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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와 독수리(마태복음 24 : 23 - 28)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말씀은 그 문백상으로 보아 성전 안에서의 설교를 끝내신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오르시어 저 아래의 예루살렘을 한눈에 내려다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을 앞에 놓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상을 놓고 연구해 보면 대체적으로 보아 하신 말씀 중⅔가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⅓이 그 외의 다른 사람이나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집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놓고 가르치시며, 그들을 참된 제자가 되게 하는데 모든 힘과 시간을 다 기울이셨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 결과 이 제자들에 의하여 복음의 큰 역사를 이루고 교회가 세워짐으로 오늘의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을 제하고 나면 성전 밖에서 하신 말씀으로는 마지막이 되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시는 바 이 말씀의 의도는 말세에 되어질 일들을 미리 알려 주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시험과 환난을 당하더라도 결코 실족치 않게 하시려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여정을 두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에 얼마나 많은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제 예수님의 바로 눈앞에는 겟세마네 동산의 장면이 전개될 것이고 십자가가 있으며 그리고 부활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면 예수님의 승천이 있고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는 온 세계에 환난이,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까지를 내다보시면서 당장에 져야할 십자가를 앞에 둔 매우 긴장된 상황에서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언덕인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저 아래를 내려다 바라보며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참으로 먼 거리에 있었으니 여기에 또한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장면을 24장 1-2절 말씀을 통하여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 성전이 어떻습니까?" "이 얼마나 굉장한 건물입니까?"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 의도는 "예수님! 이만 하면 예수님께서 왕으로 되실 만한 곳이 될 수 없겠습니까?"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계속하여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야 나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날 자기들은 우의정, 좌의정이 되어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나라를 다스리며 영광스럽게 한번 지내고 싶은 그 꿈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러한 생각들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까지 계속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서 사도행전 1장 6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라며 부활하신 이후에까지 끈질기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세속적인 욕망과 정치적인 영광,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둥 이 세상적인 욕망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후에 전개될 엄청난 사건을 말씀하시고, 큰 환난과 역사의 저 마지막에 있어질 놀라운 사건들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과연 이 제자들이 몇 마디나 알아들었을까 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말이란 하는 자와 듣는 자의 생각이 같을 때에만 그 의미의 전달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제자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터이고 보면, 그 말을 듣는다고 하여 몇 마디나 알아 들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란 말입니다.
아뭏든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저들이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말세에 나타날 모든 사건들을 예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제자들이 세 가지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상으로 보아 이 질문들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미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첫째 질문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옵니까?"하는 것으로 때를 물어 보는 질문입니다. 요즈음도 보면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 것인가 하여 그 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학교에 가서는 시험은 언제 봅니까 하고 심심하면 물어보는 학생과도 같습니다. 본래 시험 보는 날자에 대해서 신경 많이 쓰는 학생은 실력이 시원찮은 학생입니다. 그저 평소에 꾸준히 공부하면 그것으로서 준비가 되는 것을 굳이 언제 시험을 볼 것인가 하고 그 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공부는 제대로 못하는 학생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예수님의 재림 날자에 대하여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가 이것 때문에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크게 잘못되는 것을 무수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그 때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마십시다. 우리는 그저 주님 오실 날이 가까 왔다는 사실만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몇날 몇시인가 하고 어떤 결정적인 날자를 알아보려고 하는 그러한 관심은 벌써 그 관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질문은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하는 징조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이 세상이 끝나기 직전에 어떠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는 것으로 "그 때"를 묻는 의도나 거의 비슷한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해산할 여인에게는 앞서 진통이 오는 것처럼 "미리 무엇 좀 보여 주는 것이 없겠습니까?" 혹은 "어떤 징표가 있겠습니까?"하는 말로서 이를 나쁘게 생각하면 심리적인 배경으로 말해 그 징조를 볼 때부터 회개하겠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대로 그럭저럭 살다가 그 때에 가서 정신차려 보겠다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 때'나 '징조'에 대하여 굳이 알겠다고 관심을 쏟는 신앙은 아 무때나 꾸준히 믿음을 지켜나가는 진실된 자세와는 달리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신앙자세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세상 끝과 주의 임하심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 말의 의미상의 연결은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 그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또한 "세상 끝"과 예수님의 재림과의 그 관제를 묻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24장 전장에 걸쳐 기록되고 있습니다마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 후반부에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면 먼저 24장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는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가 할 때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몇 가지의 회답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역사에는 목표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보기에는 어둡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계획이나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흐름에는 반드시 방향이 있고 뚜렷한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는 사관(史觀)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는 사관입니다. 즉 말하자면 원을 그리면서 계속 도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러노라면 결국 얼마 후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도 그러해서 문명이 발생했다가도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도 발생하며, 뿐만 아니라 대중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행이라는 것도 가만히 보면 돌고 도는 것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남자의 넥타이를 두고 보아도 그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가 하면 여자들의 치마 길이도 길어졌다 짧아졌다하며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개인적 생명에다 적용을 한다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명도 돌고 도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유행이 그러하듯이 가만히 서 있으면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인데 그러나 한번 난 사람이면 별수 없이 죽었지 언제 무엇으로 돌아온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회춘'이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어디에 다시 과거의 청춘이, 그 젊음이 돌아오더냐는 말입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두번째는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관(史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역사관은 어디까지나 직선적입니다. 창조가 있고 끝이 있으며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두번째로 생각할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의 장에서 마지막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십자가의 고난도 있고 핍박도 있으며, 온갖 어려움이 다 있지만 결국은 그리스도가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며 진리가 이기고교회가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요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만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절대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가 어떻고 현재가 어떻든 간에 역사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승리를 믿기에 오늘을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변할 수 없는 신앙이었으며 특별히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마지막 승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가 영원히 승리하실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끝에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다! 이처럼 저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오메가 포인트로, 역사 끝의 승리자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 말씀으로는 재난이 극심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재난에는 먼저 일반적인 재난이 있습니다. 이 재난은 기근이나 전쟁, 지진과 같은 재난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심각한 재난은 도덕적인 재난으로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으며, 사람을 잡아죽이는 곳에 넘겨 주는가 하면 배신을 하는 등의 타락된 행위가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재난이 심하여 가중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되며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혼란과 종교적인 타락을 가져오는 비참한 일들이 생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하시면서 그 결론을 어디에다 두고 있느냐 하면 24장 14절 말씀인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는 이 말씀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이 온다는 것은 재난이 심하여 오는 것도 아니요 전쟁이 있고 원자탄이 터지는 등의 이 세상 사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끝이 오는 기준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관에 있어서의 마지막 설명은 역사의 중심과 그 목표는 복음 전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이 역사가 존재하는 것도 다름 아닌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재난이나 전쟁 등, 이 모두가 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있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문명을 얼마나 많이 돕는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특별히 이 복음 전파라고 하는 역사는 하나 같이 재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한 설명이라면 그 증거를 들면서 설명을 하더라도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되기까지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설명할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 한 가지 뺄 수 없는 것은 바로 6 ․ 25를 겪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현실이 뒤집히는 동안 젊은이들의 세계관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마음문이 활짝 열려지게 된 거기에서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6․25가 없는 평탄한 역사를 살아왔다는 가정 하에 선교사들 이 복음을 들고 들어온 것이라면 제가 연구한 바로는 지금과 같은 복음 전파의 역사는 이루어지지가 않습니다. 전쟁이라는 크나큰 소용돌이에는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으며, 엄청난 희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역사는 그러한 역경이 없이는 이루어지지가 않습니다. 지금 중국에도 약1억의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저들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 6천만명이고 보면 비밀리에 있는 교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전문가들의 견해에서 나온 수치입니다. 이는 실로 굉장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있는 것은 만일 공산주의가 아닌 평안한 상태에서라면 수 만명의 선교사들이 들어가 전도를 했다손치더라도 결코 6천만명을 확보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말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싶습니다. 큰 환난과 핍박!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 뺄 수 없는 일이며,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개인을 놓고 보더라도 무사태평, 만사형통한 가운데서 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의 징조들, 곧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으며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십니다.
필경 끝이 오기는 오겠는데 그 근거는 복음 전파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그 끝이 지연되는 것도 복음 전파를 위함에 있고, 끝이 나는 것도 복음 전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는 결론으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누가 와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며 무슨 소리를 하여도 절대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세 가지의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하시기를 "먼저는 여기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다시 말하면 내가 보았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겠지만 그러더라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기한 기적을 나타내고 병을 고치며 놀라운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를 곧 그리스도라고 믿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때 박태선씨의 부흥회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 거기에 가는 어떤 집사님 한 분을 붙들고는 "왜 그리로 가십니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그 분의 말씀인 즉 "가 보니까 성경에는 맞지 않아요"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저가 다시 "그러면 맞지 않는소리를 하는데 왜 가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신기해서 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신기해서!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기하고 안하고가 무슨 문제란 말입니다. 설령 죽은 사람을 살린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저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오직 성서적으로만 이해하고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다음 또 한 가지는 광야에나 골방에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재미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지금 그리스도가 광야 아니면 산 혹은 골방에 있다는 말이 되는데 옛날에는 수도사다 뭐다 하여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상한 차림으로 산이나 들에서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면서 때대로 이상한 말을 하게도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요즈음도 흔한 것이어서 특별히 우리 나라 산에도 가보면 그런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산으로 찾아가 그런 사람을 만나 보는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3년 전에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사람의 이야기 내용을 듣다보니 바로 자기가 3년전 산에 들어온 날짜를 말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길래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럼 당신이 아니요?"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의 대답인 즉 "남들이 그렇다고해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내가 당신하고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데 어떻게 당신이 메시야요?"라고 하였더니 이번에는 "어떻게 또 내가 아니요?"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소?"하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인 즉"성경 어디에 그렇지 않은 말이 있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3년 동안 산에 가서 성경만 읽고 있다가 이렇게 돌아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보는 대로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네가 메시야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또한 많아서 제가 갔을 때에도 한 4백여명이 모여서는 주여 주여 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미리 말하노니 산에 있든 광야에 있든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상한 소리하는 그들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즈음은 골방에서 유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여기에 현혹되는 것을 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흔히 무슨 말을 하느냐하면 "족집게"같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알아맞힌다는 것인데 그 재미에 거기에 가서 결혼 허락한다는 예언기도를 받고 결혼했다가 뒤에 이혼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믿고 사업하겠다며 남의 돈 끌어넣었다가 크게 망신만 당하고는 이십년이 지나도록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은 결코 점치는 영이 아닙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광야에서든 골방에서든 계시를 받았느니 신통하다느니 하며 말들을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특수한 공간도, 특수한 시간도, 특수한 인물도 믿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내가 예수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혹시 무엇인가 하고 구경하러 다니다가 그 길로 잘못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은 믿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번개가 번쩍임 같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비유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로 이 이상의 적합한 비유가 없을 것입니다.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하는 것 같이 인자가 오는 것도 그렇게 올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로 우주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끝에 가서 공개적으로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골방으로 오실 것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먼 산 속에 올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번개야말로 한번 번쩍하면 누구나 다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번개라는 말을 들을 때이면 언제나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닌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던 자리입니다. 달걀 만한 원자탄이 떨어질 때 번쩍한 것이 40만의 생명을 일순간에 빼앗아 가고 그 자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인간들이 만든 작은 원자탄 한 개가 번쩍이는 데에도 이렇게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오심이야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베들레헴으로 오시는 예수님도 아니오, 계룡산이나 삼각산에 오시는 예수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번개와 같이! 우주적으로 충만하게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점진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어서 순간적으로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실 그리스도는 이제 나셔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자라서 성인이 되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끝에 심판 주로 오시기 때문에 온 인류가 순간적으로 동시에 뵈올 수 있게 번개가 번쩍임 같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지구가 둥근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게 되면 우리는 못 보겠다는 걱정을 하는 것을 봅니다마는 요즈음은 사람들의 재주도 놀라와서 위성중계만 하게 되면 지구 어느 구석에서 벌어지는 일이든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면을 대할 수 있는 처지에 주님의 재림을 놓고 무슨 지구가 둥글고 우주가 넓다며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번개가 번쩍임 같이'라는 말은 상징적 표현인 하나의 비유입니다마는 재림은 실제입니다. 이 실제 임할 재림은 신 불신간에 모든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음 또 하나 이 말의 뜻은 위엄 있게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거나 그저 그렇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번쩍하면서 우르릉 쾅 할 때와도 같이 놀라우신 위엄과 권세로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번개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오시겠다는 의미를 갖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주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오신 예수를 전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각각으로 따로 가르치고 전도하고 하지만 다음에 오시는 예수님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으며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에게 소식을 듣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 눈으로 못 보았으면 안 오신 것이요, 뿐만 아니라 누가 와서 보았다면 전해줘야 할 정도로 그렇게 시시하게 오실 예수님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번개와 같이! 역사의 끝에! 시간의 끝에! 위엄 있고 장엄하게 나타날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와서 그리스도가 광야에 왔다, 혹은 골방에 있다고 해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대충은 다 그건 줄 압니다마는 특별히 왜 그렇게 한국에 예수가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계룡산 가서 만난 사람만 하여도 열 사람이 넘는데 저마다 다 자기가 예수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자기는 죽은 다음에 살아날 것이라는 말을 해오다 죽게 되자 주위의 추종자들이 장례식은 하지 않고 시체를 앞에 놓은 채 살아날 것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썩을 때까지 다 썩어 냄새나는 장례식을 치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마는 그러나 그것을 믿고 기다렸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절대로 동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다시 오는 것은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 이건 간에 동시에 다 알 수 있게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간혹 어떤 이는 "나는 워낙 예수를 잘 못 믿어서 나 모르게 오시려나 보다"하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보고 다같이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의주로 오신다는 점의 차이일 뿐 오시는 자체를 알거나 모른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 주시는 말씀을 보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육식 조류로서 특별히 썩은 것을 먹고사는 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고 썩은 시체가 있게 되면 반드시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을 두고는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가 로마인들의 깃발에 새겨진 독수리와 연관시킨 해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인들에 의해 다시 침략을 당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일 것이라 생각하여 유대 사람들의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마는 그렇게 되면 독수리가 먼저 와서 시체가 된 것이니 말의 순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일단 '시체가 많아지겠다'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여 "독수리가 모일지니라"고 하셨으니 이는 장례를 치루어 줄 사람도 없겠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에 대한 이해는 간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독수리가 모임으로 시체가 생기게 된 것이 아니고 시체가 있음으로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냐 할 때 그것은 시체가 너무 많기 때문인 것이니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가 되면 전쟁을 비롯한 온갖 재난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게 되겠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도 큰 재난이기 때문에 죽은 몸뚱이 하나도 묻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독수리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많다하더라도 빨리 장례를 치른다면 독수리가 뜯어먹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재난의 시기에는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돕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체 하나를 묻어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을 영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영적인 죽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심판의 독수리가 모여든다'는 것인데 이 심판의 독수리는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시기까지 전체 문맥 속에 흐르고 있는 재림 신앙을 가진 자에게 경고하시는 윤리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먼저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는 하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계속 미움이 있어서, 미움을 당하니 또 미워하고, 억울하니 복수하며, 배신을 당했으니 원수가 되는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지만 너희는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사랑이 식어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사랑에 있고 예수의 제자라는 표식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절대로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하라! 설령 우리가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저를 사랑해야 하고 배신을 당하더라도 내가 배신을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비록 내가 다 빼앗겼어도 나는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세가 가까워 올수록,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 올수록, 아니 그 보다는 나의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사랑을 더욱 뜨겁게 불러 일으켜야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또한 그날이 문 앞에 이르렀다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 밖에 더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이 식어져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뜨거운 사랑으로 달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는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인 믿음! 그리하여 진실로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는 깨끗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순간 순간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현상은 초대교회나 중세 수도원적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들은 '주님이 곧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하는 뜻에서 서로 인사를 나눌 때마다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소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교인들 사이에 희망과 용기의 표어로 삼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잘 살고 명예롭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주님을 만날 바로 그 순간만을 생각하며 재림 주를 영접하는 깨끗한 신앙을 갖추도록 늘 새롭게 노력해 나가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 또 하나는 13절에 기록된 말씀과도 같이 끝까지 견디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견디고, 믿음으로 견디며, 소망으로 견디어야합니다. 이제는 견디는 길 뿐 변절하거나 변덕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초지일관하여 나의 사랑, 나의 믿음, 나의 소망에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분명한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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