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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빌립보서 1장 19절~2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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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빌립보서 11925)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지난 77, 저는 미국 뉴욕의 전 교회가 연합해서 모이는 '할렐루야 대성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회기간 중인 토요일 날 오전에 교역자들만을 위한 목회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120명쯤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20년쯤 전에 인천에서 저를 도와 6년 동안 부목사로 수고해주신 이목사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저한테 특별히 할말이 있다고 해서 둘이 따로 성전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목회 경험도 있고, 신학교 학장을 지낸 일도 있으며, 미국에서도 공부를 많이 한 분입니다. 앞으로 한국에 나와 일하고 싶다면서 장래의 계획을 토로하기에,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울 것이니 이력서 두 장을 가져오라고 일렀습니다. 저녁 집회 때에 가지고 나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입니까? 그 길로 차를 몰고 돌아가던 이목사님은 사택을 눈앞에 둔 거리에서 트럭과 충돌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그분의 이력서 대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으며, 그 사모님의 간곡한 청으로 장례식 때에 제가 장례 설교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다지도 허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 얼굴을 대한 지 30분여 뒤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것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치안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교통사고가 무려 255787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세상을 떠난 사람은 12603명이요, 부상을 입은 사람은 325896명이라고 합니다. 하루 평균 35명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상에 50억이라는 인구가 사는데, 한 해에 대략 1억이 세상을 떠납니다. 시간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매초당 3명씩 숨을 거두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갑니다. 지진, 전쟁, 질병 등의 재난을 통해서, 그리고 교통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를 통해서도 떠납니다. 이제, 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분명히 불행과 통합니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은 죽음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불행은 사람이 죽는다는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을 특별한 일인 것처럼, 가장 당연한 일을 부당한 일인 것처럼, 가장 현실적인 일을 추상적인 일인 것처럼, 언제나 나의 일인데도 남의 일인 것처럼,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또 장례식에 참여하면서도 나만은 안 죽을 것처럼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타당한 것을 타당하게 받아들이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맹랑한 성정(性情) 때문에 인간은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사람은 죽는다' - 이것만큼 확실한 것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공리(公理)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중에 있는, 나는 죽지 않는다 라는 신념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 당연히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도 나는 죽지 않는다, 죽고 싶지 않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죽고 나도 죽는다, 언젠가는 죽는다 - 이것을 확실한 사실로, 예비된 마음으로 친근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생각을 유출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문제요 현실적 문제라는 것을 긍정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민족은 대체로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는 편입니다. 다른 나라 풍습과 비교해볼 때, 멋지게 죽는 사람들이 드문 것 같습니다. 좀 여유 만만하게, 좀 유머러스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생전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퍽이나 각박하게 임종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외국의 이야기입니다. 숨을 거두고 있는 남편 곁에서 그 아내가 흐느끼며 탄식합니다. "당신 죽으면 난 어떡해요, 어떡하란 말예요?" 그러니까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울 것 없소. 당신도 곧 죽을 건데 뭘." 이만한 여유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경우는 대체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죽는 사람도 답답하고 옆에서 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장례식에 가보아도 답답합니다. 죽음에 임하는 태도가 왜 그리도 각박한지 모르겠습니다. 멋지게 죽고 멋지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까? 교양이고 지식이고 인격이고, 생전에는 운위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 것은 죽는 데서 보아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참으로 귀한 대비(對備)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 전체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가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내가 가서 자리를 예비하리라'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영원히 함께 있게 하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므로 순교자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을 죽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그토록 밝고 명쾌하게 말씀해주는데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태평하게 있다가 일 당하고 나서 당황합니다. 어떤 때에는 원통해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까지 부정하고 은혜를 배반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현실적으로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되면 그 다음에는 딴소리하지 않겠다' - 그 나이가 몇 살입니까? 몇 살까지 살다 죽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어떤 형편에서, 어떤 의미를 띠고 죽으면 되겠습니까? 어느 나이 많은 권사님은 가족들과 식사를 할 때면 '이 음식 먹고 건강해서 일 잘하게 해주세요'와 같은 기도가 아니라 '따뜻한 봄날에 죽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한답니다. 손주들이 낯을 찡그리고 할머니한테 투덜거립니다. "입맛 떨어지게 할머니는 왜 자꾸 그런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할머니는 웃으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 너희들도 다 잘되고 편안한데 내 무슨 소원이 따로 있겠느냐? 다만 내가 죽을 때에 날씨라도 추우면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겠니? 그래서 따뜻한 봄날에 가게 해주십사 하는 거지." 이 권사님, 정말 따뜻한 봄날에, 그것도 부활절 아침에 세상 떠나시더랍니다. 소원 성취하신 것이지요.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나에게는 이런 죽음을 주소서' '이런 모양으로 가게 해주소서'라고 말입니다. 들어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우리의 간절한 소원으로 죽음을 예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신앙적이고 소망에 넘치는 죽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의 인생관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마는 법이 무질서하니, 당장 사형을 당할 것인지 석방이 될 것인지, 아니면 무기징역을 살게 될는지 노예로 팔려가게 될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미확정인 상태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고민을 하며 시간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분에서 중대한 말씀을 합니다.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사는 것만이 문제라고, 꼭 살아야만 한다고,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이런 인생은 물적인 차원의 인생입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살아서 유익하다면 살고, 죽어서 유익하다면 죽고 -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생사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께 돌려야 할 영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선교를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선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지 사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귀한 간증을 오늘의 본문에서 듣고 있습니다. 12절 이하에 보면, 자신은 지금 감옥에 투옥되어서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다 적대자의 핍박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선교의 기회가 되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내 생명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됩니까?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얼마를 더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마다 그저 오래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별 가치도 없는 생을 그저 오래 살기만 바랍니다.

결코 인간답지 못합니다. 성도답지 못합니다. 누가 세상을 좀 일찍 떠나면 흔히들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깝다. 아직도 젊었는데, 할 일이 태산같은데."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서른 세 살에 세상을 떠나시면 서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여러분, 이제 서른 세 살이 넘었거든 불평하지 맙시다. 덤으로 사는 것이니까요. 예수님보다 더 오래 살면서 무슨 군소리가 있을 수 있습니까?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옆에서 울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넌지시 묻습니다. "왜들 그렇게 슬퍼하느냐?"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섭섭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너는 그럼 내가 얼마를 더 살았으면 좋겠느냐?" "지금까지 사신 것만큼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욕심이다." 프란체스코가 다른 제자보고 또 물어봅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살았으면 좋겠느냐?" "일년만 더 사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자 "너는?" 하고 또 다른 제자에게도 묻습니다. "하루만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마지막으로 수제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네가 얼마나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느냐?" "한 시간만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한 시간에 뭘 하려고?" "선생님과 함께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한번 더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만났다면 얼마를 더 요구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무엇에 쓸것입니까? 내 생이 더 연장될 때에 연장된 그 시간은 나에게도 유익하고 남에게도 유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연장된 그 시간이 오히려 욕이 되어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도 하고 더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살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부득불 더 살아야 할 줄로 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 가서 지내는 것이 소원이다. 이 괴로운 세상을 떠나서 주님 앞으로 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성경에 보면 죽기를 하나님 앞에 요청한 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세 사람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요나를 들 수 있습니다. 민수기 1115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줄곧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들볶아대니 모세는 답답하던 나머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열왕기상 194절에 보면 아합 왕의 핍박에 쫓겨 지치고 피곤해진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더는 살고 싶지 않으니 죽여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심술 많은 요나 선지도 일이 자기 뜻대로 안되고, 망할 줄 알았던 니느웨 성이 구원받는 것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불만이 가득찬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불평조로 아뢰는 기도입니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태도가 못됩니다. 그러나 세 사람 다 어떻게 불평조로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소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행복한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과 함께 있을 그 영화로운 하늘나라의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저것이 소원입니다, 어차피 갈 것이지만 어서 가기를 원합니다 -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 : 18)"라고 자신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에서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 지으신 장막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의연하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 : 14)."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편지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면서, 소망적이고 행복한 생명에 대하여 벅찬 마음으로 그리워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그 공포는 죽음 자체 때문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과정 때문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실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사후의 문제가 걱정되어서 생기는 공포입니다. 하나님 앞에 갈 것인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지. 내 생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 그 불투명성(不透明性), 불분명성(不分明性) 때문이요 동시에 불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간증이 항상 우리 속에서 새롭게 확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에 일하지만 죽어서도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는 것만 능사라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살고 봐야지. 살아 있어야 뭐가 되지!"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생사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살아서 역사 하는 것보다 죽어서 역사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살아서 역사하고 스데반은 죽어서 역사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스데반은 분명히 죽었으나 그 죽음이 사도 바울을 중생시켰습니다. 스데반의 아름다운 순교에 감동받은 사도 바울은 평생토록 복음을 전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우리는 살아서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 어느 오지에 식인종들이 살았습니다. 그곳에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이 들어가 수고를 합니다. 병도 고쳐주고 학교도 세워주면서 성공적으로 전도를 합니다. 식인종들도 감동을 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 잡아먹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들도 그것만은 말리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권면하고 사정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고민을 하던 선교사가 하루는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식인종들을 모아놓고 그는 말합니다. "오늘 저녁에 저쪽 산기슭으로 가보시오. 빨간 망토를 입고 오는 사람이 있을 거요. 그 사람 잡아먹으면 굉장히 맛있을 거요." 그날 저녁, 식인종들은 선교사가 시키는 대로 해서 과연 빨간 망토 입은 인간을 잡아다가 죽이고는 막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뿔싸, 들여다보니 그 죽은 사람은 바로 자기들이 사랑하는 선교사 그분이 아닙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식인종들, 그 후로는 사람 잡아먹는 풍습을 없애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로는 아무리 해도 듣지 않다가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 그때에야 새사람이 되는, 이런 일은 우리네 주위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어머니의 속을 썩이던 불효자식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야 새사람이 된다든가 하는 일은 우리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못된 짓 많이 해서 평생을 두고 온 가족에게 근심을 끼쳐오다가 마침내 벌을 받아 사형을 당하게 된 사람이 처형당하는 순간, 가족들과 참관인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꼭 예수를 믿어라!" 옥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그가 죽음의 순간에 이토록 간절하게 부탁을 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그후 예수를 잘 믿어서 지금은 모자가 권사요 집사입니다. 살아생전에는 그토록 못된 남편이요 불량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죽어서는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살아서만 역사 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반드시 내가 살아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성공해야, 내가 건강해야 모든 일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병들어서 일하고, 실패하여 큰일 이루고, 죽어서 위대한 역사를 남긴 이들이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0)"라고.

신학자 본회퍼는 히틀러의 박해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순교 직전에 그는 말합니다. "나는 감옥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형장으로 가면서 간수에게 말합니다. "이로써 끝이다. 그리고 생명의 시작이다." 성도의 아름다운 종말이 이 경지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이 옆에서 우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나는 죽어서 없어지고 너희는 살아남는구나. 그러나 우리의 누구가 더 나은 길을 가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행복한 것인지 산 사람이 행복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에 관한 한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믿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일찍 가든 늦게 가든, 어떤 모습으로 가든 주께서 은혜로 내 죽음의 시각을 정해주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유익할지 죽어서 유익이 될지, 그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부(可否)를 운위할 것이 아닙니다. 할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요?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할 일이 남았는지 끝났는지도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살아서 역사할 일이 많은지 죽어서 역사할 일이 많은지, 그것도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습니다. 오로지 담대하고, 부끄럽지 아니하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살고 죽을 일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 - 이 고백으로 오늘을 승리하며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 것이요, 죽음을 더 아름다운 생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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