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 5:19-24)
본문에서 보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6가지 원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라’의 신앙이고 ‘말라’의 신앙입니다. ‘하라’는 신앙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본이고, 본질이고,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 가지 해서는 안 되는 것 즉, ‘말라’‘고 하는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성령을 소멸치 말라!’(19)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인도에 순응하고, 따르고, 용납하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멸’이라는 말은 ‘불을 끈다.’는 뜻으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민하게 접근을 했습니다. 아주 무절제했고, 혼잡했고, 은사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광신적인 교회였고, 영적으로 교만해서 결국에는 영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도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감동은 있고, 열정은 있는데 그 대신 의지력이 없습니다. 매사가 감정적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순간 뜨거워지고, 순간 식어지고 해서 자기 조절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깊이 있는 신앙으로 발전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각종 은사도 많았지만 문제도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너무 성령의 활동을 배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이 냉랭했고, 이론적이었고, 매우 논리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뿌리는 있고, 뼈대는 있어서 좋은데, 대신 그 신앙은 힘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형태에서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입니다. 이것은 둘 다 좋지 않은 형태입니다. 지나친 은사 중심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이론적인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실 성령은 그렇게 요란하게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에게 뜨겁게 임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성과 이성에 변화를 주시는 것으로 임하시고, 소리 없이 조용하게 영향을 미쳐서 속에서부터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이 감각에 예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감동을 의식하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 감동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와 사무엘은 한집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지만 똑같은 시간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은 듣고 벌떡 일어났는데 엘리는 둔감해서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는 끝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 살게 되면 이렇게 영성이 무뎌지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와도 무감각해집니다. 느낌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신앙 인으로서는 실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②‘예언을 멸시치 말라!’(20)
이것이 두 번째로 분부하시는 ‘말라’는 신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에 의한 판단보다도 인간적인, 이성적 판단을 우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예언도 무시하게 되고, 나중에는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게 되면 나중에는 예수의 재림 교리까지도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이미 생명을 상실하고, 내용을 모두 버린 껍데기 신앙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에서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자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할/ 그렇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 계획 속에는 경고가 들어 있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비행기로 경고 전단을 뿌렸습니다. ‘1945년 8월 6일 낮 12시에 히로시마 시에 원자탄을 투하하니 시민들은 모두 50㎞ 밖으로 대피하라’고 일주일 전부터 경고 전단을 살포했습니다. 이것은 경고이고 예언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미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그 경고의 글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살길에 대한 안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자신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단을 받아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언을 무시했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 메시지를 읽고 그대로 믿고 대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메시지를 믿었던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정오, 약속대로 예언대로 원자탄이 히로시마 시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뻔쩍 하면서 단 3초 동안에 3천도의 열을 동반한 원자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히로시마시의 30만 인구 가운데 20만 명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핵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③‘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22)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악해지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사람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하고,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악해지는 데는 수고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악해집니다.
사람이 악하게 변하는 데는 환경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맹모 삼천지교가 나온 것입니다. 환경은 사람을 소리 없이 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악은 선보다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선해지기보다는 선한 사람이 악해지기 더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참고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양은 결국 사람을 물들게 하고, 결국 사람이 탈선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특히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절대 필요한 말씀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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