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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모심 -눅11:24-26

by 【고동엽】 2022. 7. 7.

하나님을 모심
눅11:24-26
(2015/10/11)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면, 그 귀신은 쉴 곳을 찾느라고 물 없는 곳을 헤맨다. 그러나 그 귀신은 찾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겠다' 한다. 그런데 와서 보니, 집은 말끔히 치워져 있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귀신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딴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 낙인 찍기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나뭇잎이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색채의 향연을 보는 즐거움이 참 큽니다. '무르익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과실이나 곡식 따위가 익을대로 푹 익다" 혹은 "[시기나 일 따위가] 적당한 시기에 도달하다"라는 뜻입니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기능이든 학문이든, 자기 분야에서 오랫동안 기량을 연마하여 일정에 한 단계에 이른 이들을 보면 참 편해 보입니다. 노래를 진짜 잘하는 분들은 높은 소리를 내면서도 듣는 이들로 하여금 높다는 느낌이 안 들도록 부르는 것이라더군요.

사람에게도 '무르익음'이 있습니다. 그를 대하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고, 깊어지고, 맑아지는 이들이야말로 무르익은 사람일 겁니다. 여러분, 지금 잘 무르익고 계십니까? 세월이 가도 여전히 자기 때를 알지 못한 채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이철수 화백은 땅콩을 수확한 경험을 판화로 옮기면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땅콩을 거두었다. 덜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 떨어진 놈!" (이철수,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삼인, 2006년 12월 12일, p.203). 처음에는 재미로 웃어넘겼지만 생각할수록 내 이야기 같아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떠났던 귀신이 다시 돌아와 나중 상황이 처음 상황보다 더 나빠진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비유입니다만 참 의미심장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이 비유를 귀신 축출을 둘러싼 논쟁의 맥락 속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님은 벙어리 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된 것을 보고 무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가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눅11:15)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예수께 요구했습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던 사람이 회복된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예수라는 낯선 존재를 부정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무리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유대교 세계에서 지도자연하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 낯선 것은 자기들이 기대고 있는 기존 세계를 뒤흔들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그들에서 낯선 것은 늘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배제하려 합니다.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낸 사람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낙인 찍으려 합니다. 일단 낙인이 찍히면 그 사람은 언제나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고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도 다 불온시됩니다. 특정인을 배제하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정적들에게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붉은 낙인을 찍는 정치인들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기존 체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위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를 배제하기 위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는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부정하려 합니다. 예수는 편협한 그들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이미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눈을 감은 이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해가 이미 떠올랐는데도 한사코 눈을 뜨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11:20) 그러나 그들은 청맹과니입니다. 볼 마음이 없기에 그들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직 자기 이익에만 복무합니다. 참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처지를 이렇게 빗대 말합니다.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눅11:21-22)

• 물 없는 땅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힘써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 속에 머물던 악한 귀신(unclean spirit)이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쫓겨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나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조금 더 나은 거처를 구했던 것일까요? 귀신은 쉴 곳을 찾느라고 물 없는 곳을 헤맵니다. 귀신이 머무는 곳은 아마도 '물 없는 곳'인 모양입니다. 물 없는 곳은 생명이 살 수 없는 곳, 인간이 꺼리는 곳, 불모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느껴지지 않는 곳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왕성한 곳은 귀신의 거처로 적절치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7절은 배교자들을 일러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사58:11)

참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지금 우리 삶이 이러한지요? 우리 속에 사랑의 샘물이 끊이지 않고 솟구친다면, 기쁨과 감사의 물줄기가 줄기차게 흐른다면 악한 귀신은 우리에게 범접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늘 속이 바짝바짝 타오르는 것 같아 안달복달합니다. 지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에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내면의 물기가 점점 사라지면서 이웃들을 품어 안을 여백 또한 줄어듭니다. 마음이 가시처럼 날카로와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불화를 빚어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불행한 인생입니다.

저는 가끔 13세기 아랍의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봄의 정원으로 오라>를 떠올립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그리고 만일 당신이 오신다면/이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정원에는 꽃이 만발인데, 그래서 삶을 함께 경축할 준비는 갖춰졌는데, 님이 오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봄의 정원'으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물기 없는 존재가 되어 악한 귀신의 영토로 변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 모심
주님은 말끔하게 비워졌지만 주인을 모시지 않은 집에 귀신이 더 악한 벗들을 데리고 들어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보인 우정어린 태도가 다소 낯설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 속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사상가는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 그 다음날'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지요? 그는 대부분의 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합니다.(노벨평화상은 튀니지 민주화를 위한 4자 그룹에게. 아랍의 봄 실패.) 혁명이란 현실의 체제를 뒤집는 것인데, 뒤집은 다음에도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 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 그 다음 날이 중요합니다. 혁명의 열기가 식어진 후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욕구, 나의 안전과 풍요로운 삶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삶을 계속하는 한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악한 귀신이 나간 후에 말끔히 정리된 집에 새로운 주인을 모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더 악한 것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 쉽습니다.

우리 삶에 자꾸만 하나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모시다'라는 단어에는 '존귀한 대상을 어느 곳에 자리잡게 하여 받들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님이 오신다>라는 시에서 님을 모시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은 시의 화자는 날 보러 오시는 님을 그저 어찌 맞겠느냐면서 "높은 것 낮추고/우므러진 것 돋우고/굽은 길을 곧게 하고/지저분한 것을 다 치워/님이 바로 오시도록 하자"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물을 뿌리자/묵고 묵고 앉고 앉고/이 먼지를 다 어찌하노?/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 그런데 이미 님이 오셨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저 허둥거리고 있는 데 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나도 같이 쓸어주마/나 위해 쓸자는 그 방/내가 쓸어 너를 주고/닦다가 달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이게 바로 은총이지요. 문제는 주님을 모시려는 마음의 열망과 절실함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귀히 보시고 더러워진 우리 마음을 닦아주시면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주님을 우리 속에 모시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뜻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게 됩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엉뚱한 것이 들어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일곱 귀신이라 말씀하십니다.

• 받아들여짐의 체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김귀옥 부장판사는 2010년 4월 초, 자신의 재판정에 선 한 여학생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피고인 A양(16세)은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A양은 2009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와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청소년 법정에 선 전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법대로 한다면 무거운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습니다.

김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 하고 말하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김 판사가 말했습니다. "자, 날 따라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습니다. "자, 내 말을 크게 따라 해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큰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가슴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A양은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초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급속하게 바뀌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까지 받아야 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범행에 빠져든 것입니다. 김판사는 방청석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습니까? 아이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학생을 격려하면서 김판사는 그를 법대 앞으로 불러 세우고는 손을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너'임을 잊지 말라고,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했습니다(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년 7월 16일, '긴 옮긴이 후기'에서 번역자가 인용한 부분을 요약, p.1328-9).

이런 따뜻한 마음의 판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A양이 새로운 존재로 회복되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앞길이 평탄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A양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슴 절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험이 또 있을까요?

어느 신학자는 구원을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받아들여짐을 체험한 사람,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김귀옥 판사를 통해 A양의 손을 잡아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손이 되어 상처입은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메마른 땅에 물을 대는 마음으로 사는 삶,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모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전령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절로 이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은총을 통해 그 세계를 미리 맛본 이들의 헌신을 통해 열립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 늘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10월 11일 11시 09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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