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어 서라
엡6:10-20
(2015/8/30)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십시오. 나는 사슬에 매여 있으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신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하여 주십시오.]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그리고 어제로 사건 발생 500일을 맞은 세월호 유가족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느긋하고 한적한 평화를 원하는 우리의 바람을 비웃듯 현실은 늘 우리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키곤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다가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1:10). 하나님의 때가 언제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날은 정녕 오고야 말 것입니다. 주님을 머리로 하여 온 세상을 통일시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 당신을 희생하신 주님의 마음이야말로 평화 세상을 여는 열쇠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평화 세상, 통일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이들과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전사(warrior)로 이해했습니다. 물리적인 싸움을 벌이는 전사가 아니라 영적인 전장에 서있는 사람 말입니다. 불안을 운명으로 타고난 인간은 뭔가 자기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줄 것을 찾곤 합니다. 그것이 비록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습니다. 정호승의 시 <지푸라기>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그래서 바람을 따라 떠도는 지푸라기가 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라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살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초기 기독교는 밀의 종교와 점성술적인 신앙에 빠진 이들에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영적 세력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점을 보러 다니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도 방심하면 애써 유지하고 있던 균형을 잃어버린 채 그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10) '굳세게 되라'는 어구는 수동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굳세게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와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악에 맞서려면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악마의 간계奸計에 맞서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슥4:6)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이 맞서 싸우는 대상을 아주 명확하게 적시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12)
여기서 말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세속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두운 영적 세력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악마를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하여 표현한 것은 그 세력의 교묘함과 집요함 그리고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여 기독교인들은 세속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대한 의도적인 곡해입니다. 세상에는 악마의 하수인들이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운 유혹에 이끌려 악마의 부림을 받는 이들 말입니다. 악마는 교묘하고 집요하다고 말했지요? 악마는 우리가 기대고 있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도 암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 망각하고 욕망에 충실히 복무하며 살아가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 음습한 영들은 우리 속에서 사랑의 능력을 고갈시킵니다. 이웃을 향한 따스한 시선을 교란시키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핑계거리를 제공해줍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진영 논리로 사람들을 갈라놓아 항구적인 갈등 속에서 살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투닥거리고 싸울 때 어둠 저편에서 악마는 야비한 웃음을 띤 채 우리를 바라봅니다. 악마는 끊임없이 우리 속에 적대감을 심고 있습니다. 지금도 거리를 걷고 있는 이들은 언제라도 화를 낼 준비를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말도 거칠어졌고, 행동도 거칠어졌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 속에서 악마의 간계를 꿰뚫어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런 악마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갑옷은 어떻게 해야 입을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상호 공속 혹은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나', '욕망을 중심으로 맴도는 나'를 자꾸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을 지배하려 하거나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과도한 욕망'이야말로 악마가 우리 속에 숨어드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꽃이 지기 싫다고 줄창 피어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강물이 자기를 잃기 싫어 멈칫거린다면 바다에 이를 수 없습니다. 버려야 더 큰 세계가 열립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고전13:11)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예수님이 긍정적으로 그려낸 어린아이와는 좀 다릅니다. 영어로는 좀 구분이 됩니다. 'childlike'와 'childish'가 그것입니다. 둘 다 'child'가 들어가 있지만 전자는 순진하고 솔직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후자는 유치하고 나약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바울은 자기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을 일러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미성숙한 상태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미성숙함이야말로 악마가 깃들기 쉬운 장소입니다.
• 하나님의 전신갑주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굳이 군사적 용어를 써야 했나 싶기도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성도들이 치열한 영적인 전투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기에 이런 용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여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짓없이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허리는 몸의 중심입니다. 중심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8: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급적이면 다른 이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며 살아야 하지만, 자기 삶의 중심 원리까지 포기하면 안 됩니다.
둘째,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야 합니다. 이것은 삿된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공평하고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詩 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시 삼백은 삼백 다섯 편에 이르는 시경을 이르는 말인데, 공자는 시경 전체의 메시지를 사특한 생각을 품지 말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특한 생각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는 마음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공익을 훼손하지 않아야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평화의 신을 신는 것입니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르셨습니다. 평화는 밥을 나눠 먹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독점하려는 마음이 언제나 불화를 빚어냅니다. 또한 평화는 '너'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껴줄 때 우리 사이에 깃드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런 평화가 창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 여행에 내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마10:12)고 이르셨습니다. 평화는 구원받은 이들이 온몸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입니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나는 실패하거나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지금 우리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이것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줍니다. 이 믿음은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냅니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도 작은 우리가 그렇게도 크신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신비입니다. 구원받음의 감격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속절없이 끌려가던 옛 삶을 청산할 수 있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내게 됩니다.
여섯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놓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 생의 곤고한 때에 성령께서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시119:105)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 기도의 연대
악한 이들과 맞서야 하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도 없고, 우리 내면에 돋아나는 절망감을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18). 두 구절이 도드라집니다. '늘 깨어서'와 '끝까지 참으면서'가 그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현실에 대해서 크게 눈을 떠야 합니다.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많은 이들의 신앙생활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요? 자기의 상처를 보듬어 안느라고, 교회 안에서 만나는 소위 '형제자매들'을 위로하느라고 저 교회 바깥에서 울고 있는 예수님의 벗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외로우십니다. 우리 시대의 갈릴리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응답도 응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렸고, 그 뜻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바울은 또한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의 사적인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파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십시오"(19). 그는 비록 지금 사슬에 매인 몸이지만 어떤 형편 속에서라도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부대를 방문하여 병사들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함께 동행한 군종병이 즐겨 부르던 찬양이 있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때마다 무뚝뚝하던 병사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곤 했습니다. 보이진 않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세상 도처에서 생명 세상,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기도의 연대입니다. 캄캄한 밤 하늘 저편에 또 다른 별이 빛나고 있음을 알듯이, 기도의 연대 속에 있는 이들은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악한 영들처럼 보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버텨낸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이 그들에 맞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힘찬 능력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악한 이들 앞에 버티고 서서 그들의 유혹과 위협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제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꽃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8월 30일 11시 12분 5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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