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당시의 시대적 상황
로마의 지배로, 유대인과 로마인은 거의 상극의 관계였으며, 급속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험악한 분위기였다.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예수 태어날 즈음 헤롯이 사망하고, 로마의 관리체제하에 편입되어 유대교는 억압되고 있었다. 갈릴리의 상황은 다른지역에 비해 좀 나은 편이었다. 이곳은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이 다수는 아니었다. 헬레니즘적 도시들도 상당 수 존재했다. 그러나 갈릴리의 대도시 세포리 Sepphoris의 재건에 따라 세금이 늘어나고, 세금 징수를위한 팔레스틴 인구조사가 시도되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유다스가 바리새인 사독 Zaddok의 도움으로 젤롯당을 조직했고, 그러자 로마 장군 Varus가 유혈 진압을 자행한다. 이 때 수천 명의 젤롯당원들을 십자가형에 처한다.
갈릴리의 에세네파는 반란에 관심이 없었고, 바리새파도 직접 폭력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한편 사두개파는 갈릴리에서 영향력이 적었고,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세속에 물들어 종교적으로 애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바리새파들이 경건/불경건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발하고 있었는데, 예수의 양친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예수는 기원전 4년 내지 6년에 출생했는데, 그 연도는 정확하지 않다. 출생장소는 베들레헴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양친은 일반대중인 암 하아레츠 Am ha'aretz에 속하며 꽤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토라와 예언서에 익숙하여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시나고그 학교에 다닌 듯하며, 예수는 랍비, 바리새인의 극단적 보수주의와 완고함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가족은 대가족으로 형제자매는 적어도 6명이었다.
그는 약 30세때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은 절박성을 지닌 윤리를 강조했고, 개인과 사회의 정의 실현을 추구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 대한 비판으로 체포되어 처형되고 만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의 만남으로 예언자적 소명을 확인하고, 요단강 건너 광야로 가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숙고했다.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4명의 제자, 시몬,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얻었다. 그들과 함께 예수는 시몬의 집이 있는 가파르나움을 근거지로 삼아 갈릴리 주변의 번성한 도시들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나고그에서 전도했으나 군중들이 몰려들자 시장과 공터에서 설교했다. 가파르나움의 시나고그에서 첫 설교와 병 고침을 행했는데,치료의 기적은 예수 자신을 당황하게 함과 동시 이로 인해 명성을 얻게 했다.
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신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절박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자연과 일상생활로부터 예를 들어가며 종교의 근본문제를 쉬운 용어로 설명했고, 쉬운 비유와 직설적 화법으로 당대 사람들의 종교적 성찰을 새롭게 종합했다.
1) 신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
메시야적 왕국의 도래에 대한 기대는 당대에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독창성은 다윗왕국의 재건이라는 좁든 의미의 메시야 사상을 세계화한 것이다. 그는 한편 회개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했고, 메시야 왕국이 이미 도래했다고도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과 예수 자신의 관계를 미묘하게 만들기도 했다. 예수에게 신은 아침,저녁으로 기도 드리는 초월적 존재 이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즉 '아버지'라 부르는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예수가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2) 종교적 가르침
예수에게 신은 우주를 지배하는 지고의 도덕적 인격이며, 역사의 진행을 주도하는 역동적 힘이며 초월적 존재이고,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존재였다. 그 신은 기도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며,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아버지처럼 인간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장 좋아한 신의 이름은 '아버지'였다. 예수의 자연관은 자연이 궁극적 실체가 아니라 신이 그 배후에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육체와 인간적 충동에 대해서는 육체와 마음, 정신이 기능적으로 통합된 실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를 반대했던 것이다. 예수의 기본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신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의 뜻은 신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모든 민족, 국가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3) 윤리적 가르침
예수는 성실성과 자기헌신을 강조하면서, 법적, 율법적 의무 대신 도덕적 의무를 우선시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을 비난했던 것이다. 즉 도덕 행위의 외적 측면보다는 그 이면의 내적 동기, 정신, 태도를 더 강조했고, 개인 자신의 내적 통합과 타인의 내적 건강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도덕적 본성을 해치는 것은 무서운 죄악이 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랑에 대한 가르침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예수의 활동
예수의 인기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내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급진적 태도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바리새인들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예수가 전통을 무시하고 율법과 예언서를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해석한 점이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유창함과 설득력을 악한 영에게 씌웠다는 증거라고 소문을 퍼뜨렸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비난을 믿고 예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위험을 피해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고, 이사리아 필립보에서 고난과 죽음에 직면할 것을 예고한 후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와 제자들은 성전정화의 사건을 수행하며 몰려든 유대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유대교 지도층들은 예수를 비난하며, 예수의 설교내용을 중심으로 논쟁을 벌였다. 로마황제에게 인두세를 내는 것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문제삼은 반대자들의 비난이 일반인들의 지지를 얻고, 헤롯당원들도 여기에 가담했다. 결국 음모에 의해 게쎄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후 산헤드린에서 조사를 받고, 정치적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빌라도에게 끌려갔다. 빌라도는 예수를 헤롯 안티파스에게 넘기고, 헤롯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빌라도는 관습에 따라 죄수 한명을 사면해주면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으나
군중은 열성적 반로마 운동가 바라바를 사면하라고 주장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사도시대
예수의 부활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기록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바울에게 나타난 예수의 묘사는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 것이었고, 루가와 요한은 나중에 부활한 몸이 육체적인 몸이라고 주장했다.
성령의 강림
예수 부활 후 120명에 가까운 예수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사도들이 이 집단의 공식적 지도자였고, 곧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은 한 모임에서 성령체험을 한 후 몇 주 전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곳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설교는 큰 성공을 거두고 수백명의 개종자들이 가세했다. 사두개인들은 이를 알고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 후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그들은 석방 후 설교를 계속했다. 이들에 대한 심문과정에서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 Gamaliel은 광신적 메시야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 자멸하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자고 제안했다.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지 않은 이유는 사도들은 죽은 사람의 추종자들이어서 곧 자멸할 것이라는 기대와, 사도들이 사실상 유대교 율법 내에서 활동했다는 점 때문이다. 매일 예수추종자들은 유대 사원에 갔고, 모세의 율법을 수호했고, 개종한 이들에게 할례를 요구했으므로 유대교 종파의 하나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사도들과 추종자들은 공동생활과 설교에 전력하며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유롭게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독교 집단 내의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주로 그리이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이었다. 이런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일곱명의 집사를 선출했는데, 스데반은 그리이스어를 사용하는 급진적 인물이었다. 그는 결국 산헤드린에서 처형당하고 마는데, 이로써 유대인들에 의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 기독교 운동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대부분의 사도들은 유대교 전통도 중시(특히 할례)했다. 이들은 유대교화한 기독교인들 the Judaizers 이라고 불리웠다. 이들은 후에 에비온파 Ebionites, 나자렛교도 Nazarene로 불리우는 배타적 유대교적 기독교 집단을 형성했다. 베드로는 온건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바울 중심의 집단은 급진적 기독교 운동의 확산에 주력하며 유대교적 색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바울과 기독교의 유럽 전파
바울의 기독교는 유대교적 기독교 운동과 대조적이었다. 그는 예수의 영적 영향을 서술할 신학적 개념과 이방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할 개념들을 발전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종교체험 후 잠시 북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와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3년 뒤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바르나바와 마르코와 함께 전도여행을 수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령의 자유로움의 영적 사실에 입각하여 역동적 신앙을 개진했고, 외적인 율법적 요구보다 내적 기질의 변화와 사랑의 실현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유대교적 기독교인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14년 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설교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자신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전도를 승인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전개했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소유한 신적 존재였으나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와 육체를 입고, 죽음을 극복하고 신의 오른편으로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설을 주장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신비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통한 불멸의 확신, 현세의 죄로부터의 구원의 방편 제공 등으로 바울의 기독교를 환영했다. 바울에게는 신비주의와 윤리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었다. 그에게 예수를 따름은 예수와 하나되는 것이고, 예수처럼 살기였다.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기독교 형제들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체포된 후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고, 로마에 가서 상당 기간 구금되어 있다가 평화를 해친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초기의 기독교 (기원 후 50-150)
초기 기독교의 확산
초기 기독교의 성공원인은 로마 영토내 상업중심지 대부분에 시나고그나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의 복음이 성공을 거둘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수적 유대인들이 새로운 신앙을 거부하자 대도시의 상인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독교 집단이 형성되며 서쪽 지방과 이디오피아까지 확산되었다.
기독교의 박해
2세기 중엽까지 기독교는 로마 영토에서 두통거리로 등장했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은 신비와 비밀을 싫어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현세에 대해 초월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국가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로마에 대한 불충과 반란의 표시로 여겨졌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낮에는 고용인으로 노동했으므로 항상 새벽이나 밤에 은밀한 모임을 가져 외부인들에게는 그들의 종교의식을 오르기로 잘못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착자, 식인풍습을 가진 문제적 집단으로 여겨진 것이다. 더욱이 민속적 축제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배타적이라는 의혹까지 받아, 결국 박해가 시작한다. 기원후 64년 네로시대부터 공개적 처형이 시작되고, 그후 100여년 간 황제숭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을 처형한다.
의식과 조직의 발전
초기에는 시나고그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 기독교인과 관심있는 사람 모두 참석할 수 있는 의식(경전 낭송, 기도, 설교, 찬송)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인 만을 위한 아가페(또는 사랑) feast, 즉, 모든 사람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예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간단한 의식이 행해졌다. 이 의식은 감사의 뜻으로 행해졌으므로 그리스어로는 eucharist : the giving of thanks로 불리웠다. 하지만 공동체 성장에 따라 공동식사 불가능해지면서, 세례자들만이 참여하게 된다. 공동체 가입 절차는 체계적 학습과 시험 후 세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졌다. 교단의 성장에 따라 점차 조직이 체계화되었다. 2세기 전반에 한 명의 주교와 장로, 집사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 나타났고, 대신 설교와 강연을 담당하던 예언자와 전도여행자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교리의 형성 (150년까지)
가장 먼저 마르코 복음서가 65-70년 사이 안디옥에서 쓰여졌다. 여기에는 아직 선재설, 성육신 교리 관념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후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의 출생과 유아기의 초자연적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성육신 교리의 기반을 마련했다. 요한복음서에는 예수의 신성성이 가장 분명하게 묘사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를 묘사했는데, 이는 히브리적 의미의 메시야 이상의 존재로 예수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보다 10년 정도 먼저 쓰여진 바울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로고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요한과 비슷한 관념을 보여주었다.
호교론자들의 저술
고대철학에 정통한 호교론자들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비기독교인 저명인사들에게 변증하기 시작했다. Aristides, Melito, Minucius Felix, Martyr Justin 등이 대표적 호교론자들이었다. 순교자 저스틴은 스토아철학,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에 정통했고, 그는 다른 사상체계의 진리성도 인정했다. 이들은 기독교가 그리이스 전통 속에서 어떻게 종교적 호소력을 지니고, 헬라 철학과 융합할 수 있는지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들에 의해 기독교를 하나의 보편적 실체로 주장(Catholic)하는 흐름이 형성된다.
고대 가톨릭 교회(150-1054)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적, 내적 통일성에 주력했고, 그 형식은 교리의 체계화, 조직체 정비로 나타났다.
영지주의와 마르시온파 Marcionite의 도전
영지주의는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에 근거해 물질은 악하고 비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철학을 기독교화하기보다는 기독교를 그리이스와 동방사상의 종합으로 보았다. 신은 선재한 예수를 포함한 이언 aeons라는 영적 존재들의 호위를 받으며 높은 세계에서 살았고, 아래에는 땅의 창조자이며 이언의 타락한 아들이며 어둠속에 빛을 가져다 준 소피아 Sophia가 일을 하며 살았다고 주장했다. 영적 속물인 그가 바로 악한 물질의 세계를 만든 야웨이다. 야웨 자체가 결점이 있으므로 구약의 길 역시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뱀은 사악한 유혹자가 아니라 야웨의 잘못된 인도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존재라고 변호했고, 동정심이 많고 신성한 이언이었던 예수가 몸의 가면을 쓰고 땅에 내려왔다고(육체가 아님) 주장했다. 예수는 어떻게 육체를 벗어나 영적 존재의 불멸성을 얻게 되는지를 육체의 고행적 훈련과 지혜의 습득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신은 정의로우면서도 잔인하게 율법주의적이고 혹독한 신이며 물질계를 창조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열등한 존재라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구약을 연결시키는 모든 구절을 삭제하고, 새로운 경전을 제시했다.
교회의 반응 : 사도신경과 신약의 편찬
영지주의와, 마르시온파 등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회는 믿음의 체계와 경전의 편찬을 시도하기 되었다. Irenaeus는 185년 경 [이단에 대한 반박] 저술한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의 정통성은 사도성에 있다는 것, 사도적 복음서와 서간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교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지식은 없다는 것, 사도의 저술, 사도적 교회, 교회의 주교에 의해 정통 교리가 전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후 150년에서 175년 사이 로마 교회는 사도신경을 만들고, 사도적 전승 확립 위해 2세기 말경 경전을 편찬했다.
기독교의 국교화
기독교의 평화주의와 타계지향적 태도는 제국의 팽창을 저해하므로, 로마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박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0-180), Septimus Seversus, Caracalla, Maximimus 등이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기독교 운동을 저지했다. 3세기 중반 Decius 황제는 250년 로마의 모든 시민은 왕의 동상에 희생제물 바쳤다는 증명서를 소지할 것 요구하며 위반자를 처형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으나 배교자들이 생기기도 했다. 박해 후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배교자들의 재영입 반대하며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지막 박해는 303년 Diocletian 황제 치하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정치적 과두체제속에서 기독교에 우호적인 콘스탄틴이 313년 기독교 승인을 포고하고, 황제가 된 후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게 된다. 그의 의도는 통합된 기독교를 통해 로마의 통일을 달성하려는 것이었고, 결국 383년 로마의 국교가 된다.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신조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Arius는 로고스와 함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는 아들은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신과 동질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아리우스를 해임(321)하고 만다. 이로 인해 생겨난 교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콘스탄틴이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주로 동방교회에서 온 300여명의 주교들이 니케아에 모여 니케아 신조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로고스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 지닌다는 것, 그리스도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거나, 하느님과 아들이 다른 실재이며, 아들은 창조되었다는 사람들을 파문하기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신학자는 아타나시우스였다.
기독론 논쟁과 칼케돈 신조
교회 안에서 로고스와 인간예수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육화 개념에 대한 논쟁이었다. 서방 기독교인들은 1세기 이전 터툴리안의 하나의 개체 안에 신성과 인성이 질서있게 결합되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당혹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은 이 문제로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시리아 주교 아폴리나리스 Apolinaris는 완전한 신성을 갖춘 그리스도는 동시에 완전한 인간일 수 없다고 확신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했다. 안디옥 학파는 예수가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논박했는데, 이들의 대표자는 Nestorius로, 마리아는 신을 임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Cyril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육체, 이성적 영혼, 영을 지니고 있으나 성품을 지니지는 않으며, 로고스가 그의 성품이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런 주장은 예수의 인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인성과 신성은 오직 결합되어 있을 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431년 회의가 소집되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려 네스토리우스가 추방되지만, '강도회의'라는 오명을 가진 이 회의의 성격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451년 칼케돈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는 서방 기독교인들의 입장인,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다는 주장이 관철된다. 이에 대해 동방 기독교인들은 불만을 표시했고, 그후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따르는 이들은 "하나의 본성을 믿는 무리들"로 자처하며 단성론자 monophysites라고 불리웠다. 이들로부터 야콥의 교회 Jacobites가 생겨난다. 한편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와 중국에까지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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