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시절 회상
나는 허물과 죄악이 너무 많은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거의 한평생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니고 목회의 길과 선교의 길로 걸어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 덕분이고
부모님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님들이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심어주시고 물려주신
믿음, 소망, 사랑, 회개, 기도, 헌신, 전도, 봉사의 영적 씨앗과 유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날의 추억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쓴다.
◑첫째, 왕십리에서 개척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는 부족하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와 대학교 1학년 때
왕십리 벌판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며 개척교회를 세운 일이 있었다.
새벽마다 우시면서 회개하시고 2만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호소하시던,
창동교회 김치선 목사님의 영향 때문이었다.
고등학생의 교복을 입고 토요일과 주일마다 왕십리 벌판에 나가서
우물을 파기 위해 전도한 결과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벌판에서, 얼마 후에는 학교의 교실을 빌려서 함께 모였고,
나중에는 천막을 사다가 치고 거기에서 함께 모였다.
그리고 “한양제일교회”라는 간판을 써서 붙였다.
1, 2년이 지나는 동안 80여명의 어린이들과 40여명의 어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비록 초라한 천막 교회였지만 어떤 여성도 한 분은
“우리 한양제일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에요”라고 말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내가 대학생의 교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는
천사의 모습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가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사실 고3 때는 모두 공부에 전념하는데, 나는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다.
나는 언제나 공부는 둘째(우선순위)였고 신앙생활과 전도와 목회가 첫째(우선순위)였다.
나는 평생 공부는 둘째였지만 비교적 잘 했다.
좋은 목사가 되려면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좋다는 한경직 목사님의 조언에 따라서
나는 서울 문리대 사학과에 응시했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합격했다.
역사를 전공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평생 감사하고 있다.
대학교 1학년 때도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하다가,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어느 전도사가 교회를 자기에게 물려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나는 쾌히 물려주고 본 교회인 창동교회로 돌아왔다.
◑둘째, 후암교회에서 교육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 가을에 귀국한 후,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대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하며 교육목사로 목회한 일이 있었다.
목회 초년생이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사역에 임했는데,
많은 젊은이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즉 선교의 길과 목회의 길로 가게 된 젊은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안성원, 김동화, 박선규, 최성호, 이진, 양용태, 한옥희, 탁정희 등이
목사 또는 선교사로 헌신해서 지금까지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박선규는 내가 노방전도하다가 길거리에서 만난 청년인데,
나중에 목사가 되어서 목회와 선교를 아주 잘 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후암교회에서 목회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들을 찾아다니면서 돌아보았는데,
병중에 있던 어린 아들 철원이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후암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사역할 때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한다.
1976년 여름 대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군 옥현리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하던 중이었다.
그 동네의 청년들 20여명이 교회 근처에 와서 유행가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예정에 없던 전도의 대화를 저녁마다 그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목요일 밤 동네 청년들을 교회당에 모아 놓고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를 했다.
전도 설교를 들은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며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다른 청년 하나가 또 앞으로 나오더니 자기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청년 하나는 자기는 청주에서 잘 알려진 불량배인데
자기도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다.
그날 밤, 15-16명의 청년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토요일 그들과의 이별은 눈물의 이별이었다.
그들과의 서신 왕래는 그후 1년여간 계속되었다.
그 편지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김 박사님 읽어주세요. 나에게는 그 기간이 인생 중에 가장 은혜스러웠고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바입니다.
박사님이 설교와 기도하실 적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박사님을 언제 뵈올 지 몰라도 꼭 한번 뵙고 싶은 것이
제 소원이라면 소원이겠습니다.
또 저희들을 잊지 않으시고
공부할 성경교재를 보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8월 7일 박궁래 드림.”
“그간 선생님, 안녕하세요? 떠나는 7일날 보천서 우리는 너무나 섭섭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배운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왜 그렇게 떨리는지 몰라요.
그런데 끝날 때는 말도 잘 나오고 떨리지도 않았어요.
정말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가 봐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어요.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그때서야 똑똑하게 알았어요.
선생님, 가을에 꼭 한번 오세요. 지금부터 부탁입니다. 정말 꼭 오세요.
8월 11일 박정옥 씀.”
“죄책감에 눈시울을 적셔야 하는 나의 마음… ‘주여 이 몸을 용서해 주소서’
하며 나의 발길은 교회로 향한다.
그 동안 인생의 줄달음에 주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후회도 하며,
울어도 보고… 먼젓번 부탁과 동일하게 카세트 공테이프 2개를 보내니
설교를 녹음해서 보내주세요. 1976년 8월 김재옥 서”.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셋째, 영안교회에서 개척목회 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후암교회 사역을 마치고 1978년 6월 22일부터 1979년 2월 18일까지
8개월 동안 영안교회에서 개척 목회를 한 일이 있었다.
영안교회는 한 가족이 1억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여
강남 신사동에 새로 건축한 교회였다.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그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고, 와서 개척목회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본래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가서 그 교회를 섬기기로 했다.
가족과 친척들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한 교회였다.
나는 혹시라도 한 개인이나 가족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원리를 강조하며 목회와 설교를 시작했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하나님 중심적 원리로 일관된 나의 설교가
그들 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것 같아
마음에 기쁨과 감사를 지니기도 했다.
때로 설교자에 대한 지나친 찬사를 들을 때마다 송구함을 금할 수 없었다.
출석 교인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친척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중심 교회로 이끌어가기를 원하는,
인간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믿음도 없는 친척들을 교사, 성가대원 또는 집사로 세우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제지했다.
그리고 나는 더욱 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원리를 강조하며
우리 사람들의 모습은 죽어 없어져야 하고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고 설교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중심적”인 설교가 새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큰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반면,
그들 가족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당회장이었던 최 목사님이 나에게 알려주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결국 교회를 설립하고 시작한 지 8개월이 되던 어느 날,
당회장 최 목사님과 교회 설립자인 이 장로님과 자리를 함께했다.
한 마디로 내가 교회를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담담하고 조용한 어조로
“돌아오는 주일 설교를 마지막으로 교회를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그 때 이 장로님은 내가 주일 설교와 인사를 하지 말고
그냥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이 동요할까 봐 우려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장로님은 최 목사님에게
내가 그렇게 해 주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최 목사님은 말이 없었다.
나는 심각한 어조로 “당회장이 하지 말라고 명령해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라고 잘라서 말했다.
8개월 동안 기도와 정성을 쏟으며 받들어 섬긴 교회와 교인들에게
인사 한 마디 없이 갑자기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 목사님도 나의 말에 동의했고 이 장로님에게 내 말이 옳다고 했다.
이 장로님은 마지못해 “그러면 신학교(총신) 교수 일 때문에 사임하게 되었다”
고 인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세 사람은 헤어졌다.
2월 18일 마지막 설교를 하는 주일이었다.
뜻밖에 박윤선 목사님이 아침 일찍 전화를 거시고
영안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순간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주저했으나 오시라고 했다.
주일 아침 예배드리기 전 성가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에 놀라움과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새 얼굴 5~6명이 함께 성가대원에 끼어 있었고,
태도도 온당하지 못했다.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자 앞 자리에 전에 못 보던 얼굴 15~16명이 앉아 있었는데
무슨 시위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은혜로 나는 마지막 설교를
별다른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침착하고 힘있게 할 수 있었다.
설교 후 장로님의 인사가 있었다.
“김 목사가 신학교 일 때문에 교회를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하므로
당회가 그렇게 하도록 찬성했다”고 거짓 광고를 했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장로님의 말이 거짓이라고 밝히지도 않았고,
나를 변명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다만 너무 갑자기 떠나게 되어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에게
죄송하기 그지 없다는 말과 아울러 두 가지 부탁을 했다.
사실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이 상당수였다.
첫째로 신자들에게 목사나 장로나 어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다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만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당부했고,
둘째로 영안교회는 사람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을 나타내는 하나님 중심적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110여명의 교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눌 때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고,
그들 가족들과 친지들은 매우 곤란해 하는 표정들을 지으면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박윤선 목사님이 전화를 거시고
“김 목사님, 어제 큰 승리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격려해 주셨다.
박 목사님 사모님도 울먹이면서 분함을 토로했고,
박 목사님의 지난날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를 위로해주셨다.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던 한도정 집사님은
전화를 걸고 “아무리 신학교 일이 바쁘시더라도 그렇게 갑자기 버리고 갈 수 있느냐”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분개했다.
화요일 오후에는 교인들 여러 명이 내 집에 찾아와서 줄줄 울면서
“이제 영안교회에 안 나오시면
성경공부라도 계속해서 인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괴로움을 씹으면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배척을 받으시되 변명도 변호도 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으셨던
주님을 더욱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아울러 인간의 강퍅함과 거짓됨에 비해 길이 참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귀중한 경험을 하게 하신 주님께,
그리고 어려운 중에서도 나에게 평안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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