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복음이다.
김기현(수정로침례교회, 침신대)
1. 서론 : 교회가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일차적 선교 대상은 한국교회 자신이다. 한국사회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의 장소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선교가 필요한 피선교지로 전락하고 있다. 이 말은 많은 이들에게 이질감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이미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있었던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으로 돌아와 받은 인상은 복음의 수출국이었던 영국이 도리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선교 대상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곳은 인도 이전에 바로 영국 사회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Christendom)라는 미명 하에 감추어진 복음에 대한 소심함을 털어버리고 담대한 복음 선포를 요청하였다. 뉴비긴이 영국 교회에 대해 내렸던 그 판단, 곧 영국 교회가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고스란히 한국교회에도 적용된다. 한국사회의 중차대한 과제인 통일과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선교와 복음화를 감당해야 할 교회와 신학의 내적 체계는 복음적인가? 한국교회는 복음화되어 있는가? 교회는 교회가 이야기하는 복음을 따라 살고 있는가? 현재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보고 있는가?(엡 3:10)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이방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는가?(롬 2:24) 이 질문은 양자택일의 요구가 아니다. 이 과업 앞에 선 교회의 자기 물음은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에서 ‘죄 많은 이 교회로 충분한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화가 썩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를 변혁해야 할 교회가 부패한 현실이 교회의 난제이다.
이 질문은 남북통일과 민족복음화라는 교회의 내외적 과제를 실천하고 달성하는 일에 있어서 선결 질문이며, 궁극적인 물음이다. 선결 질문이라 함은 한국사회의 복음화, 곧 성서한국의 기치를 성취하기 위해서 먼저 교회가 복음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통일 운동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인 물음이라 함은 교회의 복음화와 통일이 성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제일 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복음화),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통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최고의 명령이다.
먼저 첫 번째 장을 이끌어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한국교회는 선교 대상국인가?” 여기서 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겉으로는 미국 다음의 선교대국이지만, 실제로는 선교를 받아야 할 선교 대상국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 다음 장은 “왜 교회론이 사회 윤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교회는 예수와 바울의 선교 사역의 최종 목적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행동이나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본연의 모습만으로도 세상의 위기를 일으키며, 참여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어떤 교회가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이며, 민족 복음화와 통일을 이루는 데 일조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여기서 나는 십자가를 실천하는 교회와 예수의 성품을 훈련하는 교회를 제시한다.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은 교회와 복음, 곧 전통과 성서의 관계이다. 이 논문의 제목은 교회와 복음을 동일시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교회와 교회의 전통은 ‘노르마 노르마타’(norma normata), 곧 규범에 의해 판단받는 규범이라면, 성경은 ‘노르마 노르만스’(norma normans)이다. 즉 규범을 판단하는 규범이다. 교회는 성서 이야기에 거주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가톨릭처럼 동일시할 수도, 개신교처럼 분리할 수 없다.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책은 그 공동체의 책이며, 그 공동체는 그 책이 말하는 이야기의 공동체이다. 그 어느 것도 상대방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복음이다.
2. 한국교회는 복음화의 대상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미국을 이어 제 2의 선교대국이다. 교회의 선교 열기는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연하다. 사복음서는 모두 선교에 대한 명령으로 마친다. 그런 점에서 선교는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외형적 선교에 대한 의문은 과연 복음의 사명(Mission)에 근거한 선교(mission)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즉, 교회의 민족 복음화 사역은 복음의 정체성을 반영하는가? 이 물음은 한국교회의 정체성 위기에서 비롯된다.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한국교회는 복음화의 원천은 아니라할지라도 복음 증거의 장소인가? 그리스도의 실재가 현실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사회 윤리와 정치적 활동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덧칠한 세속적 이해관계이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발언과 정치적 행위 속에서 교회가 선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1) 현실
최근 몇 년간 (보수적인) 교회의 대 사회적 발언이 부쩍 늘어났다. 발언의 중심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이하 한기총)이 있다. 한기총은 양심적 병역거부,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성명과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한기총의 정치적 참여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보수적인 집단인 한기총이 정치적 사안에 참여하는 것이나, 그 정치적 칼라가 보수적이고 극우적 성향이라는 것은 논쟁과 대화의 문제이지, 비판할 성질이 아니다. 어떤 집단이든지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있으며, 그것을 공적인 광장에서 표명할 수 있다. 또한 어떤 사회이든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이 존재하며, 그 각각은 공존한다. 현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의 정치윤리만 해도, 신원하의 분류에 따르면, 적어도 네 가지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기총의 정치적 행위와 특정한 이념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것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문제는 성조기와 태극기의 결합, 미국 대통령을 연호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에 있다. 이는 신의 이름으로 국가 이익을 합법화하는 것이며, 예배라는 미명으로 드리는 정치 집회이다.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누구나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사회와 정치로부터 무관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거니와 손봉호의 말처럼 교회와 국가는 분리될지언정,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치 참여는 마땅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정치를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치 행위에는 기독교인의 됨됨이가 반영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이 표현되어야 한다. 즉,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 예수의 정치인가? 세상의 정치인가? “교회와 국가의 차이 혹은 신실한 교회와 신실하지 못한 교회의 차이는 하나는 정치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기총의 친미 시위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설교들에서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기는커녕, 혼연일체라는 인상을 받는다. 세상의 이데올로기와 국가 이익을 마치 기독교 신학인양 설교하고, 신봉하는 모습에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변화 -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타락이다. - 시키는 역삼투압 현상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한기총의 정치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인가? 첫째, 혼합주의적 행동이다. 불행하게도 한기총의 정치 행태는 십자기와 성조기를 의식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혼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현 정권에 대한 판단이나 친미 반북과 반미 친북 중 어느 것이 타당한 정치적 입장인지는 제외하자. 다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마치 성경적인 용어와 수사를 동원하는 것은 의심해야 한다. 시대의 양심이 아니라 시대의 이익을 종교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그들의 정치관이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지역적, 계층적, 국가적 이익이 철저하게 투영되어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KBS의 「선교 120년, 한국교회 위기인가」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의 집회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 지지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민족 중심주의와 자문화주의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우상 숭배의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둘째, 지나치게 힘과 권력에 의존한다. 근본주의 정치학의 근본 잘못은 권력과 폭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있다. 대형집회를 통해서 기독교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리고 기독교 인구수에 상응하는 또는 그 이상의 발언권을 얻고자 하려는 것은 기독교가 십자가의 신앙이 아니라 십자군의 종교가 되는 지름길이다. 예수의 정치는 실용성이나 효용성이 아니라 십자가에 근거한다. 무력(武力)의 정치가 아니라, 무력(無力)의 정치가 기독교 정체성을 증거한다. 교회는 ‘도덕적 다수’가 아니라 ‘예언자적 소수’이다.
셋째, 힘과 수에 의존하는 것은 폭력을 통한 구원한다는 신화(myth of the redemptive violence)로 연결된다. 이는 그들의 전쟁관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들에게 폭력은 선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하다. 악과 불의 - 그들이 보기에 악의 축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라크나 북한 - 에 대해서 불가피하게 폭력으로 응징해야 하며, 이는 하나님의 선을 실행하는 구속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기독교와 자국민의 이익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 요소들에 대해서 가차 없는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처리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이 땅 위의 악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전쟁을 사용하신다고 설교하고, 전쟁이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행위로 설교한다. 이는 기독교 문명과 세속적 지배 문화, 자국의 이익과 성경의 세계를 혼합이다. 그 시대의 문화에 충성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혼동하는 것이 결국 또 하나의 포장된 우상 숭배요,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2) 진단
한기총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정치의식은 신학적으로는 콘스탄틴주의이며, 사회적으로는 시민종교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⑴ 신학적: 콘스탄틴주의
이러한 한기총의 정치적 행동 양식은 콘스탄틴적이다. 콘스탄틴주의는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체계로, 기독교의 정신을 세속적 권력을 의존하고 그 방법을 활용한다. 교회와 세상의 혼합, 수와 힘에 의존하는 모습, 폭력의 정당화는 콘스탄틴주의의 정수이다. 이는 세상의 변화나 세상에 대한 교회의 승리가 아니라, 복음의 왜곡이다. “콘스탄틴의 승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승리였다.” 이는 콘스탄틴주의로의 전환이라기보다는 콘스탄틴주의로의 변질이다. 성서의 복음과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동일시하고, 자신의 이해를 신의 이름으로 색칠하는 것은 종내에는 기독교 복음의 왜곡을 초래한다. 쟈크 엘룰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할 두 가지 함정을 지적한다. 하나는 영과 육의 이원론으로 오직 영적인 문제를 내면화하여 골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참여하는 신자의 활동을 기독교화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엘룰이 보기에 세상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선택 가능한 방법 중에서 가장 반기독교적인 태도다. 이는 마치 악마에게 금색 물감을 칠하고 흰 옷을 입혀서 천사를 만들려는 것과 같은 허망한 생각이다.
교회의 선교와 개종은 권력과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기독교 복음의 고유한 능력이 상실한 결과이다. 니체는 파스칼의 내기 이론(wagering theory)을 기독교 신앙을 매력을 상실한 삶에 대한 공포로 유지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이 사람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는 고유한 매력과 그 매력이 주는 감동으로 삶의 방향 전환을 성취하는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과 감동이 사라진 후, 그 자리를 차가운 논리가 차지하고, 공포가 감동을 대신하는 것은 기독교 쇠퇴의 징후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을 좇아 복음을 증거하고, 정치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정치적 현존의 패러다임이자 방편이다.” 초대교회는 단적으로 오늘날의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선교하였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는 초대교회의 선교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드러나는 구원에 매료되어 아주 절로 하느님 백성에게로 몰려든다. 선교활동 때문에 그들이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에게서 발산되는 매력이 그들을 끌어들인다.” 교회가 수와 힘에 따른 지분을 요구하는 세속적 정치의 재판을 찍은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강제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이 아니라, 기독교 복음 본연의 매력과 매혹으로 사회 정치적인 공적 영역의 장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⑵ 사회적: 시민종교
두 번째로 한기총의 정치학은 시민종교의 정치학이다. 시민 종교란, “국가의 역할, 정치적인 목표들에 일종의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념체계이다.” 간단히 말해 국가의 활동을 정치적 차원으로 국한하지 않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후원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종교의 정치화라기보다는 정치의 종교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와 시민 이데올로기와 결부된 종교는 두 가지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믿음체계가 될 위험성이고, 둘째는 하나님과 국가를 혼합할 수 있다. 신원하는 교회가 결코 민족주의라든지 지역주의, 국가주의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한민족과 교회에 의한 세계 복음화’라는 구호는 한국교회가 선교의 열심을 독려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호이기는 하지만, 자칫 한민족과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한국교회와 한민족에게 비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하나님은 한민족과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용하셔야 하는 분으로 인식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의 보편성이다. 시민 종교는 그것이 지지하는 정치 집단이나 사상과 운명을 함께 한다. 이는 교회와 복음의 미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의 손에 맡기는 상상하기 어려운 잘못이다.
뉴비긴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비판의 근거가 계몽주의인지, 아니면 기독교 복음인지를 물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이 카스트 제도의 정당화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가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기독교의 인도 선교의 토대가 복음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상적으로는 계몽주의,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결탁한 행위라는 것과 그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적 물음이다. 기억하자. 우리가 경축해야 할 하나님은 한국인의 하나님이지 한국적 하나님이 아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정치 선교의 모습은 도리어 한국교회가 복음을 들어야 할 선교 대상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3. 왜 교회인가?: 교회는 사회 윤리이다.
왜 교회론인가? 왜 교회가 이 시대의 대답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설적이다. 교회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와 통일의 걸림돌인 상황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복음적 신앙에 대한 가장 큰 적들은 불신자들 - 그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또한 종종 그것을 받아들인다 - 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 교회, 국교회, 성직자 계급들이다.” 문제가 교회이므로, 해결 역시 교회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자 사명이며, 가장 유효한 사회 운동이자 전략이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회적 과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이러한 실존이 부닥치는 위험을 헤쳐 나가는 기술을 제공하는 한 이야기에 의해 형성되는 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가 예수와 바울 선교의 최종 목적이었다는 것과 교회의 회복이 곧 사회 변혁의 전제이자 결론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이다.
예수와 바울의 선교에서 공통점 중의 하나는 교회가 선교의 목적이었다는 점이다. 예수의 사역은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집중하였다. “예수님은 책을 저술하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만드셨다.” 그는 자신의 인격과 가르침, 행동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행동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려는 어떤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상징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사역에 헌신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나게 하고 전달하는 방식으로 가르쳤지만, 기록된 문서는 주지 않았다.” 게다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서는 네 개이다. 그 각각이 통일성 속에서 다양성이 존재한다. 하나가 아니라 네 개의 복음서는 이슬람에게는 기독교 복음의 진정성의 상실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어떠한 문서도 기록하지 않았으며, 단지 예수 이야기를 반복하여 기억하고 말하는 제자 공동체만을 남겨 두셨다. 이는 예수의 의도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창설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현대의 신약학자들은 예수가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을 ‘하나님 나라’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과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역사를 매개하여 전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한 구체적인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만약 우리가 그리고 세상이 그 이야기를 진실하게 듣고자 한다면, 우리가 특정한 종류의 백성이 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최고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인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 자신에게서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 나라가 계속 전승되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주목하여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공적으로 증거한다.
바울 역시 예수의 의도를 충실히 추종한다. 그의 선교 목표는 모든 사람의 개종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15:23)고 말한다. 분명히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회심한 것도, 사회 정치적 문제들이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바울은 “복음을 믿으면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남겼다. 그러므로 그는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다한 셈이다.” 즉 바울은 선교의 사명과 목적을 그 지역에 믿는 자의 공동체를 창출해 냄으로써 마무리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자이자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 세계 가운데서 구현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의 성품과 삶을 이교도의 문화 속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세상과 다른 질서와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삶을 미리 맛보고, 세상을 향해 증언한다. 이러한 “반문화로서의 교회, 즉 대안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세계를 전복한다.” 따라서 교회는 반문화 제자도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가 선교이다.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 빈자에 대한 관심, 그리고 숱한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 생명을 앗아가는 기아와 기근을 위해 구제하기를 즐겨하는 것 등은 “설교의 신뢰성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자체가 복음을 선포하는 필수적인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와 바울을 따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사회 정치적 모든 행동을 포함하는 선교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선교의 결과는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에 달려있다.
2) 교회가 사회 변혁의 전제이자 결과이다.
성서가 말하는 선교의 목적이 교회 공동체의 설립에 있다면, 그 교회의 1차적인 사명은 무엇인가? 교회의 사회 정치적인 발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기존 사회를 더 정의롭고 살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대하여 새로운 대안 사회가 되는 것인가? 교회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주된 사명인가? 교회의 구호인 사도행전적 교회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저항이나 권력 획득을 통해 교회 밖의 정치적 구조를 개혁하려 했다는 증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누가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 - 교회 의 형성을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사회 개혁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 나은 민주주의 사회나 그 사회를 위한 사회적 기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따라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증언함으로 교회 자체가 세상을 향한 정치적 대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강화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 사회가 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세상을 변혁하여 더 좋은 나라를 지향하면, 교회는 콘스탄틴주의로 침몰한다.
그렇다면 교회와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을 마치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듯이 세상의 도덕적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으로 흔히 오해한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과의 차별성을 보이라는 요구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세상을 선하게 하는 것, 이 양자를 혼동한다. 결코 세상을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신자는 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수는 있다.” 우리는 창조의 영역을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구속하는 자가 아니라, 맛을 잃어버린 교회를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구속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교회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말은 고상한 문화적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거나, 인간을 행복하게는 못해주어도 최소한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선교의 대상이 된 교회에게는 먼저 교회됨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예수 이야기에 신실한 교회만이 복음에 신실한 정치를 한다. 도덕적이고 정치적 행동은 성품의 반영이다. 교회가 사회 문화의 변혁자가 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이 교회가 세상의 논리와 메커니즘을 벗어나야 한다.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제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제 맛을 내는 소금이고, 산 위의 동네가 감출 수 없는 빛이라면, 우리는 선지자적 비관주의에 기초한 의무와 사명으로 사회 참여와 비판을 전개하지 않게 된다. 이미 교회 안에 실현된, 그리고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분명한 실재를 바탕으로 우렁찬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안이다. 그러므로 변혁된 교회를 전제하지 않는 교회의 정치는 본래적인 “교회의 정치학과는 전혀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할 뿐이다.”
교회의 우선적 과제가 사회 변혁이 아니라면, 교회는 사회가 안고 있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이슈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가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는 것 자체가 세상에 대한 도전이며, 대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대치될 수 없는 봉사는 아주 간단하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는 그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교회가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실천할 때,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 계시에 대한 신실한 응답이며, 세상을 변혁한다. “기독교 고유의 삶의 방식을 창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통합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안에서 창조적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는 말은 사회 변혁의 과제를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부합하며, 효과적인 사회 전략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윤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 윤리이다.”
4. 어떤 교회인가?: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
위에서 우리는 교회가 사회윤리이자 선교이며, 교회 회복이 사회 변혁의 전제라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어떤 교회가 되는 것이 사회 변혁일 수 있는지에 관해 대답해야 한다. 그 대답은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 또는 반문화적 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이다. 교회가 천국의 보증으로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보게 하는 시식이요 전채요리가 되는 것은 세상의 위기를 촉발한다.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답변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질문거리를 양산한다. 이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도덕’도, ‘순응의 윤리’도 아니다. ‘대조의 정치’이다.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빛으로 어둠에 처한 세상과 극명히 대조될 때, 악으로 악을 더하는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드러낼 때, 높아지기 보다는 도리어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을 때, 교회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행 2:12, 표준새번역)라고 질문을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며,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행 2:37)라며 세상이 한번도 의심해보지 못한 자신의 타당성 구조를 반성하고 회심하게 된다.
1) 십자가를 실천하는 교회
십자가의 정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교회가 세상에 질문거리가 되고 존재 자체가 도전이 된다. 신자의 삶의 유일한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콘스탄틴적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의 규범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규범은 오로지 개인과 그 내면의 세계에 국한된다. 이는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두드러지는데, 예수를 비정치적 그리스도로 묘사한다. 예수의 규범성을 약화시키는 여러 시도를 소개하면서 요더는 예수는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규범임을 강조한다. 예수의 정치성 강조는 보수주의를 향해, 유일한 규범은 자유주의를 향한 발언이다. 보수주의가 예수를 개인과 내면의 구주로 제한하는 것과 달리 예수가 철저히 정치적이다. 또한 자유주의가 예수의 삶을 가능한 정치적 선택의 한 사례로 축소하는 경향에 반대하여 예수의 십자가는 당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적실하다. 예수 당시 그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고 들은 이들에게 예수는 사회 정치적 윤리적 대안이었듯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며, 교회가 반드시 선택해야 할 규범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치적 선택의 포기가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사회-정치-윤리적 선택을 제시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단지 교회 내부만이 아니라 사회 역사의 현장에서도 적용하고 실천 가능한 윤리적 담론이다.
예수의 정치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속죄의 수단으로 제의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모반과 정적주의(quietism) 양자에 대한 정치적 대안의 시발점”이다. 이 십자가의 사회적 의의는 사회적 불일치이다. 세상이 꺼려하고, 심지어는 예수를 살해함으로 제거하고자 했던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상 속에 드러내는 사회적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반역의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순종한 대가였다. 그것은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한, 증오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용서와 의로움과는 무관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용서를 그 육체 안에서 드러내기 위한 고난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최후의 수단으로도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유혹을 거절한다. 더 적은 악으로 더 큰 악을 제압할 수 있으며, 그것을 최후의 수단으로 받아들여 신학적이고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콘스탄틴주의와 정당한 전쟁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우리 교회들은 이를 거리낌 없이 수용한다. 최근 KBS의 「선교 120년, 한국교회 위기인가?」라는 프로그램을 종교 탄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교인들을 동원한 집회를 개최하고, KBS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모색하는 모습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과연 그것이 종교 탄압인가?’ 둘째, ‘설령 그것이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라고 하더라도, 한기총의 대응 양식은 십자가의 모범을 따르고 있는가?’ 여기서 나의 주 관심은 후자에 있다.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기독교의 소아병적인 모습도 안타깝지만, 동시에 ‘약함의 십자가’가 아니라 ‘강함의 십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복음에 역행한다. 복음화는 “우리가 선하다고 믿는 목적을 위해 역사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임, 그리고 그 증언이 함축하는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와 다른 삶의 양식을 증언한다. 즉, 십자가의 삶의 양식이다. 국가와 강제와 폭력을 정당하게 동원한다면, 교회는 비강제와 평화적 수단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한다. 초점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정당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정당한 수단마저도 포기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당연히 행사하실 수 있는 권한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였던 것처럼, 때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은 그 폭력과 강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예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마땅히 추종해야 할 규범이자 모범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룬 삶의 양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서해석학 공동체이다. 성서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신자의 삶만큼이나 좋은 해석/학은 없다. 교회와 신자의 삶은 성경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나와 신자의 삶은 예수와 성경에 대한 해석이요, 예증이다.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교회와 신자의 삶은 다원적 사회와 무신론적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실천적으로 정당화한다. “진리는 진실한 삶을 요구한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 윤리의 정당화는 과학적 증거나 논리적 타당성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는 성도의 삶에 의존한다. 만약 기독교의 진리는 그 본성상 실천과 순종을 요구한다.(마 7장) 따라서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신실함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그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내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훈련」에서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다시 말해서 2000년의 역사적 간격과 시대적 거리를 넘어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뉴비긴과 함께 다음과 대답해야 할 것이다. “유일한 해답, 곧 복음의 유일한 해석은 복음을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 이루는 회중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2) 예수의 성품을 훈련하는 교회
교회는 예수의 성품, 곧 평화를 훈련하고 구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통일운동가 김창수에 따르면,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통해 내용과 과정을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통일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간 독재 시대에 적절한 구호였고, 지금은 그 통일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건의 간단한 개요는 이렇다. 비인격적 대우와 구타를 참지 못한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선원 11명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중국 동포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끔찍한 살인 사건을 일으킨 피의자들에 대해 광범위한 동정을 탄원서를 통해서 나타냈다. 그들의 반응은 그만큼 중국의 동포와 한국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다는 반증이다. “조선족 사기 피해 사건,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은 관용을 실천하며 더불어 살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따라서 그는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연습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통일은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연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비극을 지양하고 공존을 연습할 수 있는 최고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물론 현재 교회는 일치보다는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불일치라는 스캔들은 우리가 사회적 과제를 인식하면 할수록 상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자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며, 신자는 그 나라의 백성이다. 우리는 예수를 세상에 반사한다. 그것이 성도의 사명이자 과업이다. 이는 훈련하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도 용납되고 인정을 받는다. 예수가 원했던 교회 공동체가 ‘페스카마호의 비극’을 중지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교회 안에서는 “받아들여진 사람이며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는 거기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교적으로 완전한 가치가 없는 양으로 자격이 박탈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구현하는 이 공동체 안에서 어떠한 억압이나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된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단지 어리기 때문에, 그리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인종적이고 민족적 차별도, 남자와 여자와의 성차별도 없고,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사회적이고 신분적 차별도 없고,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곳이다.
이러한 공동체와 삶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품(character)이 있어야 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는 이에 선행하는 물음, 즉 ‘나는 어떤 이야기 또는 이야기들의 부분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도덕적 행위는 행위자의 도덕적 정체성의 예시이다. 우리의 윤리적 행동의 출처는 공리주의자처럼 ‘수’라던가, 플레처의 주장처럼 외적인 ‘상황’이나, 라인홀드 니버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니다. 이런 윤리학은 도덕적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각 행위자의 역사와 이야기 속에 반영되고, 역으로 그 역사와 이야기에 의해 형성된 성품을 간과한다. 우리의 행동은 행위자의 성품을 반영한다. “성품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행하는 것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그러면 신자의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바로 예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다. 모든 실천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면, 응당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출처이자 결정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 성품은 자동적으로 습득되지 않고 노력해서 획득해야 한다면, 교회 공동체가 훈련의 장소가 된다. 예수 이야기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예수의 성품을 수련하게 된다. 물론 개인과 공동체 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성품은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맥클랜던(James Wm. McClendon, Jr)은 윤리학은 “공동체 안의 성품 윤리학”(the ethics of character-in-community)라고 지칭한다.
신자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다. 알란 크라이더(Alan Kreider)는 교회 안에서의 삶을 평화를 만드는 자의 반사행동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평화교회로 알려진 메노나이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그림을 통해 설명한다. 더크 윌렘스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내는 그림이다. 17세기경 네덜란드에서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자 이를 피해 달아난다. 마침 자신을 추적하던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다. 더크는 도망하는 대신에 그 사람을 구해내고, 그 결과로 체포되어 순교를 당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크라이더가 주목하는 것은 더크의 반사 행동이다. 얼음 속에 빠진 사람은 빨리 가라앉고 신속히 구조하지 않으면 생명을 구할 수 없다. 추적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주 잠시 머뭇거릴지라도 즉각 행동해야 구조할 수 있다. 완전히 순간적이고 반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더크로 하여금 그런 반사행동을 하게 했을까? 그는 어떻게 원수의 필요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행동과 습관을 개발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크라이더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를 믿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정과 다른 하나는 그가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서 찾는다. “그러한 반사 행동은 더크에게는 개인적으로도 가능했지만, 주로 습관적으로 몸에 익히고 그런 규율을 지키는 사람들의 집단을 통하여 형성된다. 필자는 그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원수를 사랑한 특정한 종류의 교인이었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행동 그대로 반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크라이더는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당신을 만드는가? 누가 당신의 반사행동을 훈련시키는가? 당신의 교회인가? 가족과 친구들인가? 아니면 TV 광고, 영화, 화장품인가? 만약 그 훈련의 주체가 교회라면, 당신의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길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서 당신의 일상생활에서처럼 개인적인 반사행동을 구체화하도록 도와주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반사적으로 뒤따르는 행동을 연습하고 지금 행하고 있다고 말이다. 교회는 예수의 성품을 훈련하는 공동체이다.
5. 결론 : 교회가 대답이다.
이상에서 나는 교회가 복음화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교회다움의 회복이 중요한 사회 전략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십자가의 정치를 실천하고, 평화의 성품을 훈련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타당성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교회가 선교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재 시점에서 교회다움의 회복은 민족복음화와 통일의 전제조건이자 결론이다. 출발점이며 동시에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이야기를 반복하고 재현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사회적 발언은 복음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언제나 들었던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이야기가 아닐까? 변혁된 교회를 전제하지 않는 교회의 정치는 본래의 됨됨이를 투사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 회복은 전제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교회가 사회적 현안에 대해 침묵하고 무관심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회와 정치로부터 무관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손봉호의 말처럼 교회와 국가는 분리될지언정,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치적 영역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가장 복음적이며 정치적인 대안, 제3의 길을 제시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 선택은 콘스탄틴의 십자기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교회는 십자가를 실천하는 행동이 반사적 행동이 되도록 신자의 성품을 연마하는 수련 공동체이다.
교회는 소극적으로 콘스탄틴적 유혹과 세상과의 내적인 결탁의 사슬을 끊어야 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정체성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사회 정치적 참여가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추정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치러야 할 투쟁은 교회와 세상의 대조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회가 좋은 나무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교회가 자신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지 못할 때에는 국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용될 위험도 있다.” 좋은 교회만이 좋은 정치를 한다. 세상을 닮은 교회의 사회 참여는 세상도 원하지 않는다. 일반 사회가 교회더러 교회다움의 맛을 요구하는 비통한 상황에서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모토는 세상과 통합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안에서 창조적 힘을 발휘하느냐의 여부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적극적으로는 교회가 사회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구조와 질서는 폭력과 강제에 근거한다. 교회는 은혜와 더불어 평화의 공동체가 되는 것 자체가 교회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한순간 조국이 잿더미로 주저앉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빠져있다. 지난 세기의 화두가 ‘민주화’와 ‘통일’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이다. 전쟁의 칼날이 민족의 목을 겨누는 절박한 시점에서,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산 위의 도시와 소금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타락에 일조하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 평화의 나라가 되는 것이 이 민족의 미래와 장래를 보장하는 일이며,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길이다. 교회가 복음의 정치적 현존의 패러다임이자 방편이 되는 것이 한편으로 한국사회의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 주님의 명령과 요청에 순종하는 길이다. 세상 가운데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인 은혜와 평화를 따라 사는 교회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자 혁명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다. ‘저항’과 ‘순응’ 사이에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교회와 신자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대조’의 길이 있다. 이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고, 민족을 복음화하고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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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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