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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벨라 밭 굴 -창23:16-20

by 【고동엽】 2022. 7. 7.
막벨라 밭 굴
창23:16-20
(2015/8/23)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말을 따라서, 헷 사람이 듣는 데서, 에브론이 밝힌 밭값으로, 상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무게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서, 에브론에게 주었다. 그래서 마므레 근처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밭과 그 안에 있는 굴, 그리고 그 밭 경계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마을 법정에 있는 모든 헷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근처 곧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밭 굴에 안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헷 사람들은 그 밭과 거기에 있는 굴 묘지를 아브라함의 소유로 넘겨 주었다.]

• 사라의 죽음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휴전선 인접 지역 주민들은 물론이고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의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을 기획하는 이들, 전쟁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이 오늘 따라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시120:6-7). 이 위기의 시대에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남북의 당국자들이 평화를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과 장례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사라는 백 스물일곱 해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이삭이 대략 서른일곱 살 되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걸어온 사라의 일생은 결코 평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착민으로 살지 못하고 늘 떠돌며 살았습니다. 사라의 죽음 이야기가 이삭의 희생 이야기 직후에 등장한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사라는 쏙 빠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그 문제를 두고 상의를 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니스에 있는 '국립 마크 샤갈 성서박물관'에서 보았던 <이삭의 희생>(Le sacrifice d'Isaac, 230*235cm)이라는 그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샤갈은 붉은색 옷을 입은 아브라함의 주위도 온통 붉은 색으로 채색함으로써 그 상황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른손에 칼을 든 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가 황급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작 더미 위에 누워있는 이삭의 모습은 평온해 보입니다. 샤갈은 이삭을 노란색으로 칠함으로써 영적으로 승화된 상태임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화면의 왼편 나무 아래에는 어린 숫양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양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서 우리는 슬픔에 잠긴 사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들어올린 채 절규하고 있습니다. 펼쳐진 손가락이 사라가 느끼는 고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샤갈은 그림의 상단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를 그려넣었습니다. 울고 있는 예루살렘 여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샤갈은 사라와 마리아를 고통을 매개로 하여 만나게 합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세상 도처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는 그 일 이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앞의 사건이 준 충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힘겨운 나그네 세월은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끝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생각하면서 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자식의 복과 땅의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아왔는데, 자식은 얻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정착하여 살 수 있는 땅은 허락받지 못한 상태에서 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슬픔이 곡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라의 매장지를 마련하는 일 말입니다.

• 막벨라 굴을 구입하다
아브라함은 헷 사람에게로 가서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들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창23:4)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와 '떠돌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 혹은 떠돌이의 지위는 상당히 불안정했습니다. 공동체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폭력에 노출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를 가나안으로 이끄시면서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출23:9)

'나그네의 서러움'이라는 구절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아주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땅을 좀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말은 정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헷 족속의 반응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어른께서는 우리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른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이십니다. 우리의 묘지에서 가장 좋은 곳을 골라서 고인을 모시기 바랍니다. 어른께서 고인의 묘지로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서 그것이 자기의 묘 자리라고 해서 거절할 사람은 없습니다."(23:6)

아브라함은 '어른'과 '지도자'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역시 아브라함은 복을 받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아직 고대 근동의 관습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화폐라는 매개 수단을 이용해서 물건을 구매하기에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연루될 이유가 없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늘 대면하는 이들이 아니면 서로 한 마디 말도 안 나눕니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돈과 상품을 그냥 교환하는 것을 매우 모욕적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거래행위는 정중한 격식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한 부탁에 헷 족속들은 더 큰 겸손으로 응대합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일어나서, 그 땅 사람들에게 큰 절을 한 후에 에브론 소유의 '막벨라 굴'을 살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면서 값은 넉넉하게 쳐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 틈에 있던 에브론이 나와 말합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밭을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있는 굴도 드리겠습니다. 나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제가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다가 돌아가신 부인을 안장하시기 바랍니다."(23:11)

그냥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의례적인 행동입니다. 씨족 사회의 교환 양식은 '증여'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장면에는 그런 형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듭해서 꼭 밭값을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에브론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땅 값을 친다면, 은 사백 세겔은 됩니다. 그러나 어른과 저 사이에 무슨 거래를 하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그냥 돌아가신 부인을 안장하시기 바랍니다."(23:15)

아브라함은 에브론이 밝힌 밭 값 곧 은 사백 세겔을 달아주었습니다. 정중한 대화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거래를 평가하자면 에브론은 횡재를 한 것이고 아브라함은 바가지를 쓴 것입니다. 마침내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과 그 안에 있는 굴, 그리고 그 밭 경계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법적으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막벨라 굴에 안장하였습니다.

• 희망의 단초
어떻게 보면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구입하여 아내를 안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헤브론에 머물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후손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이어서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15: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과 땅의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탄생하기까지는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땅을 차지하는 것은 부지하세월이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은 언제나 완성품으로 주어지기보다는 가능성으로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복을 뜻하는 단어 '바라크'(barak)는 '산출력', '번식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의지하는 미숙한 존재로 살아가기보다는 성숙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 가운데는 자식들이 공부 이외의 다른 일에 시간을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대신해주기도 합니다. 초·중·고등학생만이 아니라 대학생들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헬리콥터 부모, 잔디깎기 부모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헬리콥터 부모란 자식들의 주변을 맴돌며 감시 감독하는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잔디깎기 부모란 자식 앞에 나타나는 장애물을 미리 제거해주려 하는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그만인가요? 모든 걸 부모에 의지해 버릇한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주체적인 인격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사람은 조금씩 성숙해지게 마련입니다. 시행착오를 겪는 아픔을 미리 제거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알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식을 망가뜨리는 일이 아닐까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주어질 유산의 몫을 미리 챙겨 집을 떠날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어떻게 살지 몰랐을까요? 자기가 땀 흘려 벌지 않은 거액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가 건실한 삶을 살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 본 신문 기사가 떠오릅니다.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자 외도를 의심한 아내가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마침 남편의 차를 발견하고는 격분한 상태에서 자기 차로 남편 차를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아내의 차는 벤틀리였고 남편의 차는 페라리였답니다. 각각 차 가격은 3억원과 3억 6천만원이라 하더군요. 아내는 28살이었고 남편은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차 수리비가 무려 3억 3천만원에 이른답니다. 그저 헛웃음이 나왔습니다만 이 사건은 인격적 성숙함보다 돈을 중시하는 우리 시대의 한 풍속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비유에 등장하는 그 아버지처럼 우리의 방황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를 허용하셨습니다. 자유가 없이는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한 법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자 모험입니다. 그 결과는 대개 불행으로 귀착될 때가 많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회수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제공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그의 소유로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우두커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그는 막벨라 굴과 밭을 구입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이 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라의 무덤은 하나님의 약속 실현의 작은 단초가 되었습니다.

• 신앙은 연금술
가끔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싶어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비애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생명과 평화의 새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일을 주저주저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은 선생의 소설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벵골만을 지나는 선원들은 물이 떨어지면 한 장소를 찾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곳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담수를 솟구쳐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이 정말 있을까요? 사실 여부를 떠나 이것은 아름다운 꿈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늘 그곳에 있어 사람들이 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북극성처럼, 세상에는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켜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막벨라 굴과 밭은 헷 족속의 땅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 땅을 주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표지였습니다.

이사야는 이집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면서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사19:19)이라고 말합니다. 억압과 유혹의 땅 한가운데 세워지는 제단 하나,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는 만군의 주님께서 그곳에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다는 징표이자 증거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방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리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5-27)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다 한 가운데서 솟아나오는 담수가 아닐까요? 바로 이런 삶이 억압의 땅에 세워진 제단 하나가 아닐까요? 믿는 이들은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어둠이 깊을 때 별빛은 더욱 찬란한 법입니다.

막벨라 굴은 사라의 무덤이었지만 이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도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 무덤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표지였습니다. 성서 기자는 죽음의 쓰라림을 상기시키는 장소를 희망의 단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존재의 연금술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세인들의 눈에는 절망처럼 보이는 일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구현될 수 있는 단초를 만들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8월 23일 11시 22분 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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