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 성도 (행9:26-30)
오늘은 평신도주일이자 성령강림절입니다. 기독교 대한감리회는 1979년부터 총회결의에 의해서 평신도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희랍어로 ‘라오스’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백성의 두 계급이 존재되어 왔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습니다.
한스 윙이라는 신학자는 “목사는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들도 성직자라는 말입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누구를 가르킵니까? 이 평신도라는 말은 313년에 로마에서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므로 교회는 급속한 성장이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면서 교회에는 교직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성직자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직자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당시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이 평신도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500년동안 그렇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평신도 사역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한 때입니다. 평신도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신도가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가 왜 중요합니까? 평신도는 광범위한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직종을 가지고 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초대교회를 살펴보면 사도들의 역할도 컸습니다만 평신도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오늘 교회의 현실은 아직 1%의 교역자와 99%의 평신도가 존재합니다. 교회의 주체는 평신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평신도는 잠을 자고 있는 형편입니다. 세상을 복음화 하는 주력부대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오순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는 날이었는데, 구약의 맥추절(초실절, 칠칠절)이었습니다. 이날은 기독교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믿는다고 했지만 늘 어딘가 부족하고 늘 어딘가 모자란듯 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마치 장수를 잃은 병사들처럼 힘을 잃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약속하신 말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대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다락방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만 120명이 빡빡하게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안타까움과 외로움,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홀로 남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 하겠습니다. . . ”
그때 하늘로부터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사람들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온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담대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전도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120명모두에게 담대함과 용기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를 활보하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자 교회부흥을 방해하는 마귀들의 세력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그 첫번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힘있게 증거하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인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 선두에 섰던 자가 사울이었습니다. 바울이 공부했던 율법에 의하면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국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끌고 와 감옥에 넣을정도로 열심히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이라는 성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고꾸라져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도리어 예수를 증거하게 되자 사울과 같이 예수를 핍박하던 자들이 그를 가만두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들의 핍박을 피해 다메섹에서 도망쳐 거기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이야기했으나 사도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까지 핍박자로서 스데반을 죽인 자가 지금은 나도 예수 믿는다하니 믿어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사울이 부름받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로 인해 오해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들어서 사울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희생함으로 저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할 수 있습니까? 사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인도하여 교회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인사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바나바는 중재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울은 믿을 수 없으나 바나바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바나바의 중재로 사울은 사도들에게 바르게 소개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되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이때부터 준비되었습니다.
오늘 평신도주일에 우리가 배워야 할 평신도는 바나바입니다.
1. 바나바는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채권자형(債權者型)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둘째는 채무자형(債務者型)입니다. 그는 ‘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빚을 지고 있다. 부모 형제나 스승은 물론, 하나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기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남한테 돌려주어야 할 것들입니다. 이미 받은 것을 다 갚기에는 일생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존경받고 행복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겠습니까? 채권자형보다도 채무자형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착하다는 말은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성실하다는 뜻입니다. 존경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그와 같은 신앙인격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섬기는 자는 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같이 착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4:36-37에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 사람의 본명은 원래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의 별명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요셉의 하는 일을 보고, 그의 성격을 보니 그는 꼭 바나바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란 뜻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름처럼, 친절하고 온화하고, 인정도 많고, 학식도 뛰어나고, 항상 이웃을 돕고, 남을 격려하는 너그러운 인격자였고, 평화의 중재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 준 이름입니다.
바나바는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꽃꽂이 할 때 안개꽃은 다른 꽃들을 돋보이게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그 꽃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안개꽃이 뒤에서 받쳐줘야 그 꽃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모두들 자기를 나타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돋보이도록 뒤에서 이름 없이 받쳐주는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했던 요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바나바는 섬김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도자는 결코 모든면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있는, 카리스마에 있어서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적인 개념에서 지도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나바 같은 사람은 비록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으로서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구브로는 지금의 사이프러스 섬으로서 당시에는 아주 부유한 섬이었습니다. 그 섬에는 광산이 있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었으며 기름이 났고 벌꿀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구브로 출신이라고 하면 부자로구나 하는 연상을 할 정도로 구브로는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바로 이 구브로 출신이었습니다. 아마도 바나바도 부친의 배경으로 인해서 상당히 넉넉한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바나바가 초대교회에 자기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과부들을 위하여 구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큰 사건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권위자, 격려자, 위로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별명이 본명보다 더 잘 알려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좋은 별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바나바는 사람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은 곳곳으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그곳에서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가는데 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핍박으로 인해 처음으로 문화를 뛰어넘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노력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안디옥에서 주목할만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행11:21절)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부흥의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냅니다. 성도들을 돌보고 전도를 지속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파송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즘 말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고, 바나바로 인해 교회는 점점 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아주 특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간 것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초대교회 형제들의 도움으로 다소로 피신하여 그곳에 은둔해 있었습니다.
꿈과 열정을 억누른채 숨어 지내야 했던 사울의 심정이 그동안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잔뜩 의기소침해 있을 때에 자기를 찾아 주었으니 사울의 입장에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바나바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사울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줍니다.
안디옥교회가 부흥되자 바나바는 4백리가 넘는 먼 거리의 고향 다소에 가있던 사울을 직접 가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일년간 그와 같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가르쳤습니다.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이렇게 좋은 일군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고향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아서 일을 시킨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하나님의 일군을 양성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행 13:1-3)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안디옥교회가 실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바나바와 사울이 신앙지도를 한 것입니다.
4. 바나바는 비젼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부흥할 때 이름을 크게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온것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소아시아의 최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거기서 자기의 꿈과 욕심보다 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사역하지 아니하고 바울을 초청합니다.
바나바는 명예와 성공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더 생각했습니다. 결코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말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이 독립이 된다면 자신은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고 말했던 것처럼 바나바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기꺼이 성전 문지기가 되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꼴찌를 차지해서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감투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정말 바나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산다.” 여러분 기업이 망하면 기업가도 망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기업가는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기업가가 철저히 자기를 위해서 기업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얼마나 많은 바나바가 있습니까? 교회안에 계급의식은 교회부흥을 가로막는 요소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마치 계급처럼 생각하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섬기고, 사랑하고, 남을 세워주고 격려해주려고 하는 바나바가 부족합니다.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하지만 뒤에서 겸손히 섬기는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한 알의 밀이 당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5. 바나바는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에게 주어진 한가지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전도였습니다.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가서 일년동안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키고 교인들을 인정받는 신앙인으로 양육시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까지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혼자 가지 않고 바울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전파하며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충성을 다했습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나보다 더 학식 있는 사람,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할 줄 아는 사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은 혼자하면 잘 하는데 같이하면 못합니다. 자기의 명예, 자기의 영광을 위한 이기적인 태도라 하겠습니다. 바나바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교회에서 제일 전도 잘 하는 사람들은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되는 초신자들이라고 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은 전도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내 주제에 누구한테 예수 믿으라고 하나’하는 자책감도 생기고 남들이 비웃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초신자들은 교회 정치니, 조직이니, 직분은 상관도 하지 않고 죄사함과 구원의 감격하나 가지고,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순하시기 바랍니다.
바나바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4) 바나바가 존경받고 안디옥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갈망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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