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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보수와 진보의 대립,@ 갈등과 다툼의 원인은 마4:1

by 【고동엽】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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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보수와 진보의 대립, 갈등과 다툼의 원인은     마4:1     출처

◑광야 시험은, 세상 것을 추구하라는 유혹이었다!

 

지난 2011년 11월 24일 밤에, 올해 마지막 <목요강좌>가 열렸었습니다. 
그날에는 마태복음 4:1~11절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말씀과 빵"이라는 제목의 주제를 놓고 
이어령 + 이재철 공개 대담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4:1~11절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장소는 
도심 한복판 이거나 목가적 풍경의 촌락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과 대결을 벌인 장소는 
잘 아시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였습니다. 

실제로 유대광야를 찾아가보면, 
끝없이 이어져있는 황토빛 능선 외에는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없는 삭막한 죽음의 땅입니다. 

그 광야에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예수님께 
사탄은 '네가 정말 하나님을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빵 덩이를 만들어 보라'고 시험했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너 자신을 증명해 보이라'고도 했고, 

'자기에게 경배 하기만 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노라'고 
시험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그 세 가지 시험은 
그곳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므로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유혹을 일축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기에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만 
목적으로 삼으시겠다는 선언을 행하신 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삼ㅁ으시겠다고 선언 하셨다고 해서 
그 이후로 예수님께서 빵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빵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인간의 육체를 위한 것이요, 
인간의 육체는 썩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빵은 인간의 육체를 위한 뿐이지만 
인간의 육체가 썩어진 뒤에도 
인간을 영원히 살려 주시는 것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임을 
분명히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내용을 전해 주고 있는 마4:1절이
'그 때에'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이, 
광야에서 사탄과 대결을 벌이신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무릇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세례교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인생 자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언제나, 
인생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기에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세례교인은
인생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기에

오히려 그 광야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만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엔 인간의 육체를 위한 것일 뿐이요, 

인간을 영원히 살려 주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

 

그런 관점에서 마지막 <목요 강좌>의 주제였던 "말씀과 빵"에서 
말씀과 대비되는 빵은 
단순히 육체의 양식 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칭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날 마지막 <목요 강좌>가 끝날 무렵에 
한 방청객 이어령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안철수 씨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데   *2011년 
나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안철수 씨가 비록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믿을 만한 정치인이 없는 가운데 
그는 믿음을 주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그날의 주제가 "말씀과 빵"
즉 빵보다 우선하는 말씀 이었는데,  

그분의 질문은 "빵"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어령 선생님께서는 
이런 요지의 답변을 하셨습니다. 

'사탄이 자신을 경배하먄, 지상의 왕국을 주리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셨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오신다고 가정하자. 
그때도 예수님께, 안철수 씨 이야기를 물으시겠는가?  

지상의 왕국을 다 준대도 거절하신 분에게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지를 물으시겠는가? 

2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배자 로마제국과, 사악한 헤롯 왕가를 제압하시고 
정치적인 독립을 주시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의 기대가 빗나가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해도 
우리 역시 틀림없이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통일과 정치를 예수님께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슬픈 것은 
교회 바깥 질문과, 교회 안 질문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무상급식 이니 뭐니.. 모두 빵이야기 아닌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요즘 정치 현상을 내(이어령 박사)게 묻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세상에 휘몰아치는 현상은 아무 힘도 없음을, 
그것이 어떤 새력이든, 뜬구름 일 뿐임을 안다면, 
바른 길을 택할 수 있고, 바른 현실참여도 가능하다. 

단, 하나님의 말씀 없이 빵만 놓고 이야기하면 
바른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다.'      

▲이어령 선생님의 답변 요지는 
'빵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과 빵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말씀은 빵을 위한 수단으로 왜곡되고, 
인간에 의해 왜곡된 말씀은
더 이상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라 할 때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심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나의 개인 간증

 

그날 그 방청객의 질문과, 이어령 선생님의 답변은 
저(이재철 목사)로 하여금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옛 경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매일 술에 쩔어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던 저를 
어느날 성령님께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우리 나이로 36살 때였습니다. 
이듬해인 1985년에, 저는 제 나이 37 살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로 확실하게 인생행로를 바꾸지 아니하면 
허랑방탕한 옛 삶을 답습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신학교를 갔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저의 연약한 의지를 
그런 식으로 붙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입학한 신학교에서 
입학한지 두 달 만에, 저는 심각하게 자퇴를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된 뒤에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 
1980년 5월 18일, 그 비극적인 광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에 해마다 5월달이 되면 
전국 대학교를 중심으로 광주항쟁을 기리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당시 제가 입학했던 (광나루) 신학교에서도 
5월에 접어들자 거의 매일 시위가 있었습니다. 

신학생들도 불의에 항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반드시 항거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신학생들의 시위구호 와 시위 방법이었습니다.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서 부터 시작해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방법에 이르기까지 
신학교가 일반대학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5월 18일 당일에는 학생회가 초청한 외부 강사가 
교내 광장에 모여있는 신학생 시위대에게 선포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인 그 외부 강사의 설교내용은 
돌과 화염병 투척을 정당화시켜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집트로 갔을때 
거기 내렸던 개구리재앙, 메뚜기재앙 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개구리와 메뚜기를 잡아오게 한 뒤에 
우리를 해방시키라면서 파라오의 왕궁을 향해서 집어던졌다는 말 아니겠느냐? 

그때의 개구리와 메뚜기가, 오늘날에 돌과 화염병이므로
신학생들은 돌과 화염병 투척에 대해서 
조금도 갈등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37살의 나이에, 더 이상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찾아간 신학교가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면 
'내가 대체 이곳에 있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저로서는 갈등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그 때 그 갈등의 과정을 
잘 극복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그 과정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깨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빵의 문제'를 놓고 티격 태격하는 교인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대립과 갈등, 다툼은 
날이 갈수록 그 도가 심해지고, 격화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대립과 갈등과 다툼의 원인은 
무슨 명분을 갖다 대든, 단 하나, 빵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보수진영의 주장이든/ 진보진영의 주장이든 
그 어느 쪽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거나, 동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마다 자기 자신이 신봉하는 빵의 논리만을 내세우는   
그분들의 주장 속에는 
가장 중요한,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 존중, 인간 배려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의 주장과 말은 
실은 사람들을 죽이는 폭력, 
혹은 흉기와 다름 없습니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많은 크리스천 조차도 
세상의 빵의 논리를 그대로 고수한 채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보수주의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보수주의를 위한 도구로, 
진보주의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보주의를 위한 도구로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말씀만을 서로 앞세워서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이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시키기는커녕
 
이 사회의 분열을 고착화 시키고 심화시키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혹시 보수주의자 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에는 지켜야 할 소중한 (보수적) 가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봉하는 빵의 논리를 내세우기 위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보수주의자가 되십시오. 

자신을 진보주의자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것도 귀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불균형과 불의와 부조리는 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빵(현세적 가치)의 논리를 구현하기 위한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진보주의자가 되십시오.

그래야만,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이 세상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시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오!

 

마4:1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사탄과 대결하시기 위해 광야를 찾아가실 때 
예수님 홀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빛 속에 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빛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광야에서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빵의 논리를 쫓아, 
즉 세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만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빛(조명)속에서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삼으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빛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당신을 목적으로 삼지 아니하셨던들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빵의 논리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님의 빛 속에서 
빵의 논리를 극복하실 수 있었다면 
하물며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이야 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오늘도 사탄은 이 세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는 광야이므로 
빵의 논리를 좇아 
눈에 보이는 확실한 세상의 것을 추구하라고 집요하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속지 마십시다. 
빵의 논리로는, 죽음의 광야에서 다같이 죽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광야의 예수님을 본받아서 
성령님의 빛 속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성령님의 빛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생 광야 길을 걸으면서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우리 삶을 목적으로 삼으십시다.

성령님의 빛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 
사람을 사랑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그때 우리가 진보주의자든 / 보수주의자든 상관없이 
생명 없는 빵의 논리로 죽어가는 세상 사람들을 
살리고 통합시키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빵의 논리를 좇아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이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으심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빵을 논리를 더 신봉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더 많은 빵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우리가 내세우는 빵의 논리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배제된, 폭력과 흉기일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실은 이 세상에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사탄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잘못을 회개하오니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 모두 광야의 주님을 본받아

성령님의 빛 속에 거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성령님의 빛 속에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보수주의자가 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진보주의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자칫 빵의 논리 속에서 분열될 뻔했던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 공동체가

성령님의 빛속에서 사랑으로 통합되었듯이

 

성령님의 빛속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로 인해

분열과 대립과 다툼으로 치닫는 이 세상이

치료되고 회복되고 통합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다시는 빵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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