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찾았습니까 (눅 2:8-14)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와 축제를 합친 합성어입니다. 성탄절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충만한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지키는 모든 절기는 다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입니다. 교회에서 지키는 모든 행사는 다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절기를 지킬 때마다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지키면서 성도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먼저 성탄절을 도덕적인 절기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성탄절을 보면 산타클로스가 성탄의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타를 기다리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한 아이는 좋은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는 식의 절기입니다.
성탄이 오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산타클로스를 향하게 됩니다. 산타클로스란 성 니콜라스가 성탄절 전날 밤 저 북극에서 썰매를 타고 와서 굴뚝으로 집 안에 들어와서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요 둘째는 착한 아이는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는 선물을 안 준다는 것으로 성탄절을 도덕적 의미의 날로 바꾼 것입니다.
누구나 어릴 적 성탄절에 대한 기억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입니다. 잠을 자고 났더니 선물이 머리맡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고마움과 신비감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하는 성탄절에 산타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산타는 착한 아이에게는 좋은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신다는 것으로 성탄절을 도덕적인 기준을 아이에게 적용하는 교훈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십자가 구원을 고백하는 절기이지 도덕적 성찰을 하는 절기가 아닌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선주의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덕적 모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부정하고 굳지 그리스도를 도덕적인 한 사람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산타클로스화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구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 주님에 대해서 바른 신앙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탄절은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한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와 목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의 성탄에 주인공입니다. 헤롯왕도, 로마 황제도, 예루살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성탄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배와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성탄의 영광을 경험하는 사람은 성탄에 오신 주님께 예배로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성탄절로 인하여 돈을 버는 사람도 있고, 성탄절로 인하여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성탄의 주인공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당시에도 베들레헴에는 많은 손님들로 돈을 많이 번 여관이나 식당도 있었고 여러 지방 사람들이 모였으니 사람 만나는 재미에 흥이 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나는 어떤 얼굴로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돈을 버는 기회로 생각한다면 그는 분명 손님으로 가득 찬 여관 주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성탄절을 먹고 마시는 기회로 생각한다면 그는 분명 호적하라는 기회로 고향 사람 만나는 즐거움을 즐기던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탄절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 두 왕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에 계시뇨 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탄생과 십자가 죽음에서 왕으로 오셨다는 이유로 주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탄생하셨을 때 헤롯은 주님을 죽이기 위해서 군인들을 베들레헴에 보내어서 두 살 아래의 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에도 십자가에 붙은 죄 패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은 질문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면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세상의 임금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왕이 된 사람은 결코 주님을 영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자신의 왕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가정에 내가 왕이 되어 있으면 내 가정에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내 직장에서 내가 왕이 되어 있으면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 된 사람은 모실 수 없습니다.
출처/조병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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