 나를 위하여 내 문화권 속에 내 삶의 현장 속에 오셨다는 것을 믿고, 그이기에 영광이 나타날 것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기적도 있었고, 말씀도 있었고, 때로는 준엄한 모습으로, 때로는 인자한 모습이 있었지만, 사도 요한은 그 모든 것 속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의 어느 기사를 읽든지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14절 끝에 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공로입니다. 우리는 내 공로나 내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구원받음은 잘 아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본체이시므로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보았습니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은혜는 어딘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지고 진리는 차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있는데 진리가 없거나, 진리가 있는데 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은혜를 찾는 자도 예수를 만나면 만족하고, 진리를 찾는 자도 예수를 만나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길과 진리와 예수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헬라 사람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진리는 예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요한복음 8: 32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인데, 그 진리는 예수이므로 종합해서 정리하면, "예수를 알라, 그러하면 그 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귀한 말씀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알게 되면 비로소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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