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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을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만은 별도로 제 4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세 복음은 같은 관점에서 기록한 것인데 비해 요한복음은 다소 다른 관점에서 다른 순서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좋아하는 복음이 다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은 특히 높은 수준의 진리를 말해 주는 책으로써 많은 성도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주고 있음을 기독교 역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이 복음은 성경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보고 있기에 더욱더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계 4 : 7) 상징적으로 나타난 네 가지 영물들(사람, 소, 사자, 독수리)이 있는데, 이 영물들의 특성과 복음서의 특징이 서로 유사하여 비교하여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령, 마가복음은 소의 특징과 비슷하다 하여 소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소는 인간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동물로서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그의 가죽과 뼈와 살은 인간들에게 바쳐지는 최고의 희생적인 동물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특성도 생명까지 희생하며 봉사하시는 주님으로 부각되어, 말씀보다는 행동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였기에 그의 시각으로는 예수님께서 소외된 자들, 특히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신 점에 감명을 받아 사랑이 넘치는 인간적인 예수님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사자로 비유하는데, 사자는 동물들의 왕으로서 권세를 가진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서 부각된 예수님은 율법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높은 권세를 가진 왕으로서, 메시야로서의 주님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독수리는 높은 곳을 상징하는 동물이므로 이 복음서에서 강조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됨과 그가 곧 하나님이심을 묘사하여 아주 높은 데에서부터 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높은 곳에서 한 눈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 이 복음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는 어떤 다른 특징이 있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의 행적보다는 말씀 위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공관복음에서 한결같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 세례 받으신 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승천하신 일 등의 행적 위주의 기사가 이 복음서에서는 모두 빠져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에 대한 기사,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길게 다 기록하고 있어 마가복음과는 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어떤 사건에 대해서 해설이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저자 자신의 해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어 사건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만에 지을 것인가 하고 주님을 비난했음을 기록하고, 바로 이어서 이 말씀의 뜻은 주님의 육체를 비해서 하신 말씀으로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요한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적 사건에 대해서도 공관복음에서는 "이적"이다, "권능"이다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여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라고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을 표적(sign)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표적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건은 같은 사건이지만 공관복음에서는 깊은 뜻을 모르고 사건만을 기록했고, 요한복음에서는 사건의 뜻을 해설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공관복음에서는 "아! 굉장하다, 모두가 놀랐다"라고 사건 위주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그렇게 간단히 끝낼 수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에서는 먼저 사건을 기록하고, 그리고서는 예수님의 피와 살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것은 오병이어의 사건이 마술적인 능력이 아니고 오천 명을 상대로 하는 성찬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는 꼭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는 것으로써 참 생명의 떡인 예수님 자신을 보여 주신 하나의 싸인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셋째, 공관복음은 주로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전설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데 큰 장애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분은 갈릴리 촌에서만 주로 일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 것뿐인데 어찌 메시아이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추려서 의도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복음에서는 고관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기사 역시 가난한 자, 약한 자, 병자들만 상대한 예수를 어찌 모든 사람의 메시야로 믿을 수 있겠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사건이 있고,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은 만나려고 한 사실 등을 기록하여 고관들과의 접촉이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특징은, 다른 복음서에 대한 보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 때(A.D. 95)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풀려 나와 에베소교회에서 주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백세까지 그는 장수하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마지막에는 보행조차 불가능하여 그의 제자들이 들것으로 실어서 강단으로 모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거의 누운 채로 서론도 결론도 없는 말씀으로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매번 같은 설교를 했지만 그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이 노쇠한 스승을 지켜보면서 걱정하게 된 문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자기들의 스승이 머지않아 돌아가시게 되면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제자들은 사도 요한에게 강권하였고, 이 요청에 의해서 요한복음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이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있었으므로 이들 복음서에서 누락된 일들을 보완해야 하는 보충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상으로 요한복음은 특별히 깊고 높은 진리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이나 신학적인 의미는 시간적인 제약으로 본문을 다루면서 앞으로 조금씩 보충하고자 합니다.
이제 본문(요 1:1-5)으로 돌아가서 이 장(章)에서는 주로 서론적인 것을 다루고 다음 장에서 본론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 : 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는데,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말씀"입니다. 철학사를 공부해 보면, 아주 옛날 헬라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어느 학파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고, 또 어느 학파에서는 불이다, 공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그 옛날에 만물의 근원, 즉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는 것은 대단한 수준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본질이란 헬라말로 '아르케'로서 곧 시작(begin)이라는 뜻이며 본문의 태초라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으로 말하면 처음이요, 질적으로 말하면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상으로 보면 시간 개념보다는 질적인 개념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은 직선적인 것으로서 시간의 길이가 길다 짧다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어느 사람이 천당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의 천 년이 하늘나라에서는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1분이다"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백만 불이 천국에서는 얼마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1센트라고 대답하셨고,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하나님, 저에게 1센트만 주세요" 했답니다. 천국에서 1센트만 가지고 세상에 오면 백만 불이 되는 계산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그래, 1분만 기다려라"라고 재미있는 대답을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직선적인 시간 개념으로 몇 년, 몇 광년 하면서 계산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히브리적 시간 개념은 수량적이 아니고 사건 중심적 시간 개념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갔어도 사건이 없는 시간이면 시간이 아니고, 오직 사건이 있는 시간만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경험하지만, 공상만 하고 하루를 보내었다면 그 날은 지나갔어도 의미가 없는 시간으로 그 날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말도 수량적인 시간 개념으로 풀이하지 않고 질적으로 생각하여 만물이 있기 전에, 즉 모든 만물이 형성되기 전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씀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소개함에 있어서도 초월적인 존재로서 세상과 관계없이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으로부터 예수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본래 누구인가 하는 본래성을 알고 그리고 현재를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본래성을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본래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고 현재를 보면 모든 것이 쉽게 풀어지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잃어버려 난처했을 때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현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본래적으로 가진 것 없이 나왔다는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심히 애통해 하지만, 그것은 본래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본래는 아무 것도 없었고, 중간에 조금 가졌다가 다시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이므로 잃었다고 애통해 하거나 섭섭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본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분이 본래 누구인가 하고 본체를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오늘 그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해지는 것입니다. 가령, 지금 현재에 부모님과 나 사이에 다소 섭섭한 문제가 생겼어도 본래성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그 분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섭섭함에 대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 분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본래성을 먼저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적의 사건을 보고 십자가를 보면 그 사건 속에서 내게 향하신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 설명하면,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을 그대로 사건으로서 본다면, 한 번 죽기도 힘든데, 나사로는 두 번 죽는 경험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히 살지 않을 바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실은 사건 적인 의미로 볼 때는 별로 고마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계시적으로 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생명을 초월한 사랑의 역사를 나타내셨다고 보면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강조하고, 마가복음에서는 권능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사랑의 주로 소개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으로써, 즉 로고스로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말은 원래 헬라 철학에서 쓰는 말로써, 소위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로고스라는 말을 빌려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노스틱주의자들이나 헬라 철학이 의미하는 로고스와는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노스틱주의자나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존재자로서 피조물이며 피조물 중에서는 가장 높은 분을 말하는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며 곧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교적 의미에서 특별히 히브리적 개념에서 로고스를 소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로고스를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창조 전에 계시는 로고스입니다. 창조에 포함된 피조물로서의 로고스가 아니고 창조 전에 계신, 즉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로고스를 말하며, 둘째는 하나님이신 로고스입니다. 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을 포함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대개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는 호 데오스를 말하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하나님은 정관사가 빠진 데오스입니다. 셋째로 로고스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창조주로서, 말씀이 아니고서는 창조된 것이 없는 귀중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말이란 언어만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헬라 사람들에게는 말이 속에 있으면 사상이고 입으로 나오면 언어가 되며 말이 움직이면 행동으로써, 행동력까지 포함해서 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들이 기압을 넣으면 비둘기가 나오기도 하고 없어지게도 하는 주술적인 말까지도 생각하는 것이 헬라 사람들의 로고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개념을 좀 빌려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중에 히브리 사상으로 창세기 창조에다가 비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지가 창조되는 1:1의 태초와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 1:1에서의 태초를 비교해서 설명을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태초가 더 위인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제 2의 창세기로 보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물이 창조되는 창세기의 창조는 썩어지고 타락한 창조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이 결여된 창조라고 볼 수 있지만, 요한복음의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는 참의 세계로서 제 2의 창조, 재창조 또는 제 2의 창세기로서 예수님의 생애를 설명하려고 의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첫 글자 "태초"는 똑같은 것으로 참으로 위대한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된 것은 굉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히브리적 개념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적으로 해석을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은 선포되고 그 말씀이 저기에 전달이 되면서 그 쪽에서 말씀의 역사로 천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전해진 말씀과 그 말씀의 역사를 별도로 본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영이 물위에 운행하시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원뜻은 히브리말로써 닭이 계란을 품고 있다는 뜻인데, 닭이 병아리를 만들 때에는 계란들을 품속에 품고서 꺼벅 꺼벅하며 해산의 고통을 합니다. 잠깐씩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부시럭거려서 계란을 굴려 그 속에서 병아리가 탄생됩니다. 누군가가 가르쳐 준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잘하고 있습니다. 어미닭이 자기 체온을 녹여서 따스하게 계란을 품고 부시럭거리는 모습을 천지창조 하시는 하나님께로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우주를 품으시고 부시럭 부시럭 해서 여기서 천지가 창조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말씀이 선포되고 그리고 성령이 감동 감화되는 것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똑바로 역사 하시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 즉 제 2의 창조도 같은 역사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주도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느 전도자를 통하여 객관적인 말씀으로 선포되고 누군가에게 전해져서 성령의 영이 그의 영을 덮고 부시럭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감동되어 마음 문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여 우주보다 귀한 생명이 비로소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두에서 본문의 말씀으로 서론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는 역사로서 제 2의 창세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1-12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믿는 자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결론으로 삼위일체의 역사를 비유로 설명하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 성령을 태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단순히 하나가 아니고 그 속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밝은 빛과 뜨거운 열이 합쳐져서 우리에게 전해져야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포기의 풀이 자라나는 데도 전깃불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입니다. 빛은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의 시작은 말씀으로, 말씀을 떠난 창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된 것처럼 말씀으로 한 생명이 다시 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빛이며 생명이며 하나님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서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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