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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태복음 11 : 1 - 15)

by 【고동엽】 2022. 10. 28.
목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태복음 11 : 1 - 15)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 비유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그 문화적 언어 속에서 예수님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나게 된 문제의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 제사장 사가라와 엘리사벳의 아들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광야의 사람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에 대한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로서는 모름지기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Essenes)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며 살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례 요한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만 다 바친 신비롭고도 극기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증거를 함으로 선지자의 직무를 다하게 됩니다. 그는 특별히 다른 선지자들이 몇 백년 후에 되어질 일들을 예언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바로 앞에 세워 놓은 자리에서 이 분이 메시야라고 증거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정한 메시야를 세워 놓고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극소수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뿐(1 : 40) 여전히 그를 따를 만큼 그는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온 이스라엘, 아니 온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야를 이렇게 분명하게 목격하면서 확실하게 증거하게 된 그는 가장 종말적이고 가장 구체적이며,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셨고 또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며 그의 중요함과 대단함을 이렇게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데 그가 지금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제는 마음에 고통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묻는 것으로, 이는 처음부터 있을 수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 본인에게 직접 가서는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 하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요, 이 질문 자체가 예수님께는 굉장한 모독과 굴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있어서는 안될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에 대한 대답을 세 가지 방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첫째는 본대로 말하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이제 5절 말씀을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렇게 보고들은 바를 가서 그대로 말하라! 이 내용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 메시아인 것을 한번 알았으면 되었지 이제 와서 무슨 흔들리는 소리를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구구한 설명을 하시거나 세례 요한의 나약하고 희미한 상태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참으로 담담한 표현으로, 그러면서도 매우 확실한 대답으로 "본 대로, 그리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대답은 조금 더 비판적인 내용으로 6절에 기록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 대하여 만족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병들어도 만족하고, 실패해도 만족하며, 감옥엘 가도 만족하고, 굴욕을 당하더라도 예수로 인해 만족한 그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만 바로 발견할 수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어떤 분은 건강을 잃어버렸기에 예수님을 발견하게도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업에 실패함으로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만 얻으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저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여러 달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까?"하는 물음의 음성이었다고 합니다. 실로 이 얼마나 좋은 질문이며, 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런데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이것을 주제로 하여 소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하는 책이 쓰여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얻고 싶고, 그리스도만을 닮고 싶으며,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하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내다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도 있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처한다 하더라도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 다시 말하면 나를 인하여 어떠한 지경에서도 만족해하는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 세례 요한에 대한 일단의 비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심정으로서는, "그래, 너는 나로 인해서 만족하지 못하는구나! 감옥 밖에 있을 때에는 만족해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니 생각이 달라지는 게로구나! 언제는 나를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고 했는가 하면 나는 그의 신을 들기조차 감당치 못하겠노라 만족한 확신 속에 나를 증거하더니, 감옥에 들어가고 보니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느냐?"며 직접 세례 요한의 의중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제 그 세번째 대답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다음에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흔들리는 갈대"라든가 "부드러운 옷 입은 자"라는 이 말씀을 하시게 되는 대상은 바로 세례 요한과 그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이 갈대라는 것은 특별히 요단강가와 그 언덕에 많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아기 모세가 갈상자에 담겨 하숫가 갈대 사이에 놓여졌다는 것으로 익숙해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갈대는 그 몸통은 가늘지만 길이로 치면 3-4미터가 되는 것으로 비교적 많은 잎을 가지고 물이 많은 곳에서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워낙 가늘면서도 3-4미터씩이나 길게 자라는 것이고 보니 조그만 바람결에도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갈대라고 하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가늘면서도 높이 자란 갈대! 이것에게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약하여서 잘 부러진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42:3)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 갈대는 잘 상하고 잘 부러지는 약한 식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쉽게 흔들린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린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태풍이라도 한번 지나가게 되면 이 갈대는 그대로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대에게 있는 이 두 가지의 특징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뿌리가 있고 수분도 좋아요. 그리고 속히 잘 자라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약합니다. 그 때문에 약한 자를 가리켜서 갈대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하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약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계획했던 것도 아니고 팔아먹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사랑했어요. 그러나 약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의 희생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으신 것과는 달리 '필로스'인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함으로 사랑의 질이 다르긴 합니다만 어쨌든 사랑하기는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설명이 약간 붙는다면 "제가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라며 자신의 심정을 밝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그러한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할 때에 그것은 갈대와 같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으로는 사랑합니다는 것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순교를 두고 생각하더라도 순교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여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긴 있되 약한 믿음이어서 그 순간을 감당치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약한 것이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뿌리는 분명히 있어요. 그러면서도 나약해서 바로 서지를 못하고 흔들린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빠져나가거나 멀어지는 것은 아니면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서는 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갈지자() 걸음의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는 어떤 때에 보면 천사 같다가도 어떤 때에 보면 악마 같고, 또 어떤 때에는 굉장히 열심히 무슨 일이든 감당해 낼 것 같은데 어떤 때에는 또 싸늘하게 식어서 예수 믿는 사람인 것조차 알아보기가 힘들어지는, 이러한 것이 바로 약한 것이요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며 야유의 성격이 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무엇하러 나갔더냐? 갈대를 보러 나갔더란 말이냐? 할 때 이것도 일단은 한번 비웃는 이야기입니다만 특별히 "그러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는 표현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으니 그럴려면 왕궁으로 가야지 왜 광야로 나갔더냐 하시는 뜻으로 그 야유성의 농도가 더욱 짙은 것이라 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갈대"나 부드러운 옷이라고 할 때의 "부드러운"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읽노라면 마치 싯귀와 같은 운율을 느끼게 해주는 말입니다.

이는 갈대라는 헬라말은 '칼아모스'이고 부드럽다는 헬라말은 '말아코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칼아모스를 보러 나갔더냐? 말아코스를 보러 나갔더냐는 것으로 칼아모스든 말아코스든 둘 다 흔들리는 것이요, 시원치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흔들리는 갈대란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겠습니까? 이것은 일단 세 단계로 나누어 그 대상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흔들리는 갈대란 군중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뜻하는 바의 주관이나 확실한 신앙도 없이 그저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며 왔다갔다하는 것이 꼭 갈대가 움직이는 것과 같더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광야로 간다니까 그리로 갔다가, 오늘은 또 예수님을 따라서 여기에 있고,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고 보니 모르겠다며 돌아서는 이러한 군중들의 모습이 마치 물거품과도 같고 갈대의 흔들거림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그의 영향력과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끊이지 않았고 그에게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겠다는 자들이 곳곳에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3 : 5-6).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저가 곧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갖게 되므로 나는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오히려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는 자기 확인을 시켜야 되기도 하였습니다(3 : 15-17, 1 : 19-23). 그러나 그럴 때의 세례 요한의 기분은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우쭐했으면 하였지 결코 나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감옥에 갇힌 몸이 되고 보니 이제는 그 누구도 방문 한번 와주는 자가 없을 정도로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심이 깡그리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세례 요한이 지금 낙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네가 무엇을 하려고 나갔더냐? 진정 네가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면 사람들이야 오든 안 오든, 너의 인기가 있든 없든,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냐? 사람들이 따라주던 한때에는 위대한 선지자 같이 느껴졌고, 감옥에 갇힌 채 고생이 계속 되는 지금에는 마음이 변하더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군중! 그 흔들리는 갈대! 그것을 보러 나갔더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본래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지 흔들리며 왔다갔다하는 군중들을 보러 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지적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단계의 해석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들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세례 요한은 비록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나 잡아먹으면서 흉한 모습으로 지내기는 하였으나 그 영적인 권위는 놀라운 것이어서 메시야로 착각이 되어질 정도였건만 이제 감옥에 갇힌 후에 보니 초라하기가 그지없단 말입니다. 그 정도에서 이렇게 되었다면 무슨 능력이 좀 나타나서 옥문이라도 열려지고 해야겠는데 속수무책으로 세월만 가고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계속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자처하고 다녀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회의와 의구심 속에 있기에 그 흔들리는 마음을 읽으시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아 너희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 단계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다른 대상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세례 요한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훌륭한 선지자로 인정하시어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며, 또한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바로 그 세례 요한이라고까지 하셨고 보면, 세례 요한의 마음이 지금 흔들린다고 하여 그를 지적해서 하신 말씀 같지는 않다고 하는 견해를 펼치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입장과 이 문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온 선지자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지자의 마음도 흔들릴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왔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직접 보는 바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불의를 지적한 탓으로 이렇게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하게 되고 보니 이제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당시의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끝내는 자기의 아내로 취해 버리고 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아도 그런 면에서는 실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집안임을 세상이 다 아는 처지였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왕인 헤롯의 처사가 너무도 잘못 되었음을 보고는 직접 왕을 책망하며 그 옳지 못함을 직언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처지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간만 흐르다 보니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왜 의인이 이런 고생을 하여야 하는가? 더구나 메시아가 오기 전이라면 앞서간 많은 선지자들이 고난을 당했듯이 나 또한 당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분명 메시아가 왔으니 그렇다면 옥문이 열려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메시아는 말이 없는 것인가? 하는 등의 갖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세례 요한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전달되기를 바라시는 회답의 말씀으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리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이 말씀을 전해 들은 세례 요한은 무슨 생각을 하였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저 "아멘"하고서는 그렇다면 메시야는 오셨구나! 하고 말았을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옥문까지도 열어 주셔야지 하는 생각을 한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궁금하단 말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든, 문둥이를 깨끗게 하시든 간에 그것은 그쪽 이야기이지 나와는 관계가 없지 않느냐 말입니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입니다. 만일 옥문이 열려지지 않은 채 이대로 있다가 여기에서 불의를 책망한 죄로 목베임을 당하여 죽게 된다면 과연 하나님을 계신 것인가, 안 계신 것인가 말입니다. 문둥병자 몇 사람이 깨끗해지고, 소경이 보게 되며,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고 땅에 떨어지는 판국인데 무엇보다도 의이니 고난받고 있는 옥문이 열려야 할 것이 아니냔 말입니다. 이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그 이유를 이렇게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합해 보면 대략 셋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세례 요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마음이 완전히 잘못 되었거나 흔들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내어 아직도 메시야가 활동하고 계신가를 알아봄으로 지금까지 확신해 온 바 자기의 믿음과 신학 등을 재확인하고 싶은 뜻에서 이렇게 제자들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인내의 한계가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 다 그렇듯이 잠깐 겪는 고난은 그래도 쉬운데 고난이 오래 계속 되다 보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몸에 병이 났을 때도 보면 병이 난 처음에는 아무리 큰 병이 발견되었을지라도 곧 낫겠지요 하고 위로를 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몇 개월이 지나고, 1, 2년이 되고 보면 그 때에는 위로할 말도 없고 환자 또한 어떠한 말에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쯤 되면 대체로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길어지는 고통과 고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것도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순간에 생명을 빼앗아 간다면 간단할 수도 있겠으나 두고 두고 사람을 괴롭힐 때, 그 고통을 감당하기란 죽음보다 힘든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잘 참아오다가도 끝내는 순교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마태복음 37-12절의 내용에서 밝혔듯이 임박한 심판을 묘사하여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고 한 것이 비추어 이제 메시야가 오셨으니 당장에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갇혀 있는 이 옥문이 열려지면서 "요한아 오랫동안 고생했구나"하는 이런 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만 계속 흐를 뿐 그것이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세례 요한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는 그의 인간성의 문제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인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이런 문제들은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이제 와서 새삼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이미 그러한 것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당하는 고난을 중심으로 메시야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메시야인 예수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 간에 내 중심, 내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보고 성경을 보아서는 결코 알 길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성경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기도는 기도대로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야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이 내 문제를 먼저 붙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풀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나약합니까? 이사야 263절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마음의 뜻이 굳은 사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처음부터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고 가는 길이기에 내가 당하는 고난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오직 그분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으로 족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고난!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태복음 11 : 1 - 15)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 비유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 그 문화적 언어 속에서 예수님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나게 된 문제의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 제사장 사가라와 엘리사벳의 아들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광야의 사람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에 대한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로서는 모름지기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Essenes)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며 살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례 요한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만 다 바친 신비롭고도 극기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증거를 함으로 선지자의 직무를 다하게 됩니다. 그는 특별히 다른 선지자들이 몇 백년 후에 되어질 일들을 예언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바로 앞에 세워 놓은 자리에서 이 분이 메시야라고 증거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정한 메시야를 세워 놓고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극소수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뿐(1 : 40) 여전히 그를 따를 만큼 그는 훌륭한 선지자였습니다. 온 이스라엘, 아니 온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야를 이렇게 분명하게 목격하면서 확실하게 증거하게 된 그는 가장 종말적이고 가장 구체적이며,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셨고 또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며 그의 중요함과 대단함을 이렇게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데 그가 지금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제는 마음에 고통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묻는 것으로, 이는 처음부터 있을 수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 본인에게 직접 가서는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 하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요, 이 질문 자체가 예수님께는 굉장한 모독과 굴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있어서는 안될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에 대한 대답을 세 가지 방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첫째는 본대로 말하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이제 5절 말씀을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렇게 보고들은 바를 가서 그대로 말하라! 이 내용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 메시아인 것을 한번 알았으면 되었지 이제 와서 무슨 흔들리는 소리를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구구한 설명을 하시거나 세례 요한의 나약하고 희미한 상태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참으로 담담한 표현으로, 그러면서도 매우 확실한 대답으로 "본 대로, 그리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대답은 조금 더 비판적인 내용으로 6절에 기록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 대하여 만족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병들어도 만족하고, 실패해도 만족하며, 감옥엘 가도 만족하고, 굴욕을 당하더라도 예수로 인해 만족한 그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만 바로 발견할 수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어떤 분은 건강을 잃어버렸기에 예수님을 발견하게도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업에 실패함으로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만 얻으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저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여러 달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까?"하는 물음의 음성이었다고 합니다. 실로 이 얼마나 좋은 질문이며, 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런데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이것을 주제로 하여 소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하는 책이 쓰여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얻고 싶고, 그리스도만을 닮고 싶으며,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하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내다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도 있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처한다 하더라도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 다시 말하면 나를 인하여 어떠한 지경에서도 만족해하는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 세례 요한에 대한 일단의 비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심정으로서는, "그래, 너는 나로 인해서 만족하지 못하는구나! 감옥 밖에 있을 때에는 만족해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나니 생각이 달라지는 게로구나! 언제는 나를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고 했는가 하면 나는 그의 신을 들기조차 감당치 못하겠노라 만족한 확신 속에 나를 증거하더니, 감옥에 들어가고 보니 이제는 생각이 좀 바뀌었느냐?"며 직접 세례 요한의 의중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제 그 세번째 대답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다음에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흔들리는 갈대"라든가 "부드러운 옷 입은 자"라는 이 말씀을 하시게 되는 대상은 바로 세례 요한과 그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이 갈대라는 것은 특별히 요단강가와 그 언덕에 많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아기 모세가 갈상자에 담겨 하숫가 갈대 사이에 놓여졌다는 것으로 익숙해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갈대는 그 몸통은 가늘지만 길이로 치면 3-4미터가 되는 것으로 비교적 많은 잎을 가지고 물이 많은 곳에서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워낙 가늘면서도 3-4미터씩이나 길게 자라는 것이고 보니 조그만 바람결에도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갈대라고 하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가늘면서도 높이 자란 갈대! 이것에게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약하여서 잘 부러진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42:3)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이 갈대는 잘 상하고 잘 부러지는 약한 식물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쉽게 흔들린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린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태풍이라도 한번 지나가게 되면 이 갈대는 그대로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대에게 있는 이 두 가지의 특징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뿌리가 있고 수분도 좋아요. 그리고 속히 잘 자라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약합니다. 그 때문에 약한 자를 가리켜서 갈대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하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약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계획했던 것도 아니고 팔아먹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사랑했어요. 그러나 약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의 희생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으신 것과는 달리 '필로스'인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함으로 사랑의 질이 다르긴 합니다만 어쨌든 사랑하기는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설명이 약간 붙는다면 "제가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라며 자신의 심정을 밝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그러한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할 때에 그것은 갈대와 같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으로는 사랑합니다는 것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순교를 두고 생각하더라도 순교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여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긴 있되 약한 믿음이어서 그 순간을 감당치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약한 것이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뿌리는 분명히 있어요. 그러면서도 나약해서 바로 서지를 못하고 흔들린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빠져나가거나 멀어지는 것은 아니면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서는 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갈지자() 걸음의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는 어떤 때에 보면 천사 같다가도 어떤 때에 보면 악마 같고, 또 어떤 때에는 굉장히 열심히 무슨 일이든 감당해 낼 것 같은데 어떤 때에는 또 싸늘하게 식어서 예수 믿는 사람인 것조차 알아보기가 힘들어지는, 이러한 것이 바로 약한 것이요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며 야유의 성격이 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무엇하러 나갔더냐? 갈대를 보러 나갔더란 말이냐? 할 때 이것도 일단은 한번 비웃는 이야기입니다만 특별히 "그러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는 표현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으니 그럴려면 왕궁으로 가야지 왜 광야로 나갔더냐 하시는 뜻으로 그 야유성의 농도가 더욱 짙은 것이라 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갈대"나 부드러운 옷이라고 할 때의 "부드러운"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읽노라면 마치 싯귀와 같은 운율을 느끼게 해주는 말입니다.

이는 갈대라는 헬라말은 '칼아모스'이고 부드럽다는 헬라말은 '말아코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칼아모스를 보러 나갔더냐? 말아코스를 보러 나갔더냐는 것으로 칼아모스든 말아코스든 둘 다 흔들리는 것이요, 시원치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흔들리는 갈대란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겠습니까? 이것은 일단 세 단계로 나누어 그 대상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흔들리는 갈대란 군중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뜻하는 바의 주관이나 확실한 신앙도 없이 그저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며 왔다갔다하는 것이 꼭 갈대가 움직이는 것과 같더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광야로 간다니까 그리로 갔다가, 오늘은 또 예수님을 따라서 여기에 있고,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고 보니 모르겠다며 돌아서는 이러한 군중들의 모습이 마치 물거품과도 같고 갈대의 흔들거림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그의 영향력과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끊이지 않았고 그에게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겠다는 자들이 곳곳에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3 : 5-6).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저가 곧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갖게 되므로 나는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오히려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는 자기 확인을 시켜야 되기도 하였습니다(3 : 15-17, 1 : 19-23). 그러나 그럴 때의 세례 요한의 기분은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우쭐했으면 하였지 결코 나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감옥에 갇힌 몸이 되고 보니 이제는 그 누구도 방문 한번 와주는 자가 없을 정도로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심이 깡그리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세례 요한이 지금 낙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네가 무엇을 하려고 나갔더냐? 진정 네가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면 사람들이야 오든 안 오든, 너의 인기가 있든 없든,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냐? 사람들이 따라주던 한때에는 위대한 선지자 같이 느껴졌고, 감옥에 갇힌 채 고생이 계속 되는 지금에는 마음이 변하더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군중! 그 흔들리는 갈대! 그것을 보러 나갔더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본래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지 흔들리며 왔다갔다하는 군중들을 보러 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지적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단계의 해석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들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세례 요한은 비록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나 잡아먹으면서 흉한 모습으로 지내기는 하였으나 그 영적인 권위는 놀라운 것이어서 메시야로 착각이 되어질 정도였건만 이제 감옥에 갇힌 후에 보니 초라하기가 그지없단 말입니다. 그 정도에서 이렇게 되었다면 무슨 능력이 좀 나타나서 옥문이라도 열려지고 해야겠는데 속수무책으로 세월만 가고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계속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자처하고 다녀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회의와 의구심 속에 있기에 그 흔들리는 마음을 읽으시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아 너희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 단계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다른 대상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세례 요한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훌륭한 선지자로 인정하시어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며, 또한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바로 그 세례 요한이라고까지 하셨고 보면, 세례 요한의 마음이 지금 흔들린다고 하여 그를 지적해서 하신 말씀 같지는 않다고 하는 견해를 펼치기도 합니다만 그러한 입장과 이 문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온 선지자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지자의 마음도 흔들릴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왔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직접 보는 바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불의를 지적한 탓으로 이렇게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하게 되고 보니 이제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당시의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끝내는 자기의 아내로 취해 버리고 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아도 그런 면에서는 실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집안임을 세상이 다 아는 처지였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왕인 헤롯의 처사가 너무도 잘못 되었음을 보고는 직접 왕을 책망하며 그 옳지 못함을 직언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처지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간만 흐르다 보니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왜 의인이 이런 고생을 하여야 하는가? 더구나 메시아가 오기 전이라면 앞서간 많은 선지자들이 고난을 당했듯이 나 또한 당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분명 메시아가 왔으니 그렇다면 옥문이 열려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메시아는 말이 없는 것인가? 하는 등의 갖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세례 요한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전달되기를 바라시는 회답의 말씀으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리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이 말씀을 전해 들은 세례 요한은 무슨 생각을 하였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저 "아멘"하고서는 그렇다면 메시야는 오셨구나! 하고 말았을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옥문까지도 열어 주셔야지 하는 생각을 한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궁금하단 말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든, 문둥이를 깨끗게 하시든 간에 그것은 그쪽 이야기이지 나와는 관계가 없지 않느냐 말입니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입니다. 만일 옥문이 열려지지 않은 채 이대로 있다가 여기에서 불의를 책망한 죄로 목베임을 당하여 죽게 된다면 과연 하나님을 계신 것인가, 안 계신 것인가 말입니다. 문둥병자 몇 사람이 깨끗해지고, 소경이 보게 되며,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고 땅에 떨어지는 판국인데 무엇보다도 의이니 고난받고 있는 옥문이 열려야 할 것이 아니냔 말입니다. 이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그 이유를 이렇게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합해 보면 대략 셋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세례 요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마음이 완전히 잘못 되었거나 흔들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내어 아직도 메시야가 활동하고 계신가를 알아봄으로 지금까지 확신해 온 바 자기의 믿음과 신학 등을 재확인하고 싶은 뜻에서 이렇게 제자들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인내의 한계가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 다 그렇듯이 잠깐 겪는 고난은 그래도 쉬운데 고난이 오래 계속 되다 보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몸에 병이 났을 때도 보면 병이 난 처음에는 아무리 큰 병이 발견되었을지라도 곧 낫겠지요 하고 위로를 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몇 개월이 지나고, 1, 2년이 되고 보면 그 때에는 위로할 말도 없고 환자 또한 어떠한 말에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쯤 되면 대체로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길어지는 고통과 고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것도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순간에 생명을 빼앗아 간다면 간단할 수도 있겠으나 두고 두고 사람을 괴롭힐 때, 그 고통을 감당하기란 죽음보다 힘든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잘 참아오다가도 끝내는 순교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마태복음 37-12절의 내용에서 밝혔듯이 임박한 심판을 묘사하여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고 한 것이 비추어 이제 메시야가 오셨으니 당장에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갇혀 있는 이 옥문이 열려지면서 "요한아 오랫동안 고생했구나"하는 이런 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만 계속 흐를 뿐 그것이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세례 요한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는 그의 인간성의 문제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인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이런 문제들은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이제 와서 새삼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이미 그러한 것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당하는 고난을 중심으로 메시야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메시야인 예수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 간에 내 중심, 내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보고 성경을 보아서는 결코 알 길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성경은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기도는 기도대로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야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이 내 문제를 먼저 붙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풀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나약합니까? 이사야 263절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마음의 뜻이 굳은 사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처음부터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고 가는 길이기에 내가 당하는 고난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오직 그분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으로 족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고난!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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