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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잘 되면 마을이 기뻐한다 -잠11:1-11

by 【고동엽】 2022. 7. 7.
의인이 잘 되면 마을이 기뻐한다
잠11:1-11
(2015/9/6)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따른다.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 바른길로 가지만, 사기꾼은 속임수를 쓰다가 제 꾀에 빠져 멸망한다. 재물은 진노의 날에 쓸모가 없지만, 의리는 죽을 사람도 건져낸다. 흠 없는 사람은 그의 옳은 행실로 그가 사는 길을 곧게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신의 악 때문에 쓰러진다. 정직한 사람의 옳은 행실은 그를 구원하지만, 반역하는 사람은 제 욕심에 걸려 넘어진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들의 희망도 함께 끊어지고, 불의에 걸었던 기대도 물거품이 된다. 의인은 재난에 빠져도 구원을 받지만, 악인은 오히려 재난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 이웃을 망하게 하지만, 의인은 지식으로 구원을 얻는다. 의인이 잘 되면 마을이 기뻐하고, 악인이 망하면 마을이 환호한다.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

• 야수의 시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번 주간에는 신문에서 본 사진 한 장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 채 보냈습니다.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의 주검은 어떠한 명분에서 수행되든 폭력과 전쟁은 악이라는 사실을 온 인류 앞에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내전을 피해 캐나다로 가고 싶었던 아일란은 다섯 살배기 형 굴립(Gulip)과 엄마 레함(Reham)과 더불어 불귀의 나라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붉은색 티셔츠에 감청색 반바지를 입고 앙증맞은 운동화를 신은 아일란은 마치 엎드려 잠이 든 듯 보였습니다. 짧은 세상 여행길에 아일란은 너무 큰 고통만 맛보다가 떠났습니다. 지금 세상 도처에서 아일란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요? 거듭거듭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존재인 동시에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책임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죽어야만 했나요?"라는 아일란의 무언의 질문에 우리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삶인지를 가르칩니다. 각 절은 서로 상반되는 두 부류의 행동 혹은 사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속이는 저울'과 '정확한 저울추',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 '성실한 사람'과 '사기꾼', '재물'과 '의리', '정직한 사람'과 '반역하는 사람', '악인'과 '의인'이 그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이렇게 칼로 무를 자르듯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선과 악,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의 지혜자는 이런 분명한 구분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의 길을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 누가 악인인가?
맨 처음에 '속이는 저울'과 '정확한 저울추'가 나온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정의의 실현은 지혜자들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이라고 말합니다. 공의를 무시하거나 무너뜨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1절에서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 이 대목은 '혐오하신다'는 좀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속이는 저울'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토대를 허무는 '여우'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속이는 이들은 당분간은 이익을 얻어 기뻐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혐오를 사 망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3절은 그 부연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 바른길로 가지만, 사기꾼은 속임수를 쓰다가 제 꾀에 빠져 멸망한다"(3).

본문은 다양한 표현으로 변주되고 있기는 하지만 간추리자면 결국 '의인'과 '악인'의 대조라 하겠습니다. 악인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존재를 뜻하는 말이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은 자기 속에 갇힌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갇힌 사람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타자들의 고통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곤 합니다. 자아의 감옥에 갇힌 이들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 이익의 확보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4절은 "재물은 진노의 날에 쓸모가 없지만, 의리는 죽을 사람도 건져낸다"고 말합니다. '의리'는 '쩨다카'를 번역한 것인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공의'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나눔을 통한 사회정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돕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야말로 참 삶의 길입니다. 하지만 자기 속에 갇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악 때문에 쓰러지고(5), 순리를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은 제 욕심에 걸려 넘어지게 마련입니다(6). 악인은 자기가 한사코 피하려고 하는 재난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무도한 사람 혹은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말은 자기 위에 더 큰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죄를 짓는 일을 꺼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육체가 되고 맙니다. 하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 시대를 이런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6:5-6).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면서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빌3:19)한다고 말합니다.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자기 욕망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합니다. 자기 이익 확보를 위해 다른 이를 속이는 일을 꺼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멸망의 날을 위해 예비된 제물일 뿐입니다.

• 절망의 사슬을 끊고
그에 비해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가 빚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누군가의 사랑의 수고 덕분임을 자각할 때 삶은 돌연 환한 빛에 둘러싸이게 마련입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난 시간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했기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곁에는 냉기와 음습한 기운이 감돕니다.

하지만 의인은 언제나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살기에 주위에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잘 되고 복을 누리고, 그것을 공동체가 함께 기뻐하고 경축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의인이 잘 되면 마을이 기뻐하고, 악인이 망하면 마을이 환호한다.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10-11)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시편 기자가 탄식했듯이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시12:8)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전체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작은 마을들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도 그런 마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자를 사랑하고 공의를 실천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교회라는 마을은 든든히 설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이들이 절망의 사슬을 끊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일어나 생명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다시는 아일란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평화와 생명 세상을 일구기 위해 땀을 흘리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닦고 계십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둘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 절망의 땅에 희망의 빛을 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9월 06일 11시 25분 4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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