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강 오벳이 태어남
룻기 4:16∼17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동네 이웃들이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이웃 여인들은 먼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그 다음에 아이를 축복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를 낳은 룻을 칭찬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진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동네 여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1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동네 여인들이 "이가 정말 나오미냐?"고 반가워서 소리칠 때 나오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동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때 나오미가 비어 온 것이 아니라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자부 룻을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아마도 태어난 아기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하고 값진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그 귀한 선물,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었습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품에 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오미와 룻이 낳은 아들 사이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가 낳은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기업을 잇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양육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 2:7,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에게는 부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자기 친딸처럼 양육했습니다. 그것이 양육자의 의무입니다. 나오미가 아이를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자기 아들처럼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런 것은 독특한 경우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보통은 부모가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주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아마 그랬겠지요? "이 아이 이름을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그러니까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친척들과 이웃이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탄생했습니다. 그때 그 친척과 이웃들이 세례 요한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했습니다.
눅 1:57∼59,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랴라 하고자 하더니."
동네 이웃과 친족들이 세례 요한의 이름을 사가랴로 짓자고 제의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독특한 경우이긴 하지만 이웃이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보아스의 조상 중에 베레스가 탄생할 때도 보면 아이를 받던 산파가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창 38:28∼39,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아들이 없어 슬퍼했는데 이제 그에게 새 아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기쁨의 탄성입니까?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오벳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벳이라는 말은 "섬기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섬기다의 명사입니다. "섬기는 자"란 뜻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종입니다. 왜 동네 여인들이 오벳이라 이름지었을까요? 누구를 섬기는 자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당신의 회복자로 당신을 섬기며, 또 늙었을 때 당신의 봉양자로 섬길 종이라는 뜻에서 아이 이름을 오벳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12선지자 중에서 오벳에서 나온 이름을 가진 선지자가 있습니다. 오바댜지요. 오받-야 할 때 "야"는 야훼입니다. 야훼는 여호와입니다. 그러니까 "오바댜"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인 의미로는 나오미의 섬기는 자, 생명의 회복자, 노년의 봉양자로 섬긴다는 의미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구절을 보십니다.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넓게 보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는 종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누구의 아버지가 되었습니까?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니까 다윗은 오벳의 손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삶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병자와 고난 당하는 자를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겠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이웃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서 처음으로 큰 위로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엘리는 나의 하나님, 멜렉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엘리멜렉이 죽었을 때 나오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백성을 왜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시고 거느려주지 아니하시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고통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자가 나를 치셨다고 했던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를 돌보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 가장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려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없이 더 큰 섭리의 손길로 우리를 다스려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가셨을까?" 괴로움 속에서 탄식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성지에 가면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갑니다. 거기에는 높은 산도 많고 깊은 계곡이 많습니다. 그런데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데 산을 넘어가는 길은 한참 멉니다. 그럴 경우에는 깊은 계곡을 통해서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갑니다. 이 길이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계곡에는 늑대도 있고 사나운 맹수도 있지만 그쪽으로 인도합니다. 쉴 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늘 곁에서 함께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 나라에 올라갔습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나간 한평생을 같이 이야기하면서 오손도손 재미있게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마음속에 늘 의아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는 늘 주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일생의 어느 순간에 아주 괴로웠던 때에 왜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지 않아 이 고통을 당하는가, 왜 이 괴로움을 겪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자기가 죽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자기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때의 앞뒤로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는데 그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때는 예수님이 나를 돌보아주지 아니하셨구나."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는데 왜 저때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고 왜 나와 함께 걸어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들아, 나는 결코 너를 저버린 적이 없단다. 그때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저 발자국을 보아라. 네 발자국이냐, 내 발자국이냐?" 자세히 보았을 때 그것은 자기의 발자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모래 위에 난 발자국"이란 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우리를 다스려주시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함께 걸으면서 든든히 서나가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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