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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기서 전하라(마태복음 28장 1절~10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실패를 했을 때에 그 실패를 실패로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뭅니다. 병들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멀쩡하게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진찰을 받고 "당신은 치명적인 병을 얻었습니다. 며칠 못가 죽을 것입니다"하는 의사의 선언을 들었을 때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나를 압니다. 내가 죄인임을 내가 압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사에 어려운 일이 허다합니다마는 저렇듯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사실 앞에 진솔하십니까? 얼마나 정직하십니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도 가슴이 열리지 않습니다. 가슴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데도 의지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느낌과 생활이 따로따로 놉니다. 이렇듯 병리적이고 건강치 못한 인간으로 허우적거리면서 그 많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건은 그대로 사건입니다. 사실 자체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사실로 인정할 때에야, 내가 솔직하게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그 진실은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불이 났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불이 났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불이 난 것입니다. 안 났다고 생각하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불이 안 난 것입니다. 타 죽어도 안 난 것이 됩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때에야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 다 합리적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헛된 욕망,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허황한 욕망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이해(理解), 나의 능력의 제한성을 얼마만큼 믿고 있습니까? 믿으면서부터 지식은 성립됩니다. 저 18세기, 영국이 도덕적으로 형편없이 타락했던 시절에 자식들이 부모를 향하여 "당신이 과연 내 아버지요?" "당신이 정말 내 어머닌가요?"라고, 맹랑한 질문을 서슴없이 했다고 합니다. 저 남자가 과연 내 아버지일까? 저 여자가 과연 내 어머니일까? 정말로 의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히 맹랑한 노릇이지요.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네 어머니다----이것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무슨 증거를 대야 믿는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알건 모르건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의 부모님 됨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아침 식사를 한 것, 음식을 의심치 않고 먹은 것입니다. 다 알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갈 만큼 지식이 갔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믿고 나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고, 생명이 그렇고 사망의 문제가 그렇고 참 진리가 그렇습니다. 믿음을 토대로 지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사실이란 엄격히 말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사건 그대로 있습니다. 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그만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일이 내가 믿지 않는다고 없어지겠습니까? 내가 믿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생기겠습니까? 나의 지식이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사건은 사건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있다고 한다 해서 있고 없다고 한다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그대로 침묵 속에 신비롭게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증명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예수 부활---- 이 사실은 학문적 토론 제목이 아닙니다. 여기 앉아서 그렇다 아니다, 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고 논리적으로 별소리 다할 성질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실생활에, 우리의 생명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비로운 능력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지식의 능력,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사건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있음으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定礎)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으로부터 믿음이 정초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이 부활사건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사건이 부활신앙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 부활'에 관한 말씀이 무려 사백한 번이나 반복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타나는 모든 사건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요, 초점과 중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맞추어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의 중심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신앙구조는 간단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선포된 믿음의 내용은 흔히 말하는 바 '케리그마(Kerygma)'입니다.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그것입니다. 이 사실만을 설명합니다. 이 사실을 뿌리로 하고 근거로 해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이 사건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능력을 얻음으로 얼마나 크게 역사 하였으며,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으며, 그 역사가 어떤 모습으로 위대하게 확산되어나갔는지, 이것을 초대교회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저러한 인상을 강렬하게 받는 것입니다. 생명을 죽음이 가둘 수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죽음보다 큽니다. 생명의 큰 역사 안에서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문제가 그대로 아침안개처럼 사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 역사의 중심부에 이 부활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첫 번째 사건입니다. 결코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설명한답시고 벌레의 윤회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해가 바뀌는 것을 보라는 둥, 씨앗이 썩어지고 싹이 나고, 겨울이 가고 봄이 되어 어쩌고 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들을 합니다. 부활은 예수 부활, 한 사건뿐입니다. 어떠한 비사(比辭)로도 어떠한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의 설(設)로 운위하는 'immortality(영혼불멸)'는 부활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부활만이 부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의 의미요 개념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신학자 샤르댕(Chardin, T.)이 과학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생명의 세계는 식물 세계의 생명이 있고 한걸음 나아가 동물 세계의 생명이 있으며, 더 나아가 좀더 차원 높은 누스 패어(nous phare) 세계의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복합체입니다. 우선 우리 인간에게 분명 식물적인 것이 있습니다. 손톱이 자라고 머리칼이 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잘 자라면 '농사가 잘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농사가 잘 안되어서' 이렇게 머리가 많이 빠지고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식물 세계의 생명이 시원찮은 것이지요. 그리고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 다른 동물에게 있는 것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식물적인 것, 동물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고 이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반사작용이 이성에 있고 도덕성에 있습니다.
'nous'는 철학에서 '이데아를 보는 영성, 감성이나 육체 중에 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불생 불멸의 원리'라고 풀이합니다.
영성(靈性)이 있는 존재----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은 이 차원을 넘습니다. 인간 수준을 초월하는, 말하자면 그리스도 패어, 그리스도적 생명 단계입니다. '부활'이라는 말도 쓰지만 성경에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적 변화'라고도 말씀합니다. 부활은 역사에 오직 한 번 있었던 사건입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한 번에서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첫 열매라 함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속속 그리스도적 생명으로 부활할 것임을, 변화할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차원이 아니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 사건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이렇다하게 증명을 하려는 시도도 노력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재창조의 역사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면 천사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깨끗한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구차하게 설명을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이것이 첫 번째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와보라 하시더니 부활하신 이 시간에도 와보라 하십니다. 와서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딴 이야기가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무서워 말라(10절)"하심입니다.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 사람들이 죽은 자처럼 되어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시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할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믿으라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이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뻐하라 하십니다. 여자들이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났다 합니다. 다섯 번째 명령이 전파하라 하심입니다. 이 사건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이 믿음에 들어오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구원 얻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을 무엇에 의해서 믿으려고 하느냐,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로밖에는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성경을 창세기로부터 죽 읽음으로 그 맥락 속에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심을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우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성경 속에 있는 예언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느라면 어느 사이엔가 부활의 사실은 아주 당연하게 아주 쉽게 믿기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깁니다. 예언을 믿는 자는 성취를 믿습니다. 성령을 믿는 자는 부활을 믿습니다.
본문말씀 가운데 아주 귀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말씀하시던대로(6절)"----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막 9 : 31)" ----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예닐곱 번에 걸쳐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듣든지 못알아듣든지 간에 "십자가에 죽고 삼 일만에 부활하리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온 사람들은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야기란 대전제로 시작해서 전개되는 논리를 알아야만 그 결론을 알 수 있습니다. 엉뚱하게 딱 한마디만 들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한구절한구절 자세히 듣느라면 그 말씀 안에서 부활의 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라는 본문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즉 당신 스스로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성립합니다. 이루어짐이 없는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검증학(檢證學)이라고 하는 학문적 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부활하리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웃기는 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 거짓말을 믿고 따를 사람이 어디 있으며, 여기에 목숨을 걸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생명력이 폭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당신이 누누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뿐이라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잘 믿던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크고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병에 걸린 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 엄청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크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어찌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서 사람들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을 가지시고도 죽으시려는 것입니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이 죽으셔야 했던 이유를 알게 하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죽으셔야 했으며, 또한 그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하십니다. 모든 수수께끼가 여기서 풀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연후에야 예수님의 모든 능력, 모든 용서, 모든 사랑, 모든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는 재촉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7절)" ---- 여기서 '빨리'는 헬라어 원문에는 '타쿠'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빨리 서두르라는 의미입니다.
천사가 빨리 서두르라고 명하자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러 갔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이란 오래 품고 있을수록 점점 깊어지고 많은 부작용을 낳게 합니다. 의심도 한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촉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잡혀가서 십자가에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지하의 골방에 숨어 있습니다. 이렇듯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빨리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씻어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지닌 두려움의 근본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죽음입니다. 죽음의 위력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움, 소유, 명예, 지식은 모두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죽음은 위대합니다. 문제 중에서도 가장 깊은 문제가 죽음입니다.
둘째, 죄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죄를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비롯되는 가책과 저주 의식에 매여 있습니다. 지옥을 믿는 사람이거나 안 믿는 사람이거나 모두에게 지옥이 두려운 것은 죄 때문입니다. 지옥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농담 삼아 만일 지옥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내가 갈 곳'이라고 합디다. 여러분, 죽음과 더불어 이 죄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셋째, 불확실성입니다. 앞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다음 세계는 어떠한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두운 세계로 끌려가는 것 같은 불안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 세 가지가 모든 불안과 문제의 근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 가지에 대한 해답이 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의 단계일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롭다 함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앞에 있는 세계에 대하여 약속을 해줍니다.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란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드리겠습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로 제가 1963년, 프린스턴대학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때입니다. 그때 저는 브라운홀 307호를 혼자서 쓰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어느 교회에서 저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바람에 급하게 나가느라고 방 열쇠를 안에다 두고 문을 잠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로 향하는 차안에서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오늘밤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이 들더군요. 어쨌든 그 교회에서 낮예배,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고 밤 10시 넘어서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기숙사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열쇠는 방안에 있으니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문 밖에서 밤을 새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난처해 있는데, 미국 친구 하나가 지나가다 제 모습을 보더니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더군요.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 친구는 수선을 떨며 온 기숙사를 돌아다니더니 열쇠 하나를 가져와서는 손쉽게 제 방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도 고맙고 신통해서 그 열쇠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마스터 키(master key)'라고 알려주더군요. '마스터 키'라는 말을 그 때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 '마스터 키'는 어떤 자물쇠라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경제문제, 정치문제, 가정문제, 생명문제…… 문제는 많습니다만 그 모든 것의 마스터 키는 오직 하나, 부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부활, 이것이 바로 믿길 때에 문제되는 것이 있습니까?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원수를 이긴다 함은 원수를 죽인다는 것도 아니요, 때려눕힌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부활만이 참 승리인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 앞에는 어떤 고난이나 원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 앞에 오해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마스터 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없이 오만불손한 사람은 불쌍합니다.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죽음이 전부인 줄 알고 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은 십자가가 모든 문제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생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래서 본문은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숨어서 벌벌 떨다가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거침없이 그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원수의 복을 빌며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마는 그실 문제는 하나요 해결도 하나입니다. 생명의 마스터 키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부활절이 되어 서로 인사할 때에 "예수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부활절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예수 부활"이라고 인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부활, 이 부활신앙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며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활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때마다 부활신앙을 새롭게 해나갈 때에 비로소 엄청난 생명의 능력과 재창조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빨리 기서 전하라(마태복음 28장 1절~10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실패를 했을 때에 그 실패를 실패로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뭅니다. 병들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멀쩡하게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진찰을 받고 "당신은 치명적인 병을 얻었습니다. 며칠 못가 죽을 것입니다"하는 의사의 선언을 들었을 때에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나를 압니다. 내가 죄인임을 내가 압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사에 어려운 일이 허다합니다마는 저렇듯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사실 앞에 진솔하십니까? 얼마나 정직하십니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도 가슴이 열리지 않습니다. 가슴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데도 의지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느낌과 생활이 따로따로 놉니다. 이렇듯 병리적이고 건강치 못한 인간으로 허우적거리면서 그 많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건은 그대로 사건입니다. 사실 자체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사실로 인정할 때에야, 내가 솔직하게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그 진실은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불이 났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불이 났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불이 난 것입니다. 안 났다고 생각하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불이 안 난 것입니다. 타 죽어도 안 난 것이 됩니다.
여러분,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때에야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 다 합리적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경험,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헛된 욕망,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허황한 욕망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이해(理解), 나의 능력의 제한성을 얼마만큼 믿고 있습니까? 믿으면서부터 지식은 성립됩니다. 저 18세기, 영국이 도덕적으로 형편없이 타락했던 시절에 자식들이 부모를 향하여 "당신이 과연 내 아버지요?" "당신이 정말 내 어머닌가요?"라고, 맹랑한 질문을 서슴없이 했다고 합니다. 저 남자가 과연 내 아버지일까? 저 여자가 과연 내 어머니일까? 정말로 의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히 맹랑한 노릇이지요.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네 어머니다----이것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무슨 증거를 대야 믿는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알건 모르건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의 부모님 됨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아침 식사를 한 것, 음식을 의심치 않고 먹은 것입니다. 다 알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갈 만큼 지식이 갔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믿고 나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고, 생명이 그렇고 사망의 문제가 그렇고 참 진리가 그렇습니다. 믿음을 토대로 지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사실이란 엄격히 말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사건 그대로 있습니다. 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그만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일이 내가 믿지 않는다고 없어지겠습니까? 내가 믿는다고 해서 없던 일이 생기겠습니까? 나의 지식이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사건은 사건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있다고 한다 해서 있고 없다고 한다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그대로 침묵 속에 신비롭게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증명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예수 부활---- 이 사실은 학문적 토론 제목이 아닙니다. 여기 앉아서 그렇다 아니다, 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고 논리적으로 별소리 다할 성질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실생활에, 우리의 생명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비로운 능력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지식의 능력,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사건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있음으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定礎)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으로부터 믿음이 정초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이 부활사건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사건이 부활신앙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 부활'에 관한 말씀이 무려 사백한 번이나 반복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타나는 모든 사건이, 모든 이야기가 예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요, 초점과 중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맞추어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의 중심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신앙구조는 간단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선포된 믿음의 내용은 흔히 말하는 바 '케리그마(Kerygma)'입니다.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그것입니다. 이 사실만을 설명합니다. 이 사실을 뿌리로 하고 근거로 해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이 사건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능력을 얻음으로 얼마나 크게 역사 하였으며,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으며, 그 역사가 어떤 모습으로 위대하게 확산되어나갔는지, 이것을 초대교회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저러한 인상을 강렬하게 받는 것입니다. 생명을 죽음이 가둘 수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죽음보다 큽니다. 생명의 큰 역사 안에서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문제가 그대로 아침안개처럼 사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 역사의 중심부에 이 부활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첫 번째 사건입니다. 결코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설명한답시고 벌레의 윤회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해가 바뀌는 것을 보라는 둥, 씨앗이 썩어지고 싹이 나고, 겨울이 가고 봄이 되어 어쩌고 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들을 합니다. 부활은 예수 부활, 한 사건뿐입니다. 어떠한 비사(比辭)로도 어떠한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의 설(設)로 운위하는 'immortality(영혼불멸)'는 부활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부활만이 부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의 의미요 개념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신학자 샤르댕(Chardin, T.)이 과학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생명의 세계는 식물 세계의 생명이 있고 한걸음 나아가 동물 세계의 생명이 있으며, 더 나아가 좀더 차원 높은 누스 패어(nous phare) 세계의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복합체입니다. 우선 우리 인간에게 분명 식물적인 것이 있습니다. 손톱이 자라고 머리칼이 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잘 자라면 '농사가 잘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농사가 잘 안되어서' 이렇게 머리가 많이 빠지고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식물 세계의 생명이 시원찮은 것이지요. 그리고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 다른 동물에게 있는 것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식물적인 것, 동물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고 이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반사작용이 이성에 있고 도덕성에 있습니다.
'nous'는 철학에서 '이데아를 보는 영성, 감성이나 육체 중에 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불생 불멸의 원리'라고 풀이합니다.
영성(靈性)이 있는 존재----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은 이 차원을 넘습니다. 인간 수준을 초월하는, 말하자면 그리스도 패어, 그리스도적 생명 단계입니다. '부활'이라는 말도 쓰지만 성경에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적 변화'라고도 말씀합니다. 부활은 역사에 오직 한 번 있었던 사건입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한 번에서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첫 열매라 함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속속 그리스도적 생명으로 부활할 것임을, 변화할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차원이 아니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 사건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이렇다하게 증명을 하려는 시도도 노력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재창조의 역사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면 천사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깨끗한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구차하게 설명을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이것이 첫 번째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와보라 하시더니 부활하신 이 시간에도 와보라 하십니다. 와서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딴 이야기가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무서워 말라(10절)"하심입니다.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 사람들이 죽은 자처럼 되어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시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할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믿으라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이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뻐하라 하십니다. 여자들이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났다 합니다. 다섯 번째 명령이 전파하라 하심입니다. 이 사건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이 믿음에 들어오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구원 얻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을 무엇에 의해서 믿으려고 하느냐,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로밖에는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성경을 창세기로부터 죽 읽음으로 그 맥락 속에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심을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우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성경 속에 있는 예언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느라면 어느 사이엔가 부활의 사실은 아주 당연하게 아주 쉽게 믿기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깁니다. 예언을 믿는 자는 성취를 믿습니다. 성령을 믿는 자는 부활을 믿습니다.
본문말씀 가운데 아주 귀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말씀하시던대로(6절)"----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막 9 : 31)" ----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예닐곱 번에 걸쳐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듣든지 못알아듣든지 간에 "십자가에 죽고 삼 일만에 부활하리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온 사람들은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야기란 대전제로 시작해서 전개되는 논리를 알아야만 그 결론을 알 수 있습니다. 엉뚱하게 딱 한마디만 들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한구절한구절 자세히 듣느라면 그 말씀 안에서 부활의 사건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라는 본문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즉 당신 스스로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성립합니다. 이루어짐이 없는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검증학(檢證學)이라고 하는 학문적 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부활하리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웃기는 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 거짓말을 믿고 따를 사람이 어디 있으며, 여기에 목숨을 걸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생명력이 폭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당신이 누누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뿐이라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잘 믿던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크고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병에 걸린 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 엄청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크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어찌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서 사람들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을 가지시고도 죽으시려는 것입니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당신이 죽으셔야 했던 이유를 알게 하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죽으셔야 했으며, 또한 그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하십니다. 모든 수수께끼가 여기서 풀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연후에야 예수님의 모든 능력, 모든 용서, 모든 사랑, 모든 은혜를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는 재촉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7절)" ---- 여기서 '빨리'는 헬라어 원문에는 '타쿠'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빨리 서두르라는 의미입니다.
천사가 빨리 서두르라고 명하자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러 갔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이란 오래 품고 있을수록 점점 깊어지고 많은 부작용을 낳게 합니다. 의심도 한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촉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잡혀가서 십자가에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지하의 골방에 숨어 있습니다. 이렇듯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빨리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씻어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지닌 두려움의 근본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죽음입니다. 죽음의 위력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움, 소유, 명예, 지식은 모두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죽음은 위대합니다. 문제 중에서도 가장 깊은 문제가 죽음입니다.
둘째, 죄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죄를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비롯되는 가책과 저주 의식에 매여 있습니다. 지옥을 믿는 사람이거나 안 믿는 사람이거나 모두에게 지옥이 두려운 것은 죄 때문입니다. 지옥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농담 삼아 만일 지옥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내가 갈 곳'이라고 합디다. 여러분, 죽음과 더불어 이 죄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셋째, 불확실성입니다. 앞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다음 세계는 어떠한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두운 세계로 끌려가는 것 같은 불안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 세 가지가 모든 불안과 문제의 근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 가지에 대한 해답이 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의 단계일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롭다 함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앞에 있는 세계에 대하여 약속을 해줍니다.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란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드리겠습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로 제가 1963년, 프린스턴대학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때입니다. 그때 저는 브라운홀 307호를 혼자서 쓰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어느 교회에서 저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바람에 급하게 나가느라고 방 열쇠를 안에다 두고 문을 잠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로 향하는 차안에서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오늘밤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이 들더군요. 어쨌든 그 교회에서 낮예배,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고 밤 10시 넘어서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기숙사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열쇠는 방안에 있으니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문 밖에서 밤을 새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난처해 있는데, 미국 친구 하나가 지나가다 제 모습을 보더니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더군요.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 친구는 수선을 떨며 온 기숙사를 돌아다니더니 열쇠 하나를 가져와서는 손쉽게 제 방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도 고맙고 신통해서 그 열쇠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마스터 키(master key)'라고 알려주더군요. '마스터 키'라는 말을 그 때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 '마스터 키'는 어떤 자물쇠라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경제문제, 정치문제, 가정문제, 생명문제…… 문제는 많습니다만 그 모든 것의 마스터 키는 오직 하나, 부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부활, 이것이 바로 믿길 때에 문제되는 것이 있습니까?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원수를 이긴다 함은 원수를 죽인다는 것도 아니요, 때려눕힌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부활만이 참 승리인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 앞에는 어떤 고난이나 원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 앞에 오해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마스터 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없이 오만불손한 사람은 불쌍합니다.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죽음이 전부인 줄 알고 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은 십자가가 모든 문제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생명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래서 본문은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숨어서 벌벌 떨다가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거침없이 그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원수의 복을 빌며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마는 그실 문제는 하나요 해결도 하나입니다. 생명의 마스터 키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부활절이 되어 서로 인사할 때에 "예수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부활절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예수 부활"이라고 인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부활, 이 부활신앙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며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활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때마다 부활신앙을 새롭게 해나갈 때에 비로소 엄청난 생명의 능력과 재창조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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