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큰 사람(마태복음 18장 1절~10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서울 시립 아동병원에는 무의무탁(無依無托)한 어린이가 언제나 평균 3백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중 270여 명은 불구 어린이들입니다. 이들은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어머니들이 그 아이들을 진찰하겠다고 데려왔다가 의사에게 맡겨놓고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립 아동병원의 어린이들은 이렇게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생명들입니다. 불구인 어린이는 입양(入養)도 안 된다고 합니다. 키워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는 아이를 위해 내 청춘 바쳐가며 투자를 하고 싶지 않다고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어머니들로부터 무생물(無生物)인 양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체력이 남만 못하다고 내버리고, 지능이 남만 못하다고 버려지고, 인물이 남만 못하다고 팽개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려진 아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꼭 쓰레기 버리듯 어디에다 갖다 버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버려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내 품에 두고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아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공간적으로는 버려진 것 같지 않으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버려진 아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입니다. 버리는 언동, 버리는 행위---이런 것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시립 아동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들은 그 병원에 근무함으로 해서 크게 우는 일이 두 번 있다고 합니다. 발령을 받아 처음으로 이 병원에 들어섰을 때, 수용되어 있는 어린이들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한 번 울고, 몇 달 후 또는 몇 년 후, 이 병원을 떠날 때에 또 한 번 크게 운다고 합니다. 그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다보면 어느 결에 어린이들과 정이 들고, 떠날 때에는 그 정을 거기에 두고 떠나자니 울게 된다는 것입니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이들을 떼 놓고 떠나자니 애끊는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정에 목마른 그 생명들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 목을 놓아 울어야 하는 이 간호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바랍니다.
세상이 이처럼 어린아이들을 가볍게 여기고 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할지라도 기독교는 분명히 어린 영혼들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복음이 어린아이들에게 계시(啓示)되는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비록 어린아이들 이 세상 이치에는 문리가 트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에 관한 한은 아무리 지식이 많은 어른일지라도 어린아이 한 영(靈)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의 진리는 어린아이들이 더 먼저 알고, 더 빨리 깨닫습니다.
제가 공부한 훌러신학에 라저스라고 하는 유명한 조직신학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세계가 알아주는 훌륭한 교수님이지만, 주일이 되면 크고 유명한 교회, 유명한 모임의 예배에 참석지 않으시고 꼭 자신이 나가는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하여 초등학교 2,3학년쯤 되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당신같이 심오한 지식을 가지신 분이 어떻게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저런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느냐'고, 어린아이들과 말이 통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교수님은 대답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통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성경은 성경이 아닙니다"---백번 옳은 말입니다.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들이 먼저 안다고, 그들에게 먼저 열려 있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의 순진 무구(無垢)한 마음을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 어른들의 머리보다 높이셨습니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이 어른보다 낫다는 점을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며 "호산나, 호산나!" 하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미워하는 제사장들이 나왔을 때에는 그 위협에 두려움을 느꼈던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끝까지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어린아이들뿐이었습니다(마 21 : 15).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하고 시편 8편 2절의 말씀을 들어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머니는 '쥬이쉬 마더(Jewish mother)'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의 교육 방법과 교육철학은 전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교육학의 석학들이 아무리 머리를싸매고 연구해도 다 이해하지 못하며. 또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쥬이쉬 마더'의 교육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은 아이들을 서로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잠깐, 우리들의 좋지 않은 교육 유형들을 살펴봅시다. 위협형---'한번만 더 그런 짓을 했다가는…' 하고 아이들을 위협하는 유형입니다. 비교형---'그 애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고, 야단칠 때마다 남과 비교하는 부모들이 많지 않습니까? 나열형---언제 그랬고 언제 그랬고 하면서 잘못한 것들을모아뒀다가 줄줄이 나열하는 형입니다. 또 조소형(嘲笑型)이라는것이 있습니다. 잘 논다,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아이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변덕형---일관성 없는 교육 방법입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언제는 꾸짖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고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상의 유형들이 다 좋지 못한 유형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절대로 비교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시기, 질투, 경쟁심 같은 것들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Einstein) 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자,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 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마 초상집이 됐을 것입니다. 이젠 다 틀렸다고 낙담했겠지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런 성적표를 보고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오히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하고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어머니가 말한대로 아인슈타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은 사람 나름으로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못 알아보고 누구는 어떻고누구는 어떻고 하면서 쓸데없이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하다가 우리집 아이의 재능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교육 방법으로 또 한 가지 훌륭한 것은 그들의 축복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식물을 키울 때에도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다 하지만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아닙니까?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젖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축복관이 중요한 것입니다. '축복관'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에 거기서 군목으로 근무한바 있는 제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주일 아침, 그가한국 군인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축복 기도를 올리려 할 때였습니다. 난데없이 미군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더랍니다. 제 친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 그들 앞에서 축도를 올리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군 병사들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우리 미군 군목님이 마침 출장 중이시라 주일날 축복 받을 데가 없어 군목님께 온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예배 다 드리고 나서 축복기도 드릴 때에 슬그머니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헛드린 것입니다.
복 받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축복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지않는 재산은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도 지위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로서오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유대 어머니들은 동네에 유명한 랍비(rabbi;기독교의 목사와비슷함)가 오시면 어린아이들을 데려가서 '복을 빌어 주세요' '복을 빌어 주세요' 하고 청한답니다. 이것이 저들의 풍속이요 교육방법입니다. 유대 어머니들이 랍비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려가서 복을 비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말합니다. "자, 이분을 잘 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어른이신가……"랍비---뭐, 옷을 잘 입었거나 잘생겨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복을 빌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줄 분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분의 복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어 둬야 한다" 하고아이들을 훈계하면서 어머니가 먼저 열심히 듣는 자세를 보여 줍니다.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랍비로부터 들은 말씀을 어린아이가 끝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틈틈이 가르쳐 주고 다시 상기시키고 합니다. 자, 이러니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훌륭한 어른들을 향한 존경심이 자리잡을 수 밖에요. 그러니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네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존경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귀감으로 삼을 그림자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귀감이라고는 세상 잇속 차리기에 바쁜 부모님의 모습뿐입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이 무엇을 본받고 자랄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의 본을 제시해 줘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상(理想)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한 어린아이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큽니까?" 이 질문 속에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태복음 17장 1절 이하를 보십시다. 거기에는 변화산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세 제자가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예수님의 모습이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엘리야와 모세도 나타날 것입니다. 참으로 긴장되고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 밑에 아홉 제자를 남겨 두시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따로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다른아홉 명의 제자들은 몹시 신경이 쓰였겠지요.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이 질문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을 때, 그때에는 누가윗자리에 앉겠습니까? 베드로입니까? 요한입니까? 아니면 야고보입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가운데 세우셨는데 여기에는 '이 어린아이를 보고 배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보아라. 어린아이에게서 배워라.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라. 건방지게 높은 자리만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낮추고 낮추며 마음을 돌려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큰 자가 될 수 없다'---이런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너무 큰 자에게 마음을 쓰고,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 그만큼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크고 싶은데 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보다 높은 데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사학자가 말하기를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미친 사람 몇 사람 탓이다"라고 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단지 몇 사람의 시기, 질투 때문에, 그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온 인류가 고생을 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시기, 질투로 가득찬 욕심 많은 몇 사람 때문에 온 국민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기, 질투, 크려고 발버둥치는 그 몇 사람들 틈에 바로 지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 있습니다.
저는 높은 사람도 못 되고 높을 수도 없는 사람으로, 올라가도 내려가도 목사입니다마는, 이 성직 30여 년에 여러 층의 사람들을 가까이 사귀어 왔습니다. 돈 많은 사람도 만나고 가난한 사람들과도 만나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도 만나고 낮은 지위에 있어 고생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 층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색다르게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사귀어보니까 뜻밖에도 하나같이 '촌뜨기' 같더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딘지 모르게 어린아이와 같은 데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는 제가 사귀어 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세상으로 두루 눈을 돌려보더라도 이런 경향은 뚜렷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남들에게서 높임을 받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면 대체로 어린 아이 쪽에 가까운 사람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제일 크다고 여기는 사람,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 스스로 못난 것을 알면서도 잘난 체하느라 억지로 어깨에 힘을 주고 사는 사람, 어떻게 하든 기어오르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영락없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제 속을 못 이겨서 고생들을 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어른이 되어도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고, 지각이 들어도 생각은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지체가 따르고 명성이 따릅니다. 풍진 세상 거친 바람 속에 살면서도, 그 마음이 천진(天眞)을 잃지 않고, 그 생각에 티가 없는 무구(無垢)한 사람---이런 사람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략 중상하고, 그 마음에서부터 썩었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가정을 들여다보더라도 그저 서로서로 낮추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편안합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참 다복한 분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을 만날 때면 "집안이 두루 평안하십니까?" 하고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은혜로요" 하고 그분은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하나같이 어찌 그리도 훌륭하게 키워 놓으셨습니까? 가정교육을 남달리 잘 하셨나 보지요?" 하고 진심에서 물어 보면, 그분은 "처(妻) 덕이지요. 저 사람 덕분입니다" 하고 서슴없이 부인을 가리킵니다. "저는 성깔이 못돼놔서 시원찮습니다마는 다행히 제 아내가 워낙 좋은 사람이 돼놔서요" 하고 부인을 칭찬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인은 또 남편을 칭찬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고마워하고---이런 가정이라면 천국입니다. 어떤 집에 가 보면 내 눈앞에서도 서로를 헐뜯고 허물합니다. "보세요 목사님, 저렇게 형편없답니다 저이가……" 하고 남편을 비방하는가 하면, 아이들 보고는 "애들아 니네들은 애비를 닮지 마라, 제발!" 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가정이 지옥입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한 아이들을 보고 그 부모에게 "자녀들을 참 잘 키워 놓으셨군요" 하고 칭찬을 할라치면 "무슨 말씀을요. 명색이 부모라지만 이렇다하게 가르친 것도 없어요. 그저 저 아이들이 잘 커 주니 고마울 뿐입니다" 하고 아이들을 높이고 치켜세우는 부모님이 있는가 하면, 제 자식을 두고, "뉘 집 자식인지 알 수가 없다"는둥, "누굴 닮아서 저 꼴인지 모르겠다"는 둥, 마치 부모인 자기네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데 자식은 마치 돌연변이로 잘못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몰아붙이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실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지옥을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3대 절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남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지 못한다---이 세가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란 곧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마음에 천국이 깃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란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떼놓고 생각할 줄 모릅니다.
어머니가 있음으로 내가 있음을 압니다. 어머니가 곁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만 무엇이건 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의식 하에서만 나의 무엇이 이루어집니다. 홀로, 스스로 선다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곁에 없다고 느끼면 당장에 으앙하고 울어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님만을 의지하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을 믿고 안심합니다. 어머니의 무릎에 오르려는 어린아이를 억지로 떼 놓으면 징징 울면서도 또 매달립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해 줄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해 주리라고 어머니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을 향하여 가지는 사랑은 매우 정신적입니다. 어른들만 정신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어린아이들의 사랑은 어른들의 그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성숙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등에 업혀 자는 것을 보세요.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져 있습니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자리 깔고 편안히 누워 자는 게 낫지요. 무릎 위에 앉는 것은 또 얼마나 불편한지 아세요?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한사코 어머니의 무릎 위로 기어오릅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등에 기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고개가 자꾸 뒤로 젖혀져도, 딱딱한 무릎이 엉덩이에 배겨와도,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시원찮아도---어린아이들은 그 모든 것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최고의 미인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더러 못생겼다고 놀려도 아이들 눈에는 저희 엄마가 최고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이처럼 깨끗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면 세상에 화(禍)가 있다고 했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실망시킨다는 뜻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실망을 주어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모멸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불신(不信)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즘 청소년층의 아이들을 만나보면도 무지 믿음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너무 많은 실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의 책임이 큽니다.
여러분, 맹자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라는 말을 잘 아시죠?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맹자 어머니 본받는다고 8학군 따라 이사한다더군요. 쓸데없는 짓입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학교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맹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있는데 어디선가 돼지 잡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린 맹자가 묻습니다. "어머니, 저 소리가 무슨 소리여요?" "돼지 잡는 소리지." "누구를 위해서 잡나요?" "너 먹으라고……" 맹자 어머니는 아이의 질문에 무심히 대답해 버렸는데, 생각해 보니 큰일났습니다. 맹자가 어머니 말만 듣고, 이제 곧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게 되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맹자 어머니는 궁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돈을 마련하여 아이에게 돼지고기를 사다 먹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어린아이 앞에서 쉽게 내뱉은 말이지만 그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아이에게 정직함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그 마음 말입니다. 맹자 어머니한테서 본받을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삿짐 싸는 데 신경쓰지 말고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에 대해서 책임지는 부모님들이 되십시오.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면, 곧 실망시키면 거기에 따른 벌이 무섭습니다. 실망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반항 체질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이 단순한 만큼 한번 실망하게 되면 좀처럼 되돌리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나으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이 눈이라면 그 눈을 빼버리라, 손이거든 그 손을 찍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부흥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한 교포들 중의 한 분이 좋은 차를 가져와서는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집은 아주 정원이 넓고 큰 좋은 집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을 보면서 속으로 "꽤 성공한 사업가이시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점심 식사 후에 두 내외가 엉엉 울며 하소연을 하지 뭡니까? 그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미국에 와서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했지만 함께 나온 두 아이는 히피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그때 그분들 외에도 또 여러 분한테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돈은 벌었으나 자식들을 다 버려놨으니 억만금을 번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즘 미국에서 유명한 깡패는 마피아족이 아니라 한국인 깡패들이라고들 합니다. 돈 몇푼 벌어놓고 자식 버린 부모들의 우는 모습이란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어린아이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마른 화분에 물을 다시 부으려면 길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쪽쭉 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랍니다. 부득불 마른 화분에 다시 물을 붓기 시작하려면 커다란 물통에다 화분을 풍덩 담가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미 잃어버린 신의를 무엇으로 다시 회복하시렵니까? 이제는 말 한마디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맹세해도 소용없습니다.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를 실족케 한 그 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 : 15)"고 말씀한 사도 바울처럼 다시 낳아야 하겠습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내일입니다. 내일 없는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이든 사람들끼리 이제부터 잘살아 보자고 떠들어보았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까? 무슨 본을 제시해 주었습니까 ?우리는 저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하겠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한 어린이와, 어린아이와 같이 된 어른들이 함께 있을 때, 거기에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마태복음 18장 1절~10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서울 시립 아동병원에는 무의무탁(無依無托)한 어린이가 언제나 평균 3백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중 270여 명은 불구 어린이들입니다. 이들은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어머니들이 그 아이들을 진찰하겠다고 데려왔다가 의사에게 맡겨놓고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립 아동병원의 어린이들은 이렇게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생명들입니다. 불구인 어린이는 입양(入養)도 안 된다고 합니다. 키워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는 아이를 위해 내 청춘 바쳐가며 투자를 하고 싶지 않다고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어머니들로부터 무생물(無生物)인 양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체력이 남만 못하다고 내버리고, 지능이 남만 못하다고 버려지고, 인물이 남만 못하다고 팽개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려진 아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꼭 쓰레기 버리듯 어디에다 갖다 버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버려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내 품에 두고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아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공간적으로는 버려진 것 같지 않으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버려진 아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입니다. 버리는 언동, 버리는 행위---이런 것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시립 아동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들은 그 병원에 근무함으로 해서 크게 우는 일이 두 번 있다고 합니다. 발령을 받아 처음으로 이 병원에 들어섰을 때, 수용되어 있는 어린이들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한 번 울고, 몇 달 후 또는 몇 년 후, 이 병원을 떠날 때에 또 한 번 크게 운다고 합니다. 그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다보면 어느 결에 어린이들과 정이 들고, 떠날 때에는 그 정을 거기에 두고 떠나자니 울게 된다는 것입니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이들을 떼 놓고 떠나자니 애끊는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정에 목마른 그 생명들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 목을 놓아 울어야 하는 이 간호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바랍니다.
세상이 이처럼 어린아이들을 가볍게 여기고 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할지라도 기독교는 분명히 어린 영혼들을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복음이 어린아이들에게 계시(啓示)되는 것을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비록 어린아이들 이 세상 이치에는 문리가 트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에 관한 한은 아무리 지식이 많은 어른일지라도 어린아이 한 영(靈)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의 진리는 어린아이들이 더 먼저 알고, 더 빨리 깨닫습니다.
제가 공부한 훌러신학에 라저스라고 하는 유명한 조직신학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세계가 알아주는 훌륭한 교수님이지만, 주일이 되면 크고 유명한 교회, 유명한 모임의 예배에 참석지 않으시고 꼭 자신이 나가는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하여 초등학교 2,3학년쯤 되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당신같이 심오한 지식을 가지신 분이 어떻게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저런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느냐'고, 어린아이들과 말이 통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교수님은 대답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통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성경은 성경이 아닙니다"---백번 옳은 말입니다.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들이 먼저 안다고, 그들에게 먼저 열려 있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의 순진 무구(無垢)한 마음을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 어른들의 머리보다 높이셨습니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이 어른보다 낫다는 점을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며 "호산나, 호산나!" 하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미워하는 제사장들이 나왔을 때에는 그 위협에 두려움을 느꼈던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끝까지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어린아이들뿐이었습니다(마 21 : 15).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하고 시편 8편 2절의 말씀을 들어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머니는 '쥬이쉬 마더(Jewish mother)'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의 교육 방법과 교육철학은 전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교육학의 석학들이 아무리 머리를싸매고 연구해도 다 이해하지 못하며. 또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쥬이쉬 마더'의 교육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들은 아이들을 서로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잠깐, 우리들의 좋지 않은 교육 유형들을 살펴봅시다. 위협형---'한번만 더 그런 짓을 했다가는…' 하고 아이들을 위협하는 유형입니다. 비교형---'그 애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고, 야단칠 때마다 남과 비교하는 부모들이 많지 않습니까? 나열형---언제 그랬고 언제 그랬고 하면서 잘못한 것들을모아뒀다가 줄줄이 나열하는 형입니다. 또 조소형(嘲笑型)이라는것이 있습니다. 잘 논다,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아이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변덕형---일관성 없는 교육 방법입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언제는 꾸짖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고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상의 유형들이 다 좋지 못한 유형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절대로 비교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시기, 질투, 경쟁심 같은 것들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Einstein) 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자,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 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마 초상집이 됐을 것입니다. 이젠 다 틀렸다고 낙담했겠지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런 성적표를 보고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오히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하고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어머니가 말한대로 아인슈타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은 사람 나름으로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못 알아보고 누구는 어떻고누구는 어떻고 하면서 쓸데없이 남의 집 아이들과 비교하다가 우리집 아이의 재능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교육 방법으로 또 한 가지 훌륭한 것은 그들의 축복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식물을 키울 때에도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다 하지만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아닙니까?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젖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축복관이 중요한 것입니다. '축복관'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에 거기서 군목으로 근무한바 있는 제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주일 아침, 그가한국 군인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축복 기도를 올리려 할 때였습니다. 난데없이 미군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더랍니다. 제 친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 그들 앞에서 축도를 올리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군 병사들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우리 미군 군목님이 마침 출장 중이시라 주일날 축복 받을 데가 없어 군목님께 온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예배 다 드리고 나서 축복기도 드릴 때에 슬그머니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헛드린 것입니다.
복 받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축복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지않는 재산은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도 지위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로서오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유대 어머니들은 동네에 유명한 랍비(rabbi;기독교의 목사와비슷함)가 오시면 어린아이들을 데려가서 '복을 빌어 주세요' '복을 빌어 주세요' 하고 청한답니다. 이것이 저들의 풍속이요 교육방법입니다. 유대 어머니들이 랍비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려가서 복을 비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말합니다. "자, 이분을 잘 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어른이신가……"랍비---뭐, 옷을 잘 입었거나 잘생겨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복을 빌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줄 분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분의 복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어 둬야 한다" 하고아이들을 훈계하면서 어머니가 먼저 열심히 듣는 자세를 보여 줍니다.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랍비로부터 들은 말씀을 어린아이가 끝까지 기억할 수 있도록 틈틈이 가르쳐 주고 다시 상기시키고 합니다. 자, 이러니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훌륭한 어른들을 향한 존경심이 자리잡을 수 밖에요. 그러니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네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존경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귀감으로 삼을 그림자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귀감이라고는 세상 잇속 차리기에 바쁜 부모님의 모습뿐입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이 무엇을 본받고 자랄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의 본을 제시해 줘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상(理想)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한 어린아이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큽니까?" 이 질문 속에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태복음 17장 1절 이하를 보십시다. 거기에는 변화산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세 제자가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예수님의 모습이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엘리야와 모세도 나타날 것입니다. 참으로 긴장되고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 밑에 아홉 제자를 남겨 두시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따로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다른아홉 명의 제자들은 몹시 신경이 쓰였겠지요.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이 질문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을 때, 그때에는 누가윗자리에 앉겠습니까? 베드로입니까? 요한입니까? 아니면 야고보입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가운데 세우셨는데 여기에는 '이 어린아이를 보고 배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보아라. 어린아이에게서 배워라.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라. 건방지게 높은 자리만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낮추고 낮추며 마음을 돌려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서큰 자가 될 수 없다'---이런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너무 큰 자에게 마음을 쓰고,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 그만큼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크고 싶은데 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보다 높은 데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사학자가 말하기를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미친 사람 몇 사람 탓이다"라고 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단지 몇 사람의 시기, 질투 때문에, 그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온 인류가 고생을 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시기, 질투로 가득찬 욕심 많은 몇 사람 때문에 온 국민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기, 질투, 크려고 발버둥치는 그 몇 사람들 틈에 바로 지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 있습니다.
저는 높은 사람도 못 되고 높을 수도 없는 사람으로, 올라가도 내려가도 목사입니다마는, 이 성직 30여 년에 여러 층의 사람들을 가까이 사귀어 왔습니다. 돈 많은 사람도 만나고 가난한 사람들과도 만나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도 만나고 낮은 지위에 있어 고생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 층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색다르게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사귀어보니까 뜻밖에도 하나같이 '촌뜨기' 같더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딘지 모르게 어린아이와 같은 데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는 제가 사귀어 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세상으로 두루 눈을 돌려보더라도 이런 경향은 뚜렷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남들에게서 높임을 받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면 대체로 어린 아이 쪽에 가까운 사람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제일 크다고 여기는 사람,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 스스로 못난 것을 알면서도 잘난 체하느라 억지로 어깨에 힘을 주고 사는 사람, 어떻게 하든 기어오르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영락없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제 속을 못 이겨서 고생들을 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어른이 되어도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고, 지각이 들어도 생각은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지체가 따르고 명성이 따릅니다. 풍진 세상 거친 바람 속에 살면서도, 그 마음이 천진(天眞)을 잃지 않고, 그 생각에 티가 없는 무구(無垢)한 사람---이런 사람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략 중상하고, 그 마음에서부터 썩었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가정을 들여다보더라도 그저 서로서로 낮추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편안합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참 다복한 분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을 만날 때면 "집안이 두루 평안하십니까?" 하고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은혜로요" 하고 그분은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하나같이 어찌 그리도 훌륭하게 키워 놓으셨습니까? 가정교육을 남달리 잘 하셨나 보지요?" 하고 진심에서 물어 보면, 그분은 "처(妻) 덕이지요. 저 사람 덕분입니다" 하고 서슴없이 부인을 가리킵니다. "저는 성깔이 못돼놔서 시원찮습니다마는 다행히 제 아내가 워낙 좋은 사람이 돼놔서요" 하고 부인을 칭찬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인은 또 남편을 칭찬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고마워하고---이런 가정이라면 천국입니다. 어떤 집에 가 보면 내 눈앞에서도 서로를 헐뜯고 허물합니다. "보세요 목사님, 저렇게 형편없답니다 저이가……" 하고 남편을 비방하는가 하면, 아이들 보고는 "애들아 니네들은 애비를 닮지 마라, 제발!" 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가정이 지옥입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한 아이들을 보고 그 부모에게 "자녀들을 참 잘 키워 놓으셨군요" 하고 칭찬을 할라치면 "무슨 말씀을요. 명색이 부모라지만 이렇다하게 가르친 것도 없어요. 그저 저 아이들이 잘 커 주니 고마울 뿐입니다" 하고 아이들을 높이고 치켜세우는 부모님이 있는가 하면, 제 자식을 두고, "뉘 집 자식인지 알 수가 없다"는둥, "누굴 닮아서 저 꼴인지 모르겠다"는 둥, 마치 부모인 자기네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데 자식은 마치 돌연변이로 잘못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몰아붙이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실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지옥을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고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3대 절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남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지 못한다---이 세가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란 곧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마음에 천국이 깃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란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떼놓고 생각할 줄 모릅니다.
어머니가 있음으로 내가 있음을 압니다. 어머니가 곁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만 무엇이건 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의식 하에서만 나의 무엇이 이루어집니다. 홀로, 스스로 선다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곁에 없다고 느끼면 당장에 으앙하고 울어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님만을 의지하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을 믿고 안심합니다. 어머니의 무릎에 오르려는 어린아이를 억지로 떼 놓으면 징징 울면서도 또 매달립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해 줄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해 주리라고 어머니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을 향하여 가지는 사랑은 매우 정신적입니다. 어른들만 정신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어린아이들의 사랑은 어른들의 그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성숙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등에 업혀 자는 것을 보세요.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져 있습니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자리 깔고 편안히 누워 자는 게 낫지요. 무릎 위에 앉는 것은 또 얼마나 불편한지 아세요?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한사코 어머니의 무릎 위로 기어오릅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등에 기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고개가 자꾸 뒤로 젖혀져도, 딱딱한 무릎이 엉덩이에 배겨와도,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시원찮아도---어린아이들은 그 모든 것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최고의 미인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더러 못생겼다고 놀려도 아이들 눈에는 저희 엄마가 최고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이처럼 깨끗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면 세상에 화(禍)가 있다고 했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실망시킨다는 뜻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실망을 주어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모멸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불신(不信)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즘 청소년층의 아이들을 만나보면도 무지 믿음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너무 많은 실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의 책임이 큽니다.
여러분, 맹자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라는 말을 잘 아시죠?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맹자 어머니 본받는다고 8학군 따라 이사한다더군요. 쓸데없는 짓입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학교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맹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있는데 어디선가 돼지 잡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린 맹자가 묻습니다. "어머니, 저 소리가 무슨 소리여요?" "돼지 잡는 소리지." "누구를 위해서 잡나요?" "너 먹으라고……" 맹자 어머니는 아이의 질문에 무심히 대답해 버렸는데, 생각해 보니 큰일났습니다. 맹자가 어머니 말만 듣고, 이제 곧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게 되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맹자 어머니는 궁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돈을 마련하여 아이에게 돼지고기를 사다 먹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어린아이 앞에서 쉽게 내뱉은 말이지만 그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아이에게 정직함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그 마음 말입니다. 맹자 어머니한테서 본받을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삿짐 싸는 데 신경쓰지 말고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에 대해서 책임지는 부모님들이 되십시오.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면, 곧 실망시키면 거기에 따른 벌이 무섭습니다. 실망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반항 체질이 되기 쉽습니다. 마음이 단순한 만큼 한번 실망하게 되면 좀처럼 되돌리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나으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이 눈이라면 그 눈을 빼버리라, 손이거든 그 손을 찍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부흥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한 교포들 중의 한 분이 좋은 차를 가져와서는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집은 아주 정원이 넓고 큰 좋은 집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을 보면서 속으로 "꽤 성공한 사업가이시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점심 식사 후에 두 내외가 엉엉 울며 하소연을 하지 뭡니까? 그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미국에 와서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했지만 함께 나온 두 아이는 히피족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그때 그분들 외에도 또 여러 분한테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돈은 벌었으나 자식들을 다 버려놨으니 억만금을 번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즘 미국에서 유명한 깡패는 마피아족이 아니라 한국인 깡패들이라고들 합니다. 돈 몇푼 벌어놓고 자식 버린 부모들의 우는 모습이란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어린아이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마른 화분에 물을 다시 부으려면 길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쪽쭉 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랍니다. 부득불 마른 화분에 다시 물을 붓기 시작하려면 커다란 물통에다 화분을 풍덩 담가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미 잃어버린 신의를 무엇으로 다시 회복하시렵니까? 이제는 말 한마디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맹세해도 소용없습니다.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를 실족케 한 그 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 : 15)"고 말씀한 사도 바울처럼 다시 낳아야 하겠습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내일입니다. 내일 없는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이든 사람들끼리 이제부터 잘살아 보자고 떠들어보았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아이들에게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까? 무슨 본을 제시해 주었습니까 ?우리는 저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하겠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한 어린이와, 어린아이와 같이 된 어른들이 함께 있을 때, 거기에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장 8절~11절) (0) | 2024.11.15 |
---|---|
은혜의 한계(히브리서 3장 12절~19절) (0) | 2024.11.15 |
오직 예수와 나뿐(마가복음 9장 1절~8절) (0) | 2024.11.07 |
성령 충만의 기적(사도행전 2장 37절~47절) (0) | 2024.11.07 |
빌라도를 향한 증거(디모데전서 6장 11절~16절) (0) | 2024.1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