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는 감사 (눅 17:11-19)
오늘은 한 해 동안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Thanksgiving Day)입니다.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은 시작은 미국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교인들이 낮 설고 물 설은 개척지에서 갖은 풍토병과 각종 생활의 질고를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해 농사를 수확한 후 얻은 새 땅에서 첫 결심에 감사하여 드린 감사 기념 예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교단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여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처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이 복되고 즐거운 날에 여러분을 초청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추수감사의 기쁨을 함께 이웃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처럼 참 좋은 날에 여러분을 초청하여서 함께 기쁨을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께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있는 신앙은 그 신앙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와 환경 속에 계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환경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려울 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선한 사람답게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훌륭한 설교가이고 목사인 [스펄젼]이 “촛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전깃불 주시고, 전깃불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별빛 주시고, 별빛 은혜를 감사하면 달빛 주시고 달빛 은혜를 감사하면 햇빛 주시고 햇빛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영원한 어둠이 없는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주신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감사하는 마음이 자꾸 자라납니다. 이러한 사람은 바로 감사가 넘치는 인생입니다. 바울은 골 2:7에서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에 굳게 서서 모든 일에 감사함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 감사하지 못한 사람들은 큰일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평불만 하는 마음을 갖고 살면 점점 더 불평불만 하는 마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 인생은 불행합니다. [존 밀러]가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에 달려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비록 불행한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행복한 조건들을 찾아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아픔 속에서 속에서도 우리가 건강하게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거리를 찾아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 감사해야 진짜 감사입니다. 어려울 때 한번 감사하는 것은 일이 잘 될 때 백 번 감사하는 것보다 가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실패를 잘 요리하는 인생은 성공보다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고상한 실패는 수많은 저속한 성공보다 더 소중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 더 많은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교훈을 얻습니까? 그때 바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화) 얼마 전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의 저자 [레나 마리아]가 내한 공연을 했고, 이를 편집하여 텔레비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양손이 없었고, 한쪽 발도 짧았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발로 글을 쓰고,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십자수도 놓았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수영과 운전도 하게 되었고 장애인 올림픽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특히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아름다운 찬양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란 사실은 그녀는 자기를 장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르게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천사의 표정을 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진정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희망을 노래해야 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회는 점점 어두워지고, 또 어려워지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악순환(惡循環)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를 열립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은 꽃밭이고 불평하는 마음은 가시밭입니다. 감사는 모든 미덕의 어머니입니다. 그러기에 감사가 진정한 감사가 없는 마음은 병든 마음입니다. 진정한 감사가 없는 신앙은 병든 신앙입니다. 오늘은 정말 감격스럽고 기쁨의 날입니다. 축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결산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해를 결산하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우리들은 마음껏 감사하고, 마음껏 감격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 아무런 감격(感激)과 감동이 없다면 그 사람은 마음이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감사도 또한 병든 것입니다. 그래서 [섹스피어]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를 가지는 것은 독사의 이 보다도 더 날카로운 무서움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감사는 결코 형식적인 겉치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사가 종종 형식과 제도 속에서 질식을 당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만족보다는 불만이 더 팽배해 있습니다. 이것은 기대치가 만족되기보다 기대치에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좋은 물건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이 없으니 진정한 감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사의 꽃밭을 회복하는 길은 없습니까? 감사의 젖줄을 풍성하게 할 길은 없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감사의 젖줄을 풍성하게 하고 감사의 꽃밭을 다시 일구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열 명의 문둥병자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불행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고침을 받고서 행복해졌지만 그 행복을 주신 주님에게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자신에게 주신 행복을 어디에서 얻어졌는지를 바로 깨닫고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께 돌아와 감사함을 온전히 표현했습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사마리아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를 받아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더 큰 은혜를 받는 감사는 어떤 감사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마음속의 기억이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영어에서 [감사]라는 말과 [생각]이란 말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삶에 대해서 생각을 깊이 해보면 감사할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한 때에 몹쓸 병에 걸려서 비참한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의 은혜로 자기 병이 나은 것을 알고 가다가 주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무엇을 기억하면서 감사했습니까?
첫째, 예수님을 만난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했습니다.(12절)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12절) 우리가 가장 감사할 일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참으로 고독한 병입니다. 이 병은 인간으로 절망으로 만드는 병입니다. 그러기에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멸시 천대를 받으며 자기 자주권(自主權)마저 박탈당하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둥병자들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아무도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싫어하고 멀리했지만 오직 주님께서는 이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여기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처럼 더 절망적이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문둥병자와 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자들을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를 만나주시고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을 기쁩니까? 얼마나 기쁩니까?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지요.
만약 암에 걸린 환자가 그 분야에 최고의 권위자를 만나 병을 고침을 받았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안내자를 만나서 도움을 받았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까?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일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 인간은 역부족인데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그러한 그분이 만나 주셨는데 평생토록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를 나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의 부르짖는 말에 귀를 기울어주시고 응답해주신 일을 기억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본문 13,14절에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문둥병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실 뿐만 아니라 응답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 자신의 연약한 환경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커녕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주시고 얼굴을 향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일을 불문하고 외면하지 않으시는 응답하여 주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까지 어떤 일에도 절망하지 아니했고, 어떤 위험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외로워하거나 고독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할렐루야' 찬송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주님께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우리가 힘들어 지쳐서 부르짖을 때에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놀라운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편 103:13에 보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어려운 일들을 다 해결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사야 49:13에 보면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될 때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함께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주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응답해주셨습니다. 사람을 의지했을 때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기도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땅을 보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실력을 보고 열등의식(劣等意識)을 가지지 말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인생을 저주하면서 스스로 생명을 끊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갑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시편 50:15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119:153에 보면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건져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시편 기자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문둥병을 깨끗하게 치료해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했습니다.(14절)
본문 14절에서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깨끗함을 받았다'라는 것은 썩은 문둥병자의 살이 다시 돋고, 문드러진 손가락, 발가락 등이 다시 나며, 피부가 온전해지고, 머리카락, 눈썹 등의 털이 다시 남으로써 정상인의 상태로 돌아온 것으로 온전히 고쳐주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을 깨끗하게 치유해주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은혜를 여러분과 저에게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9명의 문둥병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돕는 목회자에게 대하여, 나아가서 가정의 아내와 남편, 자녀들에게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대치에 미치지도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만족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분명하게 인정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여기까지 올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오는 9명의 문둥병자들처럼 만약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입니다. 이제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을 기억하면서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신 16:12)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돕는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나에게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보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열 명의 문둥이 중에 오직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신의 병이 나음을 보고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영광 돌리는 삶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고,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지를 잘 모르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잘 되는 것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실패한 삶보다 성공한 삶이 더 좋겠지요.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름을 드러낼수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크기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나면 감사하되, 이름을 억지로 내지 않을수록 하나님께서 더 영광 받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더 큰 은혜를 받는 감사자는 기억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다음 동작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만을 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악기를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자 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심을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함인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생들은 하나님께 감사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내가 그것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3.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사례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이는 가다가 고침을 받고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와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여기의 사마리아 문둥이는 자기가 병 고침을 받은 것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고쳐주신 주님께 돌아와 그 발에 엎드려 사례함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러한 감사가 더 큰 은혜를 받는 감사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이의 감사에도 당연지사(當然之事)로 선물이 따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물질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항상 물질로 표현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이 있는 물질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노력은 물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신명기 16:10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물질을 많이 드리고 적게 드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감사자라면 자기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에게 힘을 다하여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예물을 드리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보답하는 것이 반드시 [물질]을 드릴 때에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헌신(獻身)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고전 6:20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시간도 드릴 수 있고, 지식 혹은 재능도, 드릴 수 있고, 생명도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말로만 감사하기보다 시간으로도, 몸으로도, 물질로도 감사하십시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의 강조점은 단순하게 물질로 드리는 것을 강조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사례했다는 것이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례하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귀중히 여기십니다.
그러기에 고침을 받고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고침을 받고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영광 돌리며, 사례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자신에게 고침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영광 돌리며, 사례할 때에 더 큰 감사거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표현하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하게 되었는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나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그 한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주님의 인정이었습니다. "너 밖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없구나!"(18절) 이 세상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 특히 주님에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19절) 이처럼 감사할 것에 대해 감사하면 반드시 높은 이자와 함께 축복이 돌아오게 됩니다. '감사의 문'이 열리면 '하늘 문'이 열리고, '행복의 문'도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W. 브레이크]가 '감사할 줄 아는 자는 풍성한 수확이 뒤를 따른다'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이는 마치 기관차가 앞에 서면 객차가 뒤에 따르듯이 감사가 앞에 서면 뒤에 계속해서 풍성한 수확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의 생활을 계속하면 수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감사할 일들이 넘치게 됩니다. [C. 쿨리지]는 말하기를 '축복 받기 원하거든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감사하는 생활 속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좋을 때도 감사해야 되지만 어려울 때도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가 감사생활을 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감사가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감사할 일이 있어서 지나갔어도 현재에 감사생활을 하면 현재의 그 감사생활 속에 과거의 감사가 이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감사를 계속 이어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어려움이 있어도 감사생활을 하면 미래의 감사를 보장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한 번 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현재로부터 미래까지 연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생활 속에 감사함이 있는 사람은 늘 자기 생활에 만족이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망 불평이 있을 때 얼굴을 한 번 쳐다보십시오. 천사같이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 있나요? 감사가 있는 사람은 말로도 감사가 나오지만 또 감사의 노래를 하게 되고, 감사할 마음이 넘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감사함을 자꾸 베풀게 됩니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바로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주님은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라고 물우십니다. 이러한 물음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물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 그들 중에는 제사장에게 보여 완치 판정을 받고 가족들을 만난 후, 가족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감사하러 오겠다는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을 미루면 대개 감사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살게 됩니다.
병들었을 때는 "이 병만 고쳐주시면 제일 잘 믿을게요."라고 누구든지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병이 낫고 조금 시간이 흐르게 되면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사의 때를 놓치지 말고, 특히 더 늦어 후회가 되기 전에 부모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요구하는 모습은 많아 보여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적습니다. 육체가 무감각해지는 문둥병보다 은혜에 무감각해지는 영적 문둥병이 더 문제입니다. 은혜에 무감각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때는 행복이 끝장나는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지만 불평하는 마음속에는 마귀가 거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저는 믿음이 없어요. 사업 조금 더 하고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겠다는 분이 시간이 지나 선교하고 구제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지금 감동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 당장 다른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힘껏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받은 것이 자기의 기대치(期待値)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들에게 뭘 해주었기에 자식들이 감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스승이 학생들에게 뭘 해주었기에 학생들이 감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뭘 해주었기에 사람들이 감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로,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았을 때는 평생토록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내가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의 기쁨과 감격이 세월이 흐르면서 다 희석되고 맙니다. 왜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고맙고 감격스러운 지난날의 추억을 다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현재 힘들고 어려운 것만 자꾸 눈에 뜁니다. 지난날에 좋았던 것은 생각만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사람들이 못된 습성이 있어서 지난날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다시 돌아와 진정으로 예수님께 엎드려 사례하고 감사한 사람은 오직 한 명의 문둥병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유대인 문둥병자들이 아닌 이방인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18절을 통하여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 속에서는 다른 아홉 명의 문둥이가 어디를 갔는지 모르셔서 물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서는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이 있는 어떤 자인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감사자의 자격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가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선민이다”이라고 자랑하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온갖 혜택을 노리던 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마땅히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앞장을 서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 문둥이만이 감사에 앞장을 섰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교훈 하시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비교적 덜 받은 사람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남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그 아홉에서 어서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홉은 여기 있느냐"라는 물음이 혹시 우리에게 주시는 물음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 아홉" 속에 속한 자가 아닙니까? 그 아홉에서 나와 감사하는 한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넷째로, 교만과 악한 마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 악한 사람은 절대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항상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선한 사람은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고, 악한 사람은 없는 것 가지고 불평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어떠한 사람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 주지 않습니다. 어떤 가정은 부족한 것이 없이 다 갖추고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주시면 교만하니까한 두 가지를 부족하게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 내게 있는 것이 더 많은 데 왜 그것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을 합니까? 감사하며 기도로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아홉 명의 문둥병자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렇다면 여기의 아홉 명은 왜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아무 말이 없으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경우를 분석해 보면 대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① 나는 몰라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알았으면 게을리 했겠습니까?
②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③ 나는 누구에게 나타나기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④ 감사하는 것보다 내가 그 동안 사람들에서 소외되어 못한 것들을 하기가 바빠서 감사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이렇게 도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⑤ 나는 나고, 그분은 그분이지 않습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인입니다
⑥ 오히려 그분이 내게 감사해야 합니까? 내가 그분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까?
⑦ 내가 어디 낫고 싶어서 나왔나, 따라 가다 보니 나왔지, 내가 문둥이로 있었으면 구걸 특권을 누리는데, 이제 나왔으니 먹고 살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⑧ 그분은 문제 있는 인물입니다. 그분과 관련을 맺으면 곤란합니다.
⑨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나를 고쳐 주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이유로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만일 위의 어느 경우 중의 하나 때문에 주님에게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탄식과 책망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축복의 시작입니다. 감사는 변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미루지 말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면 영생을 누리고 그렇지 않으면 영벌에 처한다는 행위 구원 사상을 뽑아 내는 것은 잘못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주님과의 생명적 관계에서 오는 풍성한 삶을 누린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러분은 감사를 모르는 현대에 감사 생활에 힘씀으로써 풍성한 주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금번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지난 한 해 동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긍휼 그리고 축복을 베풀어주신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감사할 것이 없다면 감사할 것을 찾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감사할 것이 무궁무진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마틴 루터]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감사하는 데에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범사에 불평불만(不平不滿) 하는 성도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수와 감사 (요 4:35-38) (0) | 2022.08.16 |
---|---|
추수감사절유래요약 (0) | 2022.08.16 |
온전한 감사 (신 16:13-17) (0) | 2022.08.16 |
바나바 성도 (행9:26-30) (0) | 2022.08.16 |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0) | 2022.08.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