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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한계(히브리서 3장 12절~19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사진을 통해서든, 텔레비전을 통해서든, 혹은 직접 가서이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신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저는 구경이라고 많이 다녀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이제껏 구경한 것들 가운데서이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장 장관이었다고 늘 생각합니다.
폭포라는 것은 대체로 산 속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물이 산에서 흘러나와 골짜기로 흐르고, 그러다가 절벽을 타고 흐르면, 이것을 폭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는 예외입니다. 이것은 평지에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넓은 광야에 있다는 것이 여느 폭포와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폭포 상류로 올라가 보면 그 밑에 폭포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상류는 그저 넓은 강, 넓은 호수로만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깁니다. 그러나 폭포는 폭포인지라 노를 젓지 않아도 배가 빠른 속도로 떠내려갑니다. 그 정도로 물살이 급합니다. 물 흐르는 대로 그냥 떠내려가다가는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말뚝을 박고 붉은 깃발을 띄워 놓았습니다. 이것이 세 차례나 길게 죽 이어져 있습니다. 1차 경고선까지 오면 노를 저어서 다시 상류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서는 쉽게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경고가 나타납니다. 거기까지 흘러 내려오면 다시 올라가기가 조금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아직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두 번째 경고를 그대로 지나치면 세번째 경고에 도달합니다. 그 경고마저 넘어서면 이제 아무리 노를 저어도 소용없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물살에 휘말려 들어가서 배도 사람도 그 무서운 폭포 밑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안내원의 이야기로는 그래서 1년에도 서너 명씩 그곳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고---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상징적 교훈을 줍니다.
사람한테는 일생을 통하여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기를,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실은 놓친 것이 아닙니다. 버린 것입니다. 좋은 기회들---그 귀한 가능성들이, 아름다운 시간들이 이미 내게 주어졌지만 내가 그만 포기해 버렸습니다. 나 스스로 모두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만큼 뒤에 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가 그 소중한 기회를 버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한계선이 있듯이 기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선을 넘지 않도록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영부영하다 그 한계선을 넘어버려서 고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를테면 배움의 기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해야겠다' 하면서도 '조금 더 있다가'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교에 가서 열심히 하겠다 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대학 들어가서 잘해보겠다고 합니다. 대학생이 되면 사회에 나가서 참으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오면 별수 있습니까? 이다음에, 이다음에 하는 동안 다 틀려 버립니다. 이미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기억력이 가물가물하고 시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배움의 기회가 따로 있습니다.
한번 버리고 나면 다시는 내게 찾아와 주지 않을 기회입니다.
진실의 기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진실할 수 있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진실해야 할 때에 진실하지 않으면, 거짓된 행동 거짓된 말을 거듭하다 보면 영영 진실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게되는 것입니다. 의로움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의를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다 기회가 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회개의 기회입니다. 아주 쉽게 회개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회개하면 참으로 자유 할 수 있고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기회에 회개하지 않으면---죄를 은폐시키려고 덮고 또 덮어 나가다 보면 이제 회개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 때에는 회개가나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가문의 망신이 됩니다. 이제까지 공들여 쌓아올린 명예가 하루아침에 실추되고 맙니다. 참으로 회개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회개는 왕복 거리가 짧아야 한다고 합니다. 원점으로부터 조금 떨어졌을 때에 회개하면 쉽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 떨어졌다가 되돌아오려고 하면 좀처럼 원점으로 돌아오기 힘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좋은 예로 다윗 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에 바로 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밧세바를 범한 죄를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까지 죽이고, 그러다 보니 죄는 점점 더 깊어 갑니다. 이제 회개하려고 하니 원점으로부터 너무도 멀어진 까닭에 회개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할 수 있는 회개입니까? 백성들이 무어라고 손가락질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마침내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힘든 회개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몰랐다'고 변명을 합니다. '약했기 때문에'혹은 '환경 때문에'라고 변명도 합니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진실할 수 있고 의로울 수 있고 선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버림으로 놓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는 것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먼저 적신호가 옵니다. 이때야말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적신호를 보고서 이런 때에는 좀더 먹어야 한다, 이런 때에는 좀더 쉬어야 한다, 이런 음식은 먹어야하고 저런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모든 병의 75%가 이처럼 예고 후에 찾아온다고들 말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건강을 지킬 수 있게 먼저 기회를 준다는 것이지요. 저는 어렸을 적에 소를 먹여 보았습니다. 끌고 나가 풀을 뜯겨 보았습니다. 그런데 소는 이상합니다. 눈앞에 연하고 맛있는 풀이 소복한데 그것을 다 뜯어먹지 않고 연신 자리를 옮겨다닙니다. 이쪽에서 조금 먹다가 또 저쪽으로 갑니다. 좋은 풀이 있는 곳으로 아무리 잡아끌어도 소용없습니다.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면서 저 먹고 싶은 대로 먹습니다. 처음에는 그 까닭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전문가로부터 들어보니, 소한테도 다 지혜가 있어서 쓴 것 단 것 골라 먹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밥 먹고 국 먹고 하듯이 소도 이 풀 저 풀 골라 먹어서 중화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소도 편식을 하면 죽는답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가 척척 알아서 잘 가려먹는 것을 제가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노릇입니까? 건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골고루 잘 먹고 잘 소화시킵니다. 그러므로 편식하는 사람은 일단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고를 받고 있습니다.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제때에 뉘우치고, 제때에 진실하여야 합니다. 이 은혜의 한계를 넘어서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강팍케 됨을 면하라' '강팍케 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강팍함이란 경화, 경직됨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고민과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혹은 단체, 회의를 보십시오. 어디에나 양극화 현상이 있고, 극단화가 있습니다. 극과 극으로 치닫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입니다. '강팍함'은 헬라어로 '스클레뤼노'입니다. 여기에는 '굳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점점 굳어집니다. 굳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굳어지지 말아라. 경화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굳어진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이 인내의 한계요, 인간성의 한계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굳어지기 전까지가 인간이며, 자유인이며, 인격체입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사단의 종이 됩니다. 굳어지고 맙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의 노예로서 육체의 길을 사는 인간이 됩니다. 강팍함의 반대는 온유입니다. 항상 열려 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강팍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경화되어가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먼저, 시작은 의심에서부터라고 합니다. 의심, 불신이 강팍케 됨의 시작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심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심할 때에는 곧이어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죄의 유혹입니다. 죄가 나를 유혹해서 이제는 불 신앙으로 몰고 갑니다. 불 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지면 불 신앙 그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자기를 특별시하게 됩니다. 나를 특별한 존재로 과대평가하고, 나의 나됨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순간, 잘못의 원인도 해결책도 나 자신에게 있건만 모든 잘못이 다른 사람한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잘못의 원인을 남한테로 돌립니다. 세상이 나빠서 그렇고 누가 나빠서 그렇다고 남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집으로 굳어질 때에 권면도 은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에 대하여 도전하게 됩니다. 사람을 비방하고, 법을 무시하고, 끝내는 자기 우상화에 빠지게 됩니다. 바야흐로 구제 불능의 난청적(難聽的) 인간이 됩니다. 귀머거리, 장님이요,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굳어지고 맙니다. 결국 비참한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경고합니다. "강팍케 됨을 면하라!"---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적어도 세 단계로 이 강팍케 된다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성령의 탄식입니다. 성령께서 탄식한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나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마술적이거나 기계론적 관계가 아닙니다. 인격적 관계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고난에 동참하시고, 또한 은혜를 더하시며,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고 무시하고 거역하고 반항하면 성령께서 탄식하십니다. 내게서 떠나가십니다. 성령이 떠나시는 순간, 나는 진공 사태가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바로 악마를 불러들입니다. 어느덧 성령이 떠나고, 나는 악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것을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버리신 바 됨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24,25, 28의 세 절에 걸쳐 하나님께서 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God gave them up."으로, 헬라어 성경에는 "파레도켄 아우투스"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포기를 해도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끗이 포기해 버렸다는 뜻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울 왕이 하나님께로서 버림을 받습니다. 겸손할 때에 택함을 받았으니 이제 교만할 때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았다고 해서 당장에 벼락을 맞아 죽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 버림받은 그 인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다윗을 시기합니다. 다윗은 아직 어린 청년이요, 특히 사울 왕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남편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모릅니다. 사위를 죽이겠다고 정면으로 창을 내던지기까지 합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왕으로서 뭇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그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무서운 인간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까? 기어이 사위를 죽이겠다고 광야를 헤매는 사울 왕의 모습이 보입니다. 끊임없이 뉘우치고 번뇌하면서도 끊임없이 다윗을 찾아 헤맵니다. 이것은 사울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 또 한 사람,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수차 경고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1절 이하를 봅시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더욱 직선적으로 유다를 가리켜 "네가 말하였도다"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여러 번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마지막 한계를 겁도 없이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이 순간은 마치 허락되는 순간이요, 자유하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버려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다시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불의한 길, 악한 길, 가룟 유다의 길이라면 가다가 막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악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악인들한테 병이 들든지 차 사고가 나든지 무슨 수가 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악한 길이 성공한다면 그는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버려진 길, 불의의 길을 갈 때에야말로 그 길이 막혀야 합니다. 불의한 궤계, 그러한 계책이 감쪽같이 성공했다면 바로 그 순간이 버림받은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은혜의 한계를 넘어선 결과입니다. 바리새인이 그러했고, 사두개인이 그러했고, 제사장들이 그러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섰기에 주님의 무서운 심판 버려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심이 있습니다. 인간 본인이 강팍해지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출 7:3)." 강팍함---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은 고로 이제 강팍케 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미 말씀이 있고 권면이 있었습니다. 징계도 있고 채찍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습니다. 스스로 강팍케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셨습니다. 이제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40년 동안의 기적을 보았으며, 불뱀의 형벌도 체험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강팍케 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재 위치와 죄 됨을 깨닫케 하기 위하여 강팍케 하시는 것입니다. 무의식 상태에 있는 내게, 너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스스로 깨달으라고 강팍케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입니다.
병원에 가면 간혹 이런 일이 있습니다. 진찰을 받고 당장 무슨 병이라고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쉬 진찰 결과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일 주일이나 기다려야 비로소 나옵니다. 이것은 왜입니까? 우리 몸에서 균을 꺼냈는데 이 균이 아직 너무 미세해서 현미경으로 보아도 무슨 균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배양합니다. 크게 만들어 가지고 확실해졌을 때에 '아, 이것이 무슨 균이다' 하고 진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교육적인 목적으로 악을 배양하십니다.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이 무서운 악을 배양하여, 나도 알고 남도 알게 하십니다. 저 사람이 무슨 죄 때문에 망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똑똑히 알아, 당신의 백성들로 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미 버림받은 자에게 강팍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는 데에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사에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마음을 더욱 악하게 하여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 징계와 은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죽은 과거란 없습니다. 과거는 늘 현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은 과거의 역사이며 미래로 향한 예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몸이 아프고 쑤신다는 것은 아직도 그 세포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세포는 감각이 없습니다.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은혜 가운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들려오는 것이 은혜요, 내 마음에 번민이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라고 하는 순간---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 이것이 기회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제 회개하여야 합니다. "매일 피차 권면하여……"---이것은 권면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서로서로 위로하면서 강팍케 됨을 면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권면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유혹, 불 신앙의 원인을 깨닫고 마음을 다해 회개하여야 합니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 깊이 뿌리 박힌 죄가 있음을 빨리 깨닫고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강팍케 됨을 면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치닫지 맙시다. 끝에 대하여는 생각도 말고, 말하지도 맙시다. 우리 모두 극단을 피합시다. 강팍케 됨을 면해야 합니다. 나의 영적 현주소가 어디이며, 내 심령이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 심령 상태를 재점검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온유함과 은혜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강팍케 됨을 면하라!"
은혜의 한계(히브리서 3장 12절~19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사진을 통해서든, 텔레비전을 통해서든, 혹은 직접 가서이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신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저는 구경이라고 많이 다녀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이제껏 구경한 것들 가운데서이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장 장관이었다고 늘 생각합니다.
폭포라는 것은 대체로 산 속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물이 산에서 흘러나와 골짜기로 흐르고, 그러다가 절벽을 타고 흐르면, 이것을 폭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는 예외입니다. 이것은 평지에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넓은 광야에 있다는 것이 여느 폭포와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폭포 상류로 올라가 보면 그 밑에 폭포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상류는 그저 넓은 강, 넓은 호수로만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깁니다. 그러나 폭포는 폭포인지라 노를 젓지 않아도 배가 빠른 속도로 떠내려갑니다. 그 정도로 물살이 급합니다. 물 흐르는 대로 그냥 떠내려가다가는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말뚝을 박고 붉은 깃발을 띄워 놓았습니다. 이것이 세 차례나 길게 죽 이어져 있습니다. 1차 경고선까지 오면 노를 저어서 다시 상류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서는 쉽게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경고가 나타납니다. 거기까지 흘러 내려오면 다시 올라가기가 조금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아직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두 번째 경고를 그대로 지나치면 세번째 경고에 도달합니다. 그 경고마저 넘어서면 이제 아무리 노를 저어도 소용없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물살에 휘말려 들어가서 배도 사람도 그 무서운 폭포 밑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안내원의 이야기로는 그래서 1년에도 서너 명씩 그곳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고---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상징적 교훈을 줍니다.
사람한테는 일생을 통하여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기를,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실은 놓친 것이 아닙니다. 버린 것입니다. 좋은 기회들---그 귀한 가능성들이, 아름다운 시간들이 이미 내게 주어졌지만 내가 그만 포기해 버렸습니다. 나 스스로 모두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만큼 뒤에 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가 그 소중한 기회를 버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한계선이 있듯이 기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선을 넘지 않도록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영부영하다 그 한계선을 넘어버려서 고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를테면 배움의 기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해야겠다' 하면서도 '조금 더 있다가'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교에 가서 열심히 하겠다 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대학 들어가서 잘해보겠다고 합니다. 대학생이 되면 사회에 나가서 참으로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오면 별수 있습니까? 이다음에, 이다음에 하는 동안 다 틀려 버립니다. 이미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기억력이 가물가물하고 시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배움의 기회가 따로 있습니다.
한번 버리고 나면 다시는 내게 찾아와 주지 않을 기회입니다.
진실의 기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진실할 수 있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진실해야 할 때에 진실하지 않으면, 거짓된 행동 거짓된 말을 거듭하다 보면 영영 진실할 기회를 얻을 수 없게되는 것입니다. 의로움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의를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다 기회가 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회개의 기회입니다. 아주 쉽게 회개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회개하면 참으로 자유 할 수 있고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기회에 회개하지 않으면---죄를 은폐시키려고 덮고 또 덮어 나가다 보면 이제 회개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 때에는 회개가나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가문의 망신이 됩니다. 이제까지 공들여 쌓아올린 명예가 하루아침에 실추되고 맙니다. 참으로 회개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회개는 왕복 거리가 짧아야 한다고 합니다. 원점으로부터 조금 떨어졌을 때에 회개하면 쉽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 떨어졌다가 되돌아오려고 하면 좀처럼 원점으로 돌아오기 힘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좋은 예로 다윗 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에 바로 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밧세바를 범한 죄를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까지 죽이고, 그러다 보니 죄는 점점 더 깊어 갑니다. 이제 회개하려고 하니 원점으로부터 너무도 멀어진 까닭에 회개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할 수 있는 회개입니까? 백성들이 무어라고 손가락질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마침내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힘든 회개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몰랐다'고 변명을 합니다. '약했기 때문에'혹은 '환경 때문에'라고 변명도 합니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진실할 수 있고 의로울 수 있고 선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버림으로 놓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는 것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먼저 적신호가 옵니다. 이때야말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적신호를 보고서 이런 때에는 좀더 먹어야 한다, 이런 때에는 좀더 쉬어야 한다, 이런 음식은 먹어야하고 저런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모든 병의 75%가 이처럼 예고 후에 찾아온다고들 말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건강을 지킬 수 있게 먼저 기회를 준다는 것이지요. 저는 어렸을 적에 소를 먹여 보았습니다. 끌고 나가 풀을 뜯겨 보았습니다. 그런데 소는 이상합니다. 눈앞에 연하고 맛있는 풀이 소복한데 그것을 다 뜯어먹지 않고 연신 자리를 옮겨다닙니다. 이쪽에서 조금 먹다가 또 저쪽으로 갑니다. 좋은 풀이 있는 곳으로 아무리 잡아끌어도 소용없습니다.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면서 저 먹고 싶은 대로 먹습니다. 처음에는 그 까닭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전문가로부터 들어보니, 소한테도 다 지혜가 있어서 쓴 것 단 것 골라 먹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밥 먹고 국 먹고 하듯이 소도 이 풀 저 풀 골라 먹어서 중화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소도 편식을 하면 죽는답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가 척척 알아서 잘 가려먹는 것을 제가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노릇입니까? 건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골고루 잘 먹고 잘 소화시킵니다. 그러므로 편식하는 사람은 일단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고를 받고 있습니다.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제때에 뉘우치고, 제때에 진실하여야 합니다. 이 은혜의 한계를 넘어서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강팍케 됨을 면하라' '강팍케 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강팍함이란 경화, 경직됨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고민과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혹은 단체, 회의를 보십시오. 어디에나 양극화 현상이 있고, 극단화가 있습니다. 극과 극으로 치닫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입니다. '강팍함'은 헬라어로 '스클레뤼노'입니다. 여기에는 '굳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점점 굳어집니다. 굳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굳어지지 말아라. 경화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굳어진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이 인내의 한계요, 인간성의 한계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굳어지기 전까지가 인간이며, 자유인이며, 인격체입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사단의 종이 됩니다. 굳어지고 맙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의 노예로서 육체의 길을 사는 인간이 됩니다. 강팍함의 반대는 온유입니다. 항상 열려 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강팍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경화되어가는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먼저, 시작은 의심에서부터라고 합니다. 의심, 불신이 강팍케 됨의 시작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심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심할 때에는 곧이어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죄의 유혹입니다. 죄가 나를 유혹해서 이제는 불 신앙으로 몰고 갑니다. 불 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지면 불 신앙 그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자기를 특별시하게 됩니다. 나를 특별한 존재로 과대평가하고, 나의 나됨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순간, 잘못의 원인도 해결책도 나 자신에게 있건만 모든 잘못이 다른 사람한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잘못의 원인을 남한테로 돌립니다. 세상이 나빠서 그렇고 누가 나빠서 그렇다고 남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집으로 굳어질 때에 권면도 은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에 대하여 도전하게 됩니다. 사람을 비방하고, 법을 무시하고, 끝내는 자기 우상화에 빠지게 됩니다. 바야흐로 구제 불능의 난청적(難聽的) 인간이 됩니다. 귀머거리, 장님이요,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굳어지고 맙니다. 결국 비참한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경고합니다. "강팍케 됨을 면하라!"---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적어도 세 단계로 이 강팍케 된다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성령의 탄식입니다. 성령께서 탄식한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나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마술적이거나 기계론적 관계가 아닙니다. 인격적 관계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고난에 동참하시고, 또한 은혜를 더하시며,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고 무시하고 거역하고 반항하면 성령께서 탄식하십니다. 내게서 떠나가십니다. 성령이 떠나시는 순간, 나는 진공 사태가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바로 악마를 불러들입니다. 어느덧 성령이 떠나고, 나는 악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것을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버리신 바 됨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24,25, 28의 세 절에 걸쳐 하나님께서 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God gave them up."으로, 헬라어 성경에는 "파레도켄 아우투스"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포기를 해도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끗이 포기해 버렸다는 뜻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울 왕이 하나님께로서 버림을 받습니다. 겸손할 때에 택함을 받았으니 이제 교만할 때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았다고 해서 당장에 벼락을 맞아 죽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 버림받은 그 인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다윗을 시기합니다. 다윗은 아직 어린 청년이요, 특히 사울 왕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남편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모릅니다. 사위를 죽이겠다고 정면으로 창을 내던지기까지 합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왕으로서 뭇 백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그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무서운 인간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까? 기어이 사위를 죽이겠다고 광야를 헤매는 사울 왕의 모습이 보입니다. 끊임없이 뉘우치고 번뇌하면서도 끊임없이 다윗을 찾아 헤맵니다. 이것은 사울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 또 한 사람,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수차 경고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1절 이하를 봅시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더욱 직선적으로 유다를 가리켜 "네가 말하였도다"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여러 번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마지막 한계를 겁도 없이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이 순간은 마치 허락되는 순간이요, 자유하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버려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다시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불의한 길, 악한 길, 가룟 유다의 길이라면 가다가 막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악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악인들한테 병이 들든지 차 사고가 나든지 무슨 수가 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악한 길이 성공한다면 그는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버려진 길, 불의의 길을 갈 때에야말로 그 길이 막혀야 합니다. 불의한 궤계, 그러한 계책이 감쪽같이 성공했다면 바로 그 순간이 버림받은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은혜의 한계를 넘어선 결과입니다. 바리새인이 그러했고, 사두개인이 그러했고, 제사장들이 그러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섰기에 주님의 무서운 심판 버려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심이 있습니다. 인간 본인이 강팍해지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출 7:3)." 강팍함---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은 고로 이제 강팍케 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미 말씀이 있고 권면이 있었습니다. 징계도 있고 채찍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습니다. 스스로 강팍케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셨습니다. 이제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40년 동안의 기적을 보았으며, 불뱀의 형벌도 체험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강팍케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강팍케 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재 위치와 죄 됨을 깨닫케 하기 위하여 강팍케 하시는 것입니다. 무의식 상태에 있는 내게, 너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스스로 깨달으라고 강팍케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입니다.
병원에 가면 간혹 이런 일이 있습니다. 진찰을 받고 당장 무슨 병이라고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쉬 진찰 결과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일 주일이나 기다려야 비로소 나옵니다. 이것은 왜입니까? 우리 몸에서 균을 꺼냈는데 이 균이 아직 너무 미세해서 현미경으로 보아도 무슨 균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배양합니다. 크게 만들어 가지고 확실해졌을 때에 '아, 이것이 무슨 균이다' 하고 진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교육적인 목적으로 악을 배양하십니다.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이 무서운 악을 배양하여, 나도 알고 남도 알게 하십니다. 저 사람이 무슨 죄 때문에 망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똑똑히 알아, 당신의 백성들로 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미 버림받은 자에게 강팍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는 데에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사에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마음을 더욱 악하게 하여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 징계와 은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죽은 과거란 없습니다. 과거는 늘 현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은 과거의 역사이며 미래로 향한 예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몸이 아프고 쑤신다는 것은 아직도 그 세포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세포는 감각이 없습니다.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 은혜 가운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들려오는 것이 은혜요, 내 마음에 번민이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라고 하는 순간---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 이것이 기회입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제 회개하여야 합니다. "매일 피차 권면하여……"---이것은 권면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서로서로 위로하면서 강팍케 됨을 면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권면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죄의 유혹, 불 신앙의 원인을 깨닫고 마음을 다해 회개하여야 합니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이 깊이 뿌리 박힌 죄가 있음을 빨리 깨닫고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강팍케 됨을 면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치닫지 맙시다. 끝에 대하여는 생각도 말고, 말하지도 맙시다. 우리 모두 극단을 피합시다. 강팍케 됨을 면해야 합니다. 나의 영적 현주소가 어디이며, 내 심령이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 심령 상태를 재점검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온유함과 은혜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강팍케 됨을 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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