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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 -시56:1-13

by 【고동엽】 2022. 7. 7.
내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
시56:1-13
(2015/11/1, 추수감사주일)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짓밟습니다. 온종일 나를 공격하며 억누릅니다. 나를 비난하는 원수들이 온종일 나를 짓밟고 거칠게 나를 공격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그들은 온종일 나의 말을 책잡습니다. 오로지 나를 해칠 생각에만 골몰합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숨어서 내 목숨을 노리더니, 이제는 나의 걸음걸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악하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뭇 민족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멸망시켜 주십시오. 나의 방황을 주님께서 헤아리시고,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가죽부대에 담아 두십시오. 이 사정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부르면, 원수들이 뒷걸음쳐 물러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는 주님의 말씀만을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 하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주님께 서원한 그대로,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가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닐 수 있게, 내 발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 뿌리를 돌아봄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돌이켜 보면 아슬아슬한 세월이었지만 우리는 지금 산 자의 땅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말씀에 값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때는 돌아감의 계절입니다. 기러기 떼는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대형을 이룬 채 먼 길을 떠나고 있고, 나뭇잎은 하나 둘 땅으로 떨어져 내립니다. 그 홀가분한 추락을 보고 어떤 이들은 삶의 비의를 배웁니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꾸 비우고 또 비워 뿌리에 이르라는 말입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은 삶의 근본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노자의 말이 아주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만물은 무성히 자라나지만(夫物芸芸)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간다(各復歸其根)
뿌리로 돌아감을 일러 고요함이라 하고(歸根曰靜)
그것을 일러 제 본성으로 돌아간 것이라 한다(是謂曰復命)"(노자 16장)

여름내 무성함을 자랑했던 나뭇잎도 결국 뿌리인 땅으로 돌아갑니다. 노자는 바로 그것이 고요함이라고 말합니다. 잘 돌아가는 이들은 고요하고, 돌아갈 생각이 없는 이들은 시끄럽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히12:1b)라고 권고합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세울 때와 허물 때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삶을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할 때 허망한 열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의 고향'을 동경하기에, 길손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추수감사절기는 바로 그런 삶의 근본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기의 성서적 버전은 초막절(수코트)입니다. 대 속죄일인 욤 키푸르가 지난 후 닷새째 되는 날부터 시작되는 절기인데, 밭에서 난 곡식을 다 거두고 난 다음 그동안 보살펴주시고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찬미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초막절은 단순한 추사감사절기가 아닙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애굽 땅에서 선조들을 해방의 길로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깁니다. 추수감사절기는 그렇기에 단순히 지난 한 해 동안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죽음의 길에서 구원하여 하늘 백성이 되도록 해주신 그 큰 뜻을 되새기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 삶은 고달프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화자는 아주 큰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짓밟고, 공격하고, 억누르고, 비난합니다. 사사건건 그가 하는 말의 꼬투리를 잡고 어떻게든 그를 해칠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숨어서 그의 목숨을 노리고,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지켜봅니다. 시인의 시간은 한 마디로 '두려움에 휩싸인 나날'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합심하여 그를 해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를 든든히 지탱해주던 땅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가없는 사랑으로 품어주던 하늘이 그를 짓누르는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편을 편집하고 이 자리에 배치한 서기관은 시에 이런 표제어를 붙였습니다. "지휘자를 따라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요? 성경의 아랫단에 있는 주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먼 느티나무 위의 비둘기 한 마리' 음조에 맞춰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그 음조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지만 뉘앙스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음악 기호를 이렇게 시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표제는 이어 이 시의 상황을 "블레셋 사람이 가드에서 다윗을 붙잡았을 때에 다윗이 지은 시"라고 말합니다. 표제는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야기 가운데 그 시의 상황에 어울릴 법한 일을 제시하는 것이로 보아야 합니다.

이 시의 경우는 다윗의 망명 시절을 떠올리며 찬양을 올리라고 하는 셈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을 구한 다윗은 일약 대중들 사이에 스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다윗의 위기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사울의 귀에 들려오자 사울은 질투심을 느껴 다윗을 제거하려 합니다. 위험을 감지한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 정치적 망명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이 결국에는 화근이 될 거라며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왕을 설득합니다.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미친 척 해야 했습니다. 그는 성문 문짝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습니다(삼상21:10-15). 다윗은 그렇게 해서 위기를 또 한번 벗어났습니다. '먼 느티나무 위의 비둘기 한 마리'라는 말처럼 다윗의 처지를 적절하게 설명할 말이 또 있을까요?

"나의 방황을 주님께서 헤아리시고,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가죽부대에 담아 두십시오"(8)

살다보면 우리도 이런 처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천애天涯(하늘 끝, 아득히 떨어진 타향)의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가파르고, 사방에 올무가 놓인 것 같은 상황 말입니다. 이럴 때는 할 수만 있다면 재처럼 스러졌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 깊은 절망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 주님을 의지함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방이 가로 막힐 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초월입니다. 전래 동화 '햇님과 달님'에서 호랑이에게 쫓긴 오누이는 뒤꼍에 있는 나무에 오르고, 나중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이야기는 호랑이처럼 포악하고 집요한 지주들과 관료들에게 쫓긴 이들이 의지할 곳이 하늘 밖에 없음을 우회적으로 들려줍니다. 현실이 암담할 때면 우리 시야 또한 좁아집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바라보면 어두운 밤하늘 저편에 찬란한 별빛이 아롱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거대하고 장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바라보면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시인은 세상 천지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문득 자기 삶을 든든하게 감싸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외로움이 가져다 준 복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3)

'오'라는 감탄사가 감동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 눈을 가려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몰려올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몰리고 몰린 자리, 벼랑 끝에서 시인은 저 아득한 심연을 넘어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렇기에 그는 두려움이 온통 휩싸는 날에도 오히려 주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생의 흔들리지 않는 터전입니다. 4절은 3절의 논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는 세상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시인은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4b, 11b)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9b)

이 도저(到底)한 확신이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사람을 건져내는 동아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따돌리고, 불온의 찌지를 붙이고, 모함하고, 박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세상이 안겨주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나의 안일한 행복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 말고, 아름다운 세상,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난을 받는 이들은 모두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들입니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이 시인처럼 당당해져야 합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찬미할 때 내적인 힘이 우리 속에 스며듭니다.

• 감사의 제사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서원한 그대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달라졌습니다. 이전의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입니다. 서양 속담에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고통 앞에서 자꾸 무너지는 것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삶의 이유 혹은 의미는 늘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보화들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때 나 또한 살아갈 이유가 생깁니다. 이웃 사랑의 길로 나가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보물과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비워내고 다른 이들로 나를 채우는 일입니다. 시련과 고난은 시인의 눈을 맑게 만들었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삶의 차원에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의 든든함을 하나님의 은총이라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가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닐 수 있게, 내 발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13)

절망의 심연을 건넌 후 시인이 하나님께 바치는 고백입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네 가지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건져 주심, 생명의 빛을 비추심, 하나님 앞에서 걷게 하심, 그리고 지켜주심이 그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비단 이 시인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이런 은총 속에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이 힘겹다 해도 주님의 빛이 어둡지 않다면 우리 삶 또한 어둡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빛이 꺼져도 주님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가끔 우리 내면의 빛이 가물거리고, 세상 현실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치 썩은 흙에서 돋아나는 식물들처럼 하나님의 빛은 어두운 현실을 뚫고 비쳐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는 소중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공유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여러 지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비록 지금은 '먼 느티나무 위의 비둘기 한 마리' 같이 처량한 처지에 있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다운 삶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에 감사의 제사를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 가운데 고은광순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며칠 전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면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그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 경험상 내공을 키우는 데 좋은 방법은 감사명상 축복명상입니다. 비가 오네? 감사합니다. 바람이 부네? 감사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안에도 아기 예수, 아기 부처가 있어요. 발끈하지 말고, 축복의 마음으로, 그 아기 예수, 아기 부처가 커지길 비는 마음으로 싸워야죠."(<이진순의 열림>, 한겨레신문, 2015년 10월 24일)

감사명상, 축복명상, 저는 여기에 미소명상까지 추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철저한 낙관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스스로 거칠어지거나 우울해지면 안 됩니다.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끈질긴 악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뚜벅뚜벅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를 계속하십시오. 지금까지 우리를 이끄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11월 01일 11시 21분 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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