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감사 (신 16:13-17)
본문은 추수감사절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의미가 갈수록 퇴색(退色)되어져 가고, 형식도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혀진 절기를 다시 찾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 있는 절기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잊어진 계명이 “감사하라”는 계명이라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하라”는 계명은 적극적인 계명으로서 감사해도 되고 감사안해도 되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감사하라”고 명령하였기에 감사하는 성도는 은혜가 없는 분입니다. 성숙한 성도님들은 감사할 수밖에 없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속의 기억입니다. 영어의 “생각한다”(think)와 “감사한다”(thank)라는 말은 본래 같은 어간에서 나온 것은 것으로서, 깊이 생각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생각이 욕심 품으면 기울며 불만과 다툼이 생깁니다. 생각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면 감사와 만족이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① 회고하고 ② 살펴보고 ③ 비교하고 ④ 쳐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감사는 인간의 언어 중에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고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① 감사를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 ② 감사를 하되 옅은 감사 곧 형식적인 감사를 하는 사람 ③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감사(感謝)는 모든 절기의 핵심이요, 모든 제사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 감사가 없는 찬양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에게 점차 잊혀져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 14절,15절에서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온전한 감사는 온 성도님들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에서 본문 14절에서 ?연락하라?는 말은 기뻐하라 혹은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초막절?이라고 함은 칠일동안 광야에 가서 우리 조상들을 광야에서 먹이시고 도와주시고 입히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수장절?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또한 첫 이삭을 거둠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절기의 축제에 참여하여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15절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추수의 절기는 언네나 누구에게나 기쁜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만 기뻐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시고 즐겁게 하시려고 감사절을 주신 것입니다.
일년 내내 밭에 나가 일한 농부에게 있어서 추수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입니까?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좋은 날씨를 주셔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벼를 재배하여 쌀을 추수하기까지는 여든여덟번의 손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쌀을 ?팔십팔?이란 뜻으로 미(米)자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쌀을 재배하는 농부의 손이 적지 않게 수고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농부이상으로 추수의 기쁨을 위하여 수고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해에는 농사가 부진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감사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인 하비 콕스 박사는 세 가지의 유형의 교회에 대하여 논하였습니다. 교회는 ①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와 ② 감사와 축제의 시편의 교회, ③ 그리고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계시록 교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출애굽기의 교회, 계시록의 교회의 모습은 가지고 있으면서 왠지 시편의 교회 모습이 결여된 듯 합니다. 그는 개신교의 예배 요소 가운데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을 다 수용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배와 신앙생활이 기쁘고 즐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감사와 축제의 요소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축제로 나타납니다. 추수의 감사는 축제요,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인 절기인 것입니다.
인도의 한 어머니가 감사절의 감사의 예물을 들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떤 뜻에서 예물을 드렸는지에 대하여 물었더니, 그 어머니는 아들이 아파서 열심히 기도한 대가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아들이 다 나왔냐고 물었 보았더니 오히려 아들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죽었지만 이제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으니 감사해서 감사 예물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감사의 조건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고백과 같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논밭의 식물,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송아지 등에 감사의 근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감사의 근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가 될 뿐만 아니라 상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살전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4:4에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되, 감사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무엇 보다도 추수감사절 예배를 오늘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와 신앙생활에 있어서 시편의 교회처럼 축제의 분위기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절은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14절)
본문 14절에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감사절을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즐기는 절기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절기도 혼자 즐기는 절기는 없습니다. 우리의 식솔뿐만 아니라 나그네와 소외된 우리의 이웃까지도 우리와 함께 즐거워해야 할 절기의 동참자들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이웃과 함께 나눌 때에 진정한 기쁨이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입장에서 보아도, 농사를 지을 때는 내가 짓지만 수확을 할 때는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농사는 짓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위하여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추수를 할 때에 곡물을 다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고 하십니다(레19:9-10)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옛날 농사를 지을 때 같으면 남겨 놓아야 할 것들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얻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어야 합니다. 수고는 내가 하지만 모두가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 내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확에는 권리와 더불어 의무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확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망각(妄覺)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수확한 것도 함께 나누어야 하며 추수의 기쁨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놓았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었으며, 내 것을 가지고 함께 즐기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경건을 지나치게 정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참된 경건이란 “고와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1:27)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은 참된 경건이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모습입니다. 감사의 절기에 우리와 함께 감사할 대상을 찾아 감사를 나누는 것은 감사절의 중요한 의미인 것입니다.
추수의 절기를 맞이하며 우리의 농부의 수고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농부들의 수고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라면 공산품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편의 시설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제일 먹기 싫은 음식이 김치라고 합니다. 피자나 햄버거가 자기들의 음식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쌀과 김치를 먹어야 건강합니다. 어떤 학자는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나라의 풍토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 나라 토속의 음식을 적어도 한 주간에 세 번이상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 나라의 음식이 그 나라에 사는 사람에게는 좋은 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간에 추수감사절은 수확의 기쁨도 함께 나누고, 수확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도시 사람들은 농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17절)
본문 17절에서 “각 사람이 네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모든 남자는 일년에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여호와께 반드시 나오되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남자는 20세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절기를 지킵니다. 그들이 성전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예물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불경건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것은 옛날 성전에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예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힘대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드?라는 말로 ?능력껏, 재력껏?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감사절의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되 능력껏 드리는 것입니다. 이 교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교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고후 8:12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정성껏 드려야 하며, 없는 것을 억지로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잘못이며, 드릴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드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연보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색함이나 억지도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추수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우리가 즐거워 하는 만큼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시고 영광이 됩니다.
옛날 상국(上國)에 사신이 갈 때에는 반드시 빈손으로 가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며, 예물을 따라 상국의 기분을 좋게도 하고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예물의 질을 보지만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의 감사의 마음과 정성을 보십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귀한 예물입니다. 아무리 비싼 것을 드려도 정성과 감사가 담겨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쁜 예물이 되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값싼 예물이라고 할지라도 정성과 감사가 담겨져 있으면 하나님께 기쁜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반드시?,?힘껏? 예물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크면 드리는 것도 클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이 적으면 드리는 것도 적을 것입니다. 우리는 1:9의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10명의 문둥병자는 주님께 다함께 고침을 받았지만 주님께 사례하는 문둥병자는 사마리아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러기 이 병자는 육체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의 필요가 아니라 우리편에서의 필요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지 않아도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므로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부요 하게 되고, 우리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영국의 제상이었던 크롬웰은 다음과 같은 식사기도를 남겼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음식이 있어도 식욕이 없고, 어떤 이는 식욕이 있어도 음식이 없는데,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기에 감사 합니다” 감사의 조건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롬웰이 우리가 매일 세 번씩 하는 식탁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은 것과 같이 가장 가까운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좋은 환경에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도저히 감사할 수 악조건 가운데서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 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내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떠난 영국에서부터 미국의 뉴잉글랜드 록키 연안에 닿을 때까지의 오랜 여행 동안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 뉴암스테르담에서 승선한 두척 중 하나인 ?스피드웰?호는 해안을 멀리 떠나기도 전에 부서졌다. 그들은 배를 다시 돌려야만 했고, 여전히 항해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메이플라워호로 몰려들어 그 배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 항해 내내 그들은 갑판 밑에서 지내야 했다. 그들은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했다. 위생 상태와 통풍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악취가 났다. 새로운 땅에서 처음 추수를 한 후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냈을 때는 그들의 거의 절반이 죽었다.
우리는 그들이 견디어 냈던 고난을 모두 인정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부터 그 춥고 돌 많은 뉴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플리머스에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내기까지, 시편이 그들의 기도하는 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 그들이 고향에서 배를 타고 떠나올 때, 그들은 그 앞에 있는 어떤 일이 있든지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다. 배 밑창에서 그 항해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불렸다. 그들은 위험과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들의 영은 감사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감사했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리고 이것과 관련하여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수확할 수 없으며,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없으며, 수확의 기쁨이 없기에 감사할 수도 없다?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받으시는 것을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수확할 수 없으며, 결코 감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추수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진정한 기쁨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 드릴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널리 있는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고, 일년 중에 추수 감사 주일을 하루나 추수의 계절뿐 아니라, 모든 계절이 감사의 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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