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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으라(Ⅱ) : 행 16:25-34

by 【고동엽】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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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주 예수를 믿으라(Ⅱ)
본 문 : 사도행전 16:25-34
설교자 : 변한규 목사

오늘은 온 교회들이 지키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전도자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오월 한 달
동안 우리 어버이들에게 외칠 메시지의 주제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는 주제입니다. 바울이 왜 '주 예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라고 했을까
요? '주 예수를 연구하라, 주 예수를 묵상하라' 할 수도 있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하고
믿음을 강조했을까요? 이 시간 믿음문제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여기 의인도 믿음으로 말
미암아 된 의인인데 믿음은 무엇입니까? 물론 공자를 믿는 것도 석가모니를 믿는 것도 믿
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여기 믿음의 정관사가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란 뜻입니다.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일까요? 죄인들을 구원하시
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믿
는 '그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수님
을 "믿음의 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
라"(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찬양과 기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힌 대로 믿음의 대
상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두 가지입니다. '살아계신 것과 상주시는 자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하는 믿음이요,
그 하나님은 우리의 노고를 묵과해 버리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신 바 되었다가 상주시는 분이
심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열 번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관계 있는 것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믿음의 소중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식과 믿음.
본문 30절에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가 옥중에서 절규하
는 말입니다. 여기 "어떻게 하여야"라는 말은 구원을 얻는 비법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믿
음은 황금보다도 소중하고 영예나 권세보다도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거듭났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믿음으
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출처가 중요합니다. 사람에게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
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장 8절)고 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진 '믿음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념이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신념을 성도들 중
에는 믿음으로 혼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요, 신념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콜럼부스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신념가지고 대
서양을 건넜는지요? 믿음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넜는지요? 신념가지고 건넌 것입니다.

 

스 페인을 떠나기 전날 해변에서 많은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그 어디엔가 육지가 있는가보다. 그러니까 뗏목이 바다로 떠내려오는 것이 아니냐?' 육지
는 또 다른 곳에도 있다고 믿는 신념이 있어서 먼 항해를 할 수 있었고 마침내 콜럼부스는
그 신념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어도 신념이 있을 수
가 있고 그 신념으로도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에 대
하여는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신념의 어떤 총화가 아니고 신념의
어떤 정화된 고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신념은 신념인데 믿음은 하나님께로
부터요, 신념은 사람으로부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알고서 믿게 됩니까?


믿고서 알게 됩니까?' 이것이 지식과 믿음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의 영역의 세
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는 물적 세계요, 또 하나는 영적 세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정복하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정복할 수 있습니까? 물적 세계는
지식으로, 더러는 과학으로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믿음으로만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방법과 신앙적 방법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말
하면서 때때로 세상 방법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인텔리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에 부
작용이 나옵니다. 과학적 방법은 '지식에서 지식으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아무
리 고도화될지라도 믿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지식에서 지식으로만 가면은 지식의 축적은 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종합해서 믿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지식에서 지식으로 가다
가 믿음이 된다고 하면은 많은 과학자 많은 철학자는 자동으로 신앙인이 될 것이 아닙니까?


대학생은 고등학생보다 더 많이 압니다. 고등학생들에 비하여 대학생들은 거의 신앙인이 되
기 일쑤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7절을 잘 살펴보면 "믿음으로 믿음
으로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지식에서 믿음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믿음에'라고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지식이 먼저가 아니고 믿음이 먼저인
지라 바울이 말 할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알고서 믿어지
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만 알게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영접해야 될 분이
지 연구해서 만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게되면 그것이 믿음으로 전진하게 됩니
다. 믿음으로 알게되면 알게되는 지식이 믿음으로 가게 합니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철학자 안셈(anselm)이 말했습니다. '나는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
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상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종종 지식을 말하고 있는데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고 체험
적인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라고 했는
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라고 했습니다. 이 아는 것으로도 영생
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아는 것은 체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고 내가 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헌신하고 싶어하는 신앙적 체험에 의해
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은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하더니 아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요한이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는 지식이 어디서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데서 부터입
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할진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
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한마
디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를 살게 하셨다.'는 사실들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더
알기를 원할진대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
더 알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영적 체
험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적과 믿음.
본문 26절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
이 다 벗어진지라" 기독교는 여기 이적 위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들도 이적을 믿습니
다. 그런데 합리주의,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이적을 부인하는 사상이 교회 안에 아장아장 걸
어오기까지 했습니다. 눈안이라는 사람은 '이적은 신화의 다른 표현이다'라는 말로 이적을
부인했습니다. 자유신학자 니버는 말하기를 '이적은 현대의 이미 받아 들일 수 없는 사실이
다'고 했습니다. 철학자 흄은 '이적은 자연법칙이 맞지 아니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적으로 꽉 차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 기까지 이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점에서 성경 자체가

 이 적이라는 말입니다. 시계는 시계공이 만듭니다. 그리고 태엽만 감아주면 잘 갑니다. 비유컨
대 자연법칙이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역사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필
요하실 경우에는 그 자연법칙 속에 초자연법칙으로 개입하실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적
입니다. 더러는 '이적은 자연법칙을 파괴하는 것인지라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라고 할 때
가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면 어떤 물체든지 밑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물체
를 내가 꽉 잡으면 안 떨어집니다. 이것이 어찌 자연법칙의 파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연법칙보다 더 강한 힘이 개입한 것입니다. 이적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이적이 나타났습니까? 중요한 것 셋이 있습니다. 거짓종교와 참종교를 분별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7장 9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 앞에 갔습니
다.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지팡이를 던져 이적을 행하라 하시고 이적을 시켜 지팡이를 던졌
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많은 술사들을 동원해서 대항하라고 했습니다. 많
은 무리 앞에 지팡이를 던지자 그 많은 뱀들이 꿈틀꿈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 뱀이 그 술사들의 지팡이 뱀들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림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라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이적을 행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보 면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 종교와 대결할 때, 어떤 종교가 참이냐를 판가름 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행하셨는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불을 쏟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
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에 그들을 돕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여기신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데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이제 바로 군대들이 몰려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밀라!"하셨습니


다. 그래서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지게 한 이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성
도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는 이적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리고성
을 무너뜨려야만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일
곱 번 돌라"는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일곱 번 도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적을 보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돕
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증거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행하
셨습니다. 본문에서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쇠고랑이 싹 벗
어졌습니다. 누가 행한 이적입니까? 우리 주님이 행하신 이적입니다. 왜 행하셨을까요?


한 영혼, 간수장을 구원할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
기 위해 구원의 서론으로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의 아들이시다'는 실물교수를 하신 것이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이 메
시야 되심을 증거 하실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적이 드뭅니
다. 이미 이적이 성경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갈라지는 이적을 보려고 하면 출
애굽기를 읽으면 됩니다. 구태여 이적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적을 믿습니까? 성경의 이적을 믿지 못한 사람을 어찌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


까?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적을 생각할 때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십시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적은 마치 자연과 흡사합니다. 이적이 아닙니
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이것이 이적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편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합니다.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죽었는데 살아나다니... 그러나 하나
님 편에서 생각하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그 생명을 취하시고 놓으실
수 있습니다. 개미 한 마리는 자동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자동차를 움직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개미인생과 같습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하
실 수 있습니다. 기사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이 믿음 생활하는데 결단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적을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구원과 믿음.
본문 31절에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누가 주
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십니까? 신사숙녀 부를 것 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여기 구원이 어떠한 구원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는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궁극적 구원입니다. 궁극적 구원은 조직신학에서 '견인'이
라고 말합니다. 견인이라는 말은 한자로 '견고하게 붙잡아 오래 참음으로 마침내 구원을 얻
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열매
를 맺는다는 내용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견고하게 붙잡고 인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참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으사 나의 구원을 마침내는 성취시키신다는 내용입니
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일시적인 타락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타락하여 지
옥으로 가는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전도하다가 보면 '전에 나도 예수 믿었어요.'하는 사람
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 믿었다는 뜻이 아니고 '교회 나갔었다.'라는 뜻으로 보
아야 합니다. 교회 나간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교회 나오
는 것으로 마감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신자지만 속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성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스펄젼이 말하기를 '중생한 사람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과도 같다'


그가 탄 배에도 물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침몰 당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것이 바로 궁극적 구원입니다. 성도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험한 산길을 가는 것이
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얘야 내 손을 든든히
붙잡느라 그렇지 않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은 것
인가요? 아닙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떨어진다고 말했지만
결코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
다. 이것이 견인이요, 궁극적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
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고 했습니다.

여기 비는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비를 받는 식물입니다. 식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채소, 또 하나는 가시엉겅퀴입니다. 비가 내리는데 채소는 좋은
열매는 맺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도 가시엉겅퀴는 아무런 효용이 없습니다. 교회는 두 종
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채소성도가 있고 가시엉겅퀴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쭉정이고 또
하나는 알곡, 하나는 염소이고 또 하나는 양입니다. 그런데 물어야 합니다. 양이 변하여 염
소가 됩니까? 채소가 변하여 가시엉겅퀴가 되던가요? 알곡이 변하여 쭉정이가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궁극적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홍
수심판이 지났을 때에 노아가 방주에서 두 짐승을 날렸습니다. 하나는 까마귀, 또 하나는
비둘기인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썩은 송장 뜯어먹느라고 돌아오지 아니한 것입
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비둘기의 속성이 말해줍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썩은 송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까마귀성도가 있고 비둘기 성도 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반드시 믿음으로 해야될 것들이 교회에
몇 가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
엇이든 믿고 기도한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했습니다. 정말 응답 받고자 하면 믿음
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적을 만나고 하늘이 열리고 질병에서 놓임 받고 불가능한 철문
들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자 우리마음 합하여♬ 늘 찬송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
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
하라(벧전4:10)"고 했습니다. 박수 받기 위한 봉사이면 안됩니다. 하늘상급을 잃습니다.

 

봉 사는 이름 없이 빛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지라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주일새벽마다 교사들을 위해 식사 준비하는 마르다 봉사단들이
봉사 할 때에 모든 것 줄여가면서 좋은 것 잘 저축했다가 지난 토요일날 여기 아름다운 두
거울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다 놓은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치부책엔
바로 이러한 봉사를 기록한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전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창 세기 3장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말하길 "은과 금은 내게 없
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더
니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고 싶습니까? 바울과 실라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전도의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전도했습니다. 전도의 장소의 제한
받지 않고 옥중에서 전도했습니다. 전도의 메시지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 라!"입니다.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할까요?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온 가정들이 우리 부모님
께 전해야 합니다. 여기 간수는 한 가정의 아버지요 남편일 것입니다. 온 집이 믿었다고 했
으니 사랑하는 아내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믿고 아내가 믿어야 합니다. 아내가
믿고 남편이 믿어야 합니다. 부모가 믿어야 자녀가 믿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
다. 가족 복음화를 이루는 가정들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
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
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출처 : 전도카페
글쓴이 : 전도자:박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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