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랑으로 빌2:1-4 (2015/10/18, 전 교인 가을 여행)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 서로의 얼굴을 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계절은 한로에서 상강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여전히 떠들썩하고, 고요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꿈은 언제나 참담하게 무너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우울증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노래했습니다. '못난 놈들'이라는 말에 걸려 넘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시인이 '못난 놈들'이란 말 속에 담고 싶었던 뜻은 차마 제 좋을대로만 살 수 없어 늘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었을 겁니다. 제 잇속만 차리는 깍쟁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구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얼굴만 봐도'라는 구절입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를 사물이나 풍경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얼굴은 '얼'의 '골짜기'라지요?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얼굴에는 그 사람의 영혼의 풍경이 새겨져 있습니다.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잘 생겼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는 얼굴도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얼굴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얼굴> 중에서)얼굴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얼굴과 만날 설렘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한 교회 공동체 내에 머물고 있지만 만날 기회가 없어 낯설기만 했던 이들의 얼굴을 마주보며, 우리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3)라고 말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이 담긴 말이었을 겁니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던 첫 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음을 기쁘게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 깃든 확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1:6) '선한 일'은 물론 구원에 관련된 일입니다. 구원은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의 전환이고, 하나님의 마음과의 안팎없는 일치를 이루는 것과 관련됩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 안전한 삶의 자리를 벗어나는 이들입니다. 아직 우리는 온전히 '나'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끈질기게 머문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성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고,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번 두번 다른 이들과 충돌하다보면 서로를 꺼리게 되고, 심지어는 미워하는 마음이 깃들기도 합니다. • 알토의 존재감 빌립보 교회도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욕구, 자기가 중심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충돌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지곤 합니다. 조심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저는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을 때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소리에 매료되곤 합니다. 저음부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도드라지진 않지만 그 소리가 다른 소리들을 품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인 이건용 선생이 쓴 '알토들의 존재감'이라는 컬럼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합창에서 주선율을 맡으면서 음악을 리드하고, 그 음악의 표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소프라노입니다. 베이스는 저음이지만 음악의 틀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잘 들립니다. 테너는 물론 높은 소리이기 때문에 잘 들립니다. 그에 비해 알토는 선율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화성 진행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알토는 존재감이 좀 적습니다. 그런데 이건용 선생님에 의하면 알토는 전체 합창 소리를 풍부하게 만드는 협력자입니다. 소프라노 혹은 테너와 협력하여 화성을 완성시키기 때문입니다. 음악이든 공동체든 자기를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싶은 이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의 경쟁의식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저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2:2-3) 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성령 안에서 서로 깊이 사귀는 것, 누군가를 돕기 위해 협력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조금 직접적으로 지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2:3-4)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 원리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없어 교인들이 서로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와 무관한 이가 없는 곳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려는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 깊이 느끼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 속에 떼제 찬양 하나가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나됨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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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5년 10월 18일 10시 20분 47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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