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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3): 행 16장 25-34절

by 【고동엽】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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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3)


제 목: 주 예수를 믿으라(3)
성 경: 사도행전 16장 25-34절
설교자: 변한규 목사


같은 본문 같은 주제로 연거푸 말씀을 증거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매 시간 시간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왜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
을까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것은 바울의 찬
송이며 바울의 간증인데, 이러한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냐면 예수님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
를 들었던 사람 있어므며, 또 예수님을 알고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것은 그의 아름다운 간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옥중 간수
에게 다른 것을 전하지 아니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하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전국 교회가 지키는 교사 주일입니다. 왜 우리가 교사주일로 지켜야하는지요? 수고하며 일
선에서 애쓰는 교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 인줄로 압니다. 보다 더 효율적인 교회교
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묵상하기 위함도 이유입니다.



오늘 교사주일에 사랑하는 모든 교 사들 그리고 그 가정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교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오늘같이 뜻깊은 날에 함께 물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교사다운 교사인가?"와 또 한가지는 "교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행 5: 42절이 그 답을 주고 있는데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
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한지라"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교회 교사는
물론이거니와 가정에서도 교사들입니다. 찬양대원들도 교사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도
교사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이 전파되
지 아니하며, 또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을 인생이 확장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도는 성전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쉬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전도하기 위
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세우실 때에 이 사명을 맡겨 세워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전
도자 바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전도 하다가 붙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
수님을 전하다가 받은 상처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핍박을 당하였다든지 환란을 당하였
다든지 손해를 만나던지 하는 일들이 있어야 될텐데 이것을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채워야 될 훈장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전도했고 시간
을 가리지 아니하고 밤중에도 전도했습니다. 게다가 매를 맞아 고통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가 외친 말은 "주 예수를 믿으라!"였습니다. 오늘 유년 주일학교를 봉사하는 교사들
각급 주일학교에서 새벽부터 수고하는 여러 교사들에게 하나님 예비하신 상급이 넘칠 수 있
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열 번을 물어야 할 것인데, 본문
말씀에서 그답을 찾자면은...

첫째 환난의 인생에게 이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본문26절에 "이에 홀연히 지진이 나고 옥토가 움직이고" 했는데 여기 이 절에는 세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지진이 나고 옥토가 움직였기 때문에 첫째, 만물의 이적입니다. 하나님은
경우에 따라 만물을 통해서 이적을 베풀고 이로 인하여 모든 인생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
곤 합니다.



둘째 환경의 이적입니다. 그것은 닫혀진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벗겨졌기 때문
입니다. 우리의 얽매인 모든 것들 사람으로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적을 통하여 종종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셋째 변화의 이적입니다. 간수가 회개하고 가족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변화의 이적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환란 중에서도 꼭 지켜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이적이 일어나는 시간이 밝혀져 있습니다. 본문 22절 "밤중쯤 되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 기도하였고 이적이 일어 났습니다. 기도 없이 이적의 축복은 없습니다.

바울이 실라와 함께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추측해 보자면 그들은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옥문이 다 열리고 전도할 수가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고통중에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였을 것인데, 그래서 모든 쇠고
랑이 부서졌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드리는 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마귀도 낙 망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무서워하는 성도들이 기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기도하 며 울 때에 사탄은 피하여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요즘 개별 릴레이 철야 기도를 열심히들
하고 계시다던데, 많은 은혜와 간증거리도 있다고 듣고있습니다. 주의 크신 은혜인줄로 믿
고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며 성도들은 힘과 능력을
받고 많은 은혜도 받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은 본을 보이셨습니다.



마 태복음 4장을 보면 환란의 때에 기도하시는 데 그 때에 마귀가 물러서며 천사들이 시종드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시편 81:10이 권면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
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기도의 입을 연 것만큼 채워주십니다. 아브라함처럼 기도하면
'여호와 이레' 하나님으로 채워 주시고, 모세처럼 기도하면 '여호와 닛시' 하나님으로 채워
주십니다. 또 언제 이적이 일어났던가요? 본문 25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찬송을 할 때 이적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찬송이 있을 때에
교회가 부흥합니다. 교회에 찬송이 있을 때에 교회에 이적이 일어납니다. 찬송하면 심령의
부흥도 일어나고 또한 기쁨의 물꼬가 되기도 합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에 어땠습니까?


사울에게서 악귀가 물러갔습니다. 괴로울 때, 답답할 때 단방에 듣는 약이 있습니다. 그것
은 바로 찬송의 약입니다. 심령이 괴로울 때면 찬송하고, 병상에서 고생을 하고 고통을 앓
을 때엔 찬송해야 합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
면 이적이 생겨나는 것을 믿음 있는 성도들은 체험합니다. 찬송했을 때에 어떤 이적이 일어
났습니까? 쇠고랑이 다 벗어지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요. 쇠고랑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고통의 쇠고랑, 절망의 쇠고랑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모든 쇠고랑이 벗어지는 이적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 이것은 성도의 삼박자 방법이라고 말 할 수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여!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찬송하십시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 예수를 믿으라."
고 우리의 입에서 전도의 메시지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하십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둘째, 옥중 인생에게 옥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라고 했지요. "열렸네. 열렸네. 옥문이 열
렸네." 당시 옥중 인생들이 밤중에 불렀던 노래였을 것입니다. 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열리는 옥문을 본적이 있습니까? 기독교 사전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그렇다
면은 누가 옥문을 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기 옥문이 무엇입니까? 옥에
갇힌 죄수들이 철창입니다. 인생을 가둔 실존적 두터운 벽입니다. 왜 죄수들이 햇볕은 보지
못한채 옥중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옥문 때문이지요.



그런데 누구에게나 이 닫혀진 옥문이 있을 수 있어요. 불안의 옥문, 질병의 옥문, 죽음의 옥문 말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스러운 절규가 무엇입니까? "나는 괴롭다.", "나는 답답하다." 나는 외롭고 슬프고 날마다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 옥문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경우 환난입니다.
고난입니다. 핍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울과 실라를 위하여 이 옥문을 활짝 열어주
셨습니다. 기도가 있고, 찬송이 있고, 말씀이 있는 곳에 이러한 이적은 지금도 가능한 것입
니다. 인생은 환난입니다. 곤고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이적을 베푸
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죄수들이 도망하지 않았을까요? 영적으로 이 말씀을 풀이 할
수 있습니다. 옥중 심방하신 예수님을 느닷없이 만났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없이 밖에 있는 것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옥안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겼기 때문 일 것입니다. 왜 옥중에 서 도망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군데군데 몰려 앉아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을것입니다. 지난날의 죄상을 훑
어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참회하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옥중에서 아
름다운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옥중에 심방하신 것을 환영하는 죄수들의 모
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어요. 옥중에서라도 근심
걱정 다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 나라 아닙니까? 예수님이 내 곁에 계
시는데 두려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바로 기쁨 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슬 픔이 있습니까? 괴로움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꽁보리밥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 시면 옥문이 열려요.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가 풀려요. 주님이 함께 하시면 슬픔도 고통
도 다 지나갑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와도 겁없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옥문, 그 옥문들이 다 열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어
떤 분인가요?

셋째, 위기 인생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거늘"이라고 했지요. 간수가 소란한 틈바구니
속에서 자다가 깨어났습니다. 깨어보니 옥문들이 다 열렸습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
각하고 '이젠 내 인생이 끝장이구나'라고 생각하고서 그 간수는 검을 빼어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간수에게 엄청난 위기의 순간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때입니다. 바울이 소리쳤어 요.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수가 죄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이 있을 수 있습니까? 경찰관이 죄인 앞에 무릎을 꿇은 셈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왜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는지요? 위기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한 위기를 직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간수 는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외쳤어요. 그리고 살길을 전했어요. 너는
살길이 있다. 너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전했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다
른 것을 전하지 않았어요. 철학을 전하고, 과학을 전하고, 문학을 전하고, 경제를 전하지
아니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왜요?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기쁨, 바울의 소망이요 우리 모두의 기쁨, 우리 모두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칼을 빼어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빵을 먹으라 돈 봉투를 받으라 쾌락이 인
생을 즐겁게 하느니라 이런 메시지를 줄수가 없습니다. 길을 구하는 사람에게 길을 전해야
하고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사모하는 자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4장6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인데 우리
모두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
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니라 이길은 백방으로 막혔 있으나 오직 한 길이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예수님을 사랑한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이런 내용입니 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주시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시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
을 주옵소서 그런데 그가 말하는 빛이 누구며 사랑이 누구며 소망이 누구 였습니까?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시를 이렇게 바꿀수 있습니다. 어둠의 인생에게 예수님이 전
해지고 미움의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전해지고 절망의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전하여 지게 하
옵소서 우리의 간구가 되어져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이시
오 미움을 바꾸는 사랑이요, 절망을 일으키는 소망이기 때문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모 든 영혼들이 한결같이 절규하는 마지막 소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
을 얻으리까? 이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면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당신과 당신
이혼 가정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메시지 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이고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 십니까? 우리
의 기쁨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까? 꿈속에서라도 부를 그 이름 오직예수 오직 예수입니다.
물론 감옥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외치는 나팔이 없는 것 아닙니다. 밤길같은 길가
는 인생들에게 메시지가 없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살펴보십시오. 인생을 즐기려면 춤을쳐 라! 심령이 쿨쿨하거든 팝송을 불려라! 그리고 행복을 만날려거든 쾌락을 즐겨라! 이런 것 들이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믿으라고 하는 위인들이 없지않아 많이 있습 니다.


공자를 믿으라 석가를 믿으라 마호멧을 믿으라 여호아의 증인을 믿으라 다른 복음을
믿으라 그러나 성경을 말합니다. 오직예수 예수님 밖에는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이룬 주신
이름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복
음을 전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메마른 대지에서 비가 내린 것이 축복이고 웃음이
없는 가슴에 웃음을 전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없는 가슴에다 내가 사랑
하고 간증하고 전하고 싶은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 이것이 인생의 최고 행복이 아니고 무엇
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면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내가 걸어가야 되며 내가 노크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텔레비젼을 레디오를 신문을 동원 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에 우리에게 자본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이 나의 자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을 연상해야 합니다. 내게는 은과 금이 없지만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했더니 걷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자본입니다. 그
러나 예수님 들고 테레비전을 찾아가 보십시오 레디오를 찾아가 보십시오 손을 벌리지 않습
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하는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해 해서는 안됩니
다. 돈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궁극적으로 내가 가진 돈은 하 나님에 것입니다 그리고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고는 있는 것이고 돈은 돌고 돌기 때문에 돈이요, 그리고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중성적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돈이 돈주인을 잘 만나야 됩니다. 돈이 선한 사람 만나면 잠언에 있는 말씀같이 인생을 부하는 것이지만 돈이 악한사람을 만나면 디모데전서 6장10절에 말씀같이 돈을 사랑하면 일만악에 뿌리가 된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귀한 보물들은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손에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세계 모든 은행장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모든 재벌가들이 예수 믿는 사
람들이어야 되고 그 주권을 가져야 될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비유 가운데 어리석
은 부자농부 비유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밤에 너의 영혼을 도로 찾는 것이 너의 것이
되겠느냐 내게 주신 말씀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보물 내것이 아닙니다. 부자농부
어리석은 농부에게 배워야 합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려니 네것이 뉘것이 되겠 느냐 모든 것이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소중하게 쓰여질 때에 그 것이 값있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보물을 하늘에 싸둬라 빈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 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인생들이 무엇입니까.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위기를 만난 인생입니다. 저마다 신학적이고 종교적이고 신앙적으로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누가 구 원을 주신단 말이니까. 오직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절규하는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 만이 위기를 만나 간수에게 구원을 주신단말입니다. 우리 함께에 구원찬송을 부르십
시다. 253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을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참 험하니
우리 몸에 매여 있는 그 더러운 죄짐을 하나없이 벗어 놓고 힘써써 들어갑시다 구원으로 인
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길 갑시다.

 
출처 : 전도카페
글쓴이 : 전도자:박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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