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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걸어서@ 행20:13

by 【고동엽】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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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걸어서           행20:13                  15.10.11.출처보기

 

 

◑서론/ 드로아를 방문해서 받은 소감

 

드로아는 한때 콘스탄틴 황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으려 했을 정도로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 지정학적 이점으로 인해서 드로아는

2천년 전 바울 당시에도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대도시였습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폐허속의 돌 더미로만 존재합니다.

 

2001년 1월에, 제가 드로아를 찾아가 보았을 때,

폐허 속의 돌 더미, 누런 갈대에 파묻혀 있는 누런 돌덩이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웅변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춧돌과 성벽으로 놓고 세운 돌들은 그대로 있는데,

그곳에 집을 짓고 성벽을 세우고, 그 속에서 위세를 부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아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앞으로 또다시 2천년이 지난다 해도, 비록 폐허 속일망정,

그 돌들은 그 때에도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 돌들에 비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하찮고 덧없는 존재입니까.

 

폐허 속에 버려진 돌더미보다 못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인간이 육체의 생명만 목적으로 삼아서 살아가면,

인간의 생명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쇠퇴해 가기에 인간은 서글픈 존재요,

결국은 폐허 속에 버려진 돌보다 못한, 한 줌의 흙으로 소멸해 버리고 맙니다.

그보다 더 허무한 존재가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누런 갈대 속에 파묻힌 드로아의 폐허 속의 돌 더미는,

역설적이게도 육체의 목숨을 목적으로 삼다가,

옛사람은 죽고 주님의 참 생명 속에서 본질적인 새 교인으로 거듭났던

드로아의 유두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반사경이었습니다.

 

폐허 속에 버려진 돌 더미보다 못한 존재인 우리들에게도,

유두고를 새롭게 살리시고, 본질적인 새 성도로 세워주셨던 주님의 참 생명,

영원하신 생명이 이미 임해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서론/ “청년” 유두고에 대한 번역상 오해

 

우리말 성경에는 드로아의 유두고를 9절과 12절에 동일하게 ‘청년’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9절과 12절에 다른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의 청년은 본래 청년을 뜻하는 ‘네아니아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의 청년은 ‘파이스’인데, 이것은 아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헬라어로 네아니아스가, 15살 이상의 젊은이를 가리킨다면,

파이스는 8~14살까지의 어린이를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드로아의 유두고는 청년이 아니라,

청소년의 아이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개역성경은 실제로 12절의 파이스를 ‘아이’로 번역했습니다.

 

만약에 드로아의 유두고가 정말 ‘아이’였다면,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9절에서도 유두고를 청년을 일컫는 ‘네아니아스’가 아니라,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의사 누가가 본문을 기록하면서, 유두고에 대해서 각각 상이한 의미의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 유두고를 상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두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 아들들을 가리켜 ‘청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제가 제 아들을,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할 때는

‘제 첫 번째 청년, 두 번째 청년’이라고 말하지 않고,

‘제 첫째 아이, 제 둘째 아이, 혹은 막내 아이’라고 부릅니다.

 

누가가 본문 9절에서 유두고를 청년이라고 불렀던 것은,

누가 자신을 포함해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유두고는 정말 연령상 실제로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유두고를 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유두고를 데리고 온 집안사람들과 동네 어른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까닭입니다.

 

유두고는 한 명 뿐인데, 그 동일한 유두고가 누군가로부터는 청년이라 불리고,

또 다른 누군가로 부터는 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유두고가, 그 두 호칭에 대해서,

모두 제대로 응답하면서 살았음을 밝히기 위해서,

누가는 본문에 유두고의 그 두 호칭을 모두 언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치고,

어느 누구도 단 하나의 호칭만으로 불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남편/아내, 부모, 자식, 형, 언니, 동생, 상사, 부하, 아이,

청년, 중년, 장년, 어른 등 여러 호칭으로 불리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배우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 많은 호칭에 제대로 응답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에 대한 호칭에 따라서 배우처럼 살아간다면 오히려 그게 큰일입니다.

 

배우는 무대와 스크린 속에서만 배우입니다.

누구든지 실제의 삶 속에서 자기에게 불리는 호칭에 따라서 배우처럼 연기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위선적인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붙어있는 여러 호칭에 대해서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유두고처럼 주님의 참 생명 속에 있을 때입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참 생명만,

죄성을 지닌 우리 자신을 신실한 인간으로 세워주실 수 있고,

신실한 인간만 자기에게 붙은 모든 호칭에 대해, 바르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참 생명은, 신실로 입증되고, 신실은 오해와 편견을 뛰어넘어,

사람과 사람을 한데 엮어주는 생명의 동아줄입니다.

 

 

 

◑본론 / 드로아에서 앗소로 "혼자 걸어간" 바울

 

이레 동안 드로아에서 머물렀던 바울은,

그곳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일 밤에, 주일 마지막 예배를 드린 뒤에,

계획했던 대로 월요일 아침에 드로아를 떠났습니다.

그 이후의 여정은, 본문 13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행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드로아를 출발한 바울 일행의 다음 행선지는, 드로아 아래쪽에 있는 앗소였습니다.

그러나 앗소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바울은, 2차전도여행중에 아테네에서 홀로 고린도를 찾아갔던 것처럼,

그동안 일행 없이 혼자 여행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곁에 일행이 있을 때는, 걸어서 가든, 배를 타고 가든,

바울은 반드시 일행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지금 바울 곁에는, 본문이 ‘우리’라고 기록한 일행이 있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누가를 포함해서,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해 줄

마게도냐와 아가야 각지역 교회 대표들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제외한 그들도 목적지는 앗소였는데,

그들은 배를 타고 앗소를 가서 먼저 기다리고,

바울은 혼자 일행과 떨어져서 앗소까지 걸어가서,

거기에서 일행과 다시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일행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정하여 주다’로 번역된 ‘디아타소’는 *to arrange, appoint, ordain, prescribe, give order

‘규정하다’는 의미와 함께, ‘명령하다. 지시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동역하는 관계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나는 앗소까지 걸어갈 것인즉,

여러분은 배를 타고 먼저 앗소를 가서, 나를 기다리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시 평균 수명으로 이때 바울은 이미 인생 말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인생 말기에 접어든 바울이, 앗소까지 그 먼 길을 혼자 걸어가겠다는데,

일행이 알았다고 걸어가시라고, 자신들만 편하게 배를 타고 가겠습니까?

몸도 노쇠하신데, 우리와 함께 배를 타고 가자고, 바울을 만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바울이 굳이 걸어가겠다고 하면, 우리도 그럼 걸어가겠다고, 바울을 따라나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만큼은 바울은, 당연한 듯 보이는 일행의 만류와 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나는 앗소까지 걸어갈 것인즉, 여러분은 반드시 배를 타고 따로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단호하게 “명령”했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책들을 보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거리가 다 다르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책에는 30킬로 이하로, 또 다른 책에는 40킬로 정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14년 전에, 제가 드로아의 유적지를 찾아갔을 때,

드로아에서 앗소 항구까지 바울이 걸었던 옛길을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실제로 확인해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65킬로였습니다.

 

인생말년에 접어든 바울에게, 65킬로미터의 거리라면,

도보로 최소한 이틀 이상을 필요로 하는 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또 최소한 하루 이상, 길에서 노숙해야 했음을 뜻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접어든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그 먼 길을 혼자 걸어갑니다.

걸어가다가 배가 고프면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서, 배낭속의 마른 빵을 집어먹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이 몰려와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으면,

바울은 대지의 풀을 요로 삼고, 초롱초롱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이불 삼아서, 노숙을 했습니다.

 

새벽하늘이 밝아오면, 바울은 다시 마른 빵 한 조각으로 요기를 한 다음,

계속해서 터벅터벅 앗소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인생말년에 접어든 바울이더욱이 지병을 지닌 병약한 몸으로,

사서 그런 고생을 한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만, 앗소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일행과 합류한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남겼던 유언 속에, 그 단초가 들어있습니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은 자신의 유리/불리에 따라서 자신의 행선지를 결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령에 매여 살던 바울은, 언제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이 나아가면 칠흑같던 한밤중이라도 계속 전진하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몇 달이든 계속 한 곳에서 머물렀던 것과 같았습니다.

 

20:3절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3차전도여행을 매듭짓고, 고린도를 떠나려 했을 때,

바울의 본래 의도는, 분명히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구제헌금을 전달해준 뒤에,

일단 자신의 목회 본거지인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배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로 올라가서, 에게해를 건너 드로아와 앗소를 거쳐서,

밀레도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밀레도에서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간다’고 증언합니다.

마게도냐를 둘러오는 길을 거쳐오는 동안에,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계속하여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행20:23

라고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를 우회하면서 자신이 복음을 증거했던

베레아, 데살로니가 빌립보를 차례대로 거쳤습니다.

 

그 각 성을 거칠 때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결박과 환란이라’고 계속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결박과 환란을 계속 일러주시는 성령님의 그 예고를,

자신의 예루살렘 행을 막아주시려는 주님의 은혜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안이하게 해석하여,

실제로 예루살렘 행을 아예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그 예고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그가 왜 위대한 사도인지를 똑똑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길이라면, 결박과 환란의 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길로 나아가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살려주신 주님의 뜻이라고 바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계속된 결박과 환란의 예고와, 자기의 목숨을 걸더라도

복음의 증인된 길을 완주하겠다는 바울의 선포 사이에,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어간 바울의 여정이 끼어있습니다.

 

 

◑주님과 독대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 말년의 바울이지병을 지닌 병약한 몸으로 왜 일행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자기 홀로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갔는지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예고를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홀로 해석하면서,

그 어떤 위험의 길일지라도주님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게끔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추스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일행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격리시켜서, 오직 주님과만 독대하면서,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자기 자신을 바르게 곧추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혼자 바울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

오른쪽으로 에게해 너머 유럽대륙이 계속 시야에 들어옵니다.

아시아 대륙을 지금 걷고 있는 바울에게, 에게해 너머의 그 유럽대륙은,

자신의 마지막 생을 던져야 할 로마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성령의 예고를 곱씹으면서, 에게해 너머 유럽대륙을 계속 바라보면서,

앗소를 향해 한 발, 두 발 걸어가는 바울은, 주님과만 독대하면서,

주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14년 전에 제가, 자동차로 그 길을 따라가다가,

자동차에서 내려서 바울이 걸었던 옛길을 한 동안 제가 걸어보았습니다.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서, 그 길을 걸었던 바울의 심정에 젖어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께 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앞에 결박과 환란이 도사리고 있다고 계속 일러주십니다.

   주님, 이것이 저더러 이 길을 피하라 하심이 아니시죠?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던 저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살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저 홀로, 제 자신의 안일을 꾀하라 하심이 아니라,

   주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심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믿어주시고, 주님의 뜻을 위해서

   그 누구도 가려하지 않는, 결박과 환란의 이 길로, 저를 선택해서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저를 불러내실 때, 그때 저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제 생명은, 살아도 죽어도 저를 영원히 살리신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결박과 환란이 도사리고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가겠습니다.

 

   저를 살려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육체의 생명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듯 하나님과만 독대하는 자발적인 자기 격리를 통해서

바울은 성령님의 예고를 바르게 해석하고, 소명의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게끔,

자기 믿음의 허리띠를 다시 한 번 동여매었습니다.

▲바울의 이 "자기 격리"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연상케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에 이르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한 곳에 함께 기도하게 하신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돌을 던져야 닿을 정도의 거리로 나아가셔서,

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서,

제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통성으로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자발적으로 격리시키셔서,

홀로 하나님과만 독대하셨습니다.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의 개인적인 바램은, 십자가 죽음의 쓴 잔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피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의 그 쓴 잔을 마시기 위해 하나님과 독대하셨습니다.

 

그 자기 격리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피하고픈 십자가 죽음의 쓴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바르게 해석하시고,

당신의 온 몸으로 그 잔을 마시는 십자가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도 새벽이면 한적한 곳으로 당신을 격리시키셔서,

하나님과만 독대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자발적인 자기 격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셨고, 바울도 주님을 본받아 그렇게 살았다면,

하물며 우리야 두 말 해 무엇하겠습니까.

 

다음 시간에 함께 깊이 숙고하겠습니다만,

믿음은 마셔야 할 쓴 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꺼이 그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져야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야할 길에서 되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만란(만가지 환란)을 뚫고서라도 정면으로 돌파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격리하는,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격리,

그 고독한 시간의 길이와 정비례합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고독하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말씀을 곱씹고, 주님과만 독대하면서,

묵상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그리고 은혜로 채움 받는 그 자기 격리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적 시력이 회복됩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바른 해석의 능력이 배양됩니다.

마셔야할 쓴 잔을 마시는, 용기가 체화(몸에 구비)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삶속에는, 돌덩이보다 못한 우리의 뜻이 아니라,

이 시대를 위한 영원하신 주님의 뜻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기도/ 주님께서 이미 영으로 내 안에 임해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말씀으로 저를 품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켜, 주님과만 독대하려 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세상 속에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우리 모두 겟세마네에서 홀로 무릎 꿇어셨던 예수님을,

앗소까지 홀로 묵상의 길을 걸었던 바울을 본받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통해, 말씀 묵상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주님과만 독대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십시오.

 

세상의 삶이 분주하고 어지럽기에

도리어 더욱 주님과만 독대하는 자기 격리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해 주십시오.

자발적인 자기 격리를 통해, 주어진 상황을 주님 안에서 바르게 해석하며,

마셔야 할 쓴 잔을 주님 안에서 기꺼이 마시고,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며, 만란이 도사린 길일지언정,

가야할 소명의 길을 정면으로 돌파하게 해 주십시오.

 

자발적인 자기 격리를 통해, 돌더미보다 못한 우리의 뜻이 아니라,

이 시대를 위한 영원하신 주님의 뜻이 늘 이루어져 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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