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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이여딤 -전6:11-16

by 【고동엽】 2022. 7. 7.
하나님의 사람이여
딤전6:11-16
(2015/9/27, 청년주일)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자기 정체성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가위 명절 날 드리는 우리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열납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의 때로부터 상당히 멀리 떠나오기는 했지만 '청년' 하면 떠오르는 찬송은 574장입니다. "가슴마다 파도친다 우리들의 젊은이"로 시작되는 곡 말입니다. 작사자인 반병섭 님은 청년의 기상을 가슴 벅찬 언어로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하늘같이 높푸르자', '바다같이 넓고 깊자', '화산같이 타오르자', '폭포같이 줄기차자', '대지같이 광활하자', '산과 같이 우람하자'. 이런 자연의 이미지가 '푸른 꿈, 사랑, 붉은 피, 기상' 등의 단어와 만나면서 느낌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 곡을 부를 때마다 정신적으로 왜소해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가슴을 펴곤 했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 곡을 어떤 마음으로 부를까요? 괜스레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말이 참 많습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나오더니, 요즘은 삼포세대와 오포세대를 지나 엔(n)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취직, 연애, 결혼, 출산, 집 장만 등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까지 내몰린 자기들의 아픈 처지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은 현실의 암담함을 일깨워주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서는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 규정 속에 갇혀버립니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창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자기를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인생의 질과 내용을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은 첫 대목이 매우 강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호소의 뜻을 나타내는 독립적 조사 '이여'를 사용한 번역이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기서 호명되고 있는 이는 바울 사도가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라 일컬었던(딤전1:2) 디모데이지만, 꼭 이 말을 그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가 걸으셨던 길을 자기 길로 삼아 살아가려는 사람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런 이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사람이여'라는 표현을 선택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청년 디모데가 명심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피할 것, 좇을 것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악한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악한 것들은 막연한 도덕적 죄 혹은 악행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앞서 상술한 내용을 가리킵니다. 좁혀서 이야기 하자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6:9-10)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맨 처음 피해야 할 것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이 말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회중의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부자 되세요', '대박나세요'라는 말이 덕담처럼 통용되는 시대에 부자될 생각을 버리라니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사도의 이런 가르침을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철 없는 이야기로 돌려버려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 깃들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배타적입니다. 내 배가 부르기까지는 다른 이의 배고픈 사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어쩌면 타자의 필요에 응답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짧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몹시 배가 고픈 체하면서 거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조금만 나눠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노숙자 한 사람은 자기가 먹던 피자를 나눠주었습니다. 누가 더 인간적인 걸까요? 아주 남루한 행색의 노숙자 한 사람이 배고픈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돈이나 이익을 따르는 순간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本을 버리고 末을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련한 인생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자기를 망치고 또 타인도 망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11)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좇으십시오'라는 단어는 '피하십시오'의 대구입니다. 악한 것들을 피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자기 삶을 새로운 가치로 채워가야 합니다. 의는 바름의 실천, 경건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믿음은 주님에 대한 가없는 신뢰, 사랑은 자기 증여의 삶, 인내는 곤경 속에서 생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든든함, 온유는 그리스도가 그러했듯이 만나는 모든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가치를 내면화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쿠바와 미국에 가서 한 말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큰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쿠바의 아바나 광장에서 거행된 미사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형제자매의 존엄성을 향상시키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라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항상 개인의 바람과 욕망, 권력 추구 의지 등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가장 취약한 이웃을 돌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9월 22일, 9면). 지금의 위기는 사회전체가 본과 말을 뒤집어놓은 데 있습니다. 본은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고, 말은 풍요로움의 추구입니다. 하지만 이게 뒤집혔습니다. 나의 풍요로움을 위해 너를 희생시키는 체제는 악마의 도구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연한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게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까닭은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그렇게 명료하게 '본'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면서의 싸움
신앙생활은 한편으로는 모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싸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은 몽상가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돈과 명예와 권세를 가진 이들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힌 채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상에 맞서 조금만 틈을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과 연민의 바람이 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의식 속에 가두어놓은 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성전체제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과 맞서 싸웠고, 율법학자들의 권위주의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을 신화화하는 일체의 시도에 맞서서 그 우상의 민낯을 드러내려고 애썼습니다.

싸우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을 악마화하거나 제거해야 할 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싸워야 합니다. 미움이나 적의가 아니라 사랑이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선한'이라는 형용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사랑하면서의 싸움'(liebender Kampf)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곤 합니다. 이것은 자기와 상대방을 상호 발전시키고 밝히기 위한 싸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싸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시간의 무한한 연장延長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르는 말입니다. 시간 속에서 바장이는 우리는 늘 하늘과 땅 사이, 선과 악, 따뜻함과 차가움,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위태로운 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기에 우리는 순간순간 더 나은 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최근에 시인 이성복 선생이 쓴 시론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과 만났습니다. 그는 안나푸르나 등반에 나섰다가 조난당한 젊은 대원의 일기 한 대목을 인용했습니다. 그 대원이 조난 당하기 바로 전날 저녁 칼바람이 부는 텐트 안에서 적은 글이었습니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머어마한 남벽南壁 아래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이성복, <극지의 시>, 문학과지성사, 2015년 9월 9일, p.35ff)

상상이 되십니까? 압도적인 얼음산 아래에서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한 젊은이가 글을 적습니다. 그는 두려워합니다. '없는 길'을 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 길이 자기 몸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국 조난 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글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은 극지를 찾는 이들을 보면서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묻기도 합니다. 무용한 일에 왜 목숨을 거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진부해질까요? 그들이야말로 인간이란 미지의 것을 향해 몸을 던질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파수꾼들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돈이 좀 적어도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지향하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 존재의 목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한가' 하는 류의 달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삶을 엄정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13) 부탁이나 권고가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스승은 이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14)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는 이중적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도 열심해 해야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뜻도 모르고 사는 인생처럼 불쌍한 게 또 있을까요?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 지향적 삶과 존재 지향적 삶을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는데도 자기 삶의 무의미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지향해야 할 생의 목표를 아주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그런 자기 닦음의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말씀을 꼭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15)시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듯한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이 다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열거되고 있는 여러 표현들은 따지고 보면 하나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빛으로 분광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모시고 살라는 말일 겁니다. 그분을 다 안다고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말고, 늘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다보면 어느 결에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의기소침해진 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고, 왜 그리 유약하냐고 꾸짖는 것도 맥빠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젊은이들은 조금 당당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연봉이 적어도, 비정규직으로 지내더라도, 취직 포기자로 살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보고 루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공의 사다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미숙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다리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귀히 여길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하신 분을 믿는 이들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생은 아름답습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물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그러한 싸움을 복되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9월 27일 12시 16분 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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