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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by 【고동엽】 2022. 2. 5.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벌써 8월의 세 번째 주일입니다. 왜 이렇게 세월이 빠릅니까? 가는 세월 우리 힘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아름다워진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나이 들수록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나이 들수록 좋은 점만 보아라! 내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돕는 손이다" 얼마나 정감 어린 대화입니까?
여러분, 나이 먹고 세월 가는 건 슬픈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아름답게 완성하라고 주신 행복한 시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목소개!▶

 

미국에서 납북전쟁이 끝난 후 두 병사가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두 병사는 살아서 고향에 간다는 기쁨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어디쯤인가 언덕에 있는 교회를 발견했을 때 한 병사는 교회에 들어가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했고, 한 병사는 교회는 무슨 교회냐고 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병사는 자기방식대로 했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술이나 먹자고 한 병사는 귀향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22대 대통령에 '클리브랜드'가 당선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클리브랜드! 그가 누구인가?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고, 함께 살아서 고향을 찾다가 중간에서 헤어진 전우가 아니었던가? 그때 교회에 가서 전쟁터에서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가자고 한 바로 그 친구가 '클리브랜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인생의 차이가 이렇게 벌어질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를 바라보는 목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인생의 흐름을 하나님이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할/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닮아 가는 교회일 것이며,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일 것이며, 가장 바람직한 삶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이나 교회나 집단이 예수님처럼 되려면 먼저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닮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얼굴을 닮는 경우도 있고, 성격을 닮은 경우도 있고, 습관, 말하는 모습이 닮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닮는 것은 순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할 때, 닮아지는 폭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10년, 20년 살다보면 성격도 식성도 생활방식도 닮아갑니다. 어떤 부부는 얼굴까지 닮아 남매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닮는다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것은 닮을수록 좋지만 나쁜 것은 닮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닮아 가는 시간이 좀 걸리는데 비해, 나쁜 것은 순식간에 닮아 오염되기가 쉽습니다.
가끔 닮은 문제가지고 집안에서 시끄럽습니다. "저 얘 못난 성격은 꼭 당신 닮았어!" 못난 것은 상대방이 닮았다고 하고 잘하는 것은 자신을 닮았다고 합니다. <이 안에도 그런 사람이 몇이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닮는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닮아야 하는 사람을 닮아야 하고 본받아야 할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옛말에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기꾼과 가까이 하면 사기꾼이 됩니다. 술꾼과 가까이 하면 술꾼이 됩니다.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뜻 맞는 사람끼리, 처지가 같은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믿음 있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 잘하는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도박꾼들, 춤꾼들 역시 자기들끼리 어울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무리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끼리끼리 만나면 자기들끼리 만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우리네 삶의 꼴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스승을 닮고, 위인을 닮고, 친구를 닮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닮아야 하는 영원한 모습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닮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바울은 빌2: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의 의미는 '너희 안에 예수의 영을 가져라,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라, 예수님의 능력을 채우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얼마만큼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도 있고, 닮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한사람만을 사모하고 생각하다가 일어난 병을 상사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상사병이 날만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의 마음을 내 속에 품는 것이요 예수를 닮는 방법입니다. /믿/
주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상하게도 우리는 때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위해서는 신명을 다하는데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가령 오락을 할 때, 취미 생활을 할 때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면서도 정작 반드시 해야 할 신앙생활, 기도생활은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급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의 건강도 돌보아야 합니다. 사업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돈도 벌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진급도 해야 하고, 좋은 직장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들의 문제가 많습니까? 그러나 정말 급한 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만 바꿔지면 그 다음 우리 인생고의 문제는 주안에서 다 해결이 됩니다. /믿/ 우리 모두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이 우리를 온전케 인도해 주심을 기대하고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본문을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가하게 몸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고전9: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신앙생활은 상 받기 위해서 달음질하는 선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주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경기장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관중들 앞에서 하는 경주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영어성경에는 이 경기는 내 경기가 아니라 주님에 의한 경기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 정해놓고 달리는 경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트랙'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트랙을 따라 달려야 합니다. 그 경주로를 이탈해서 제멋대로 돌아다니거나 다른 선을 침범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순간 실격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정해 놓으신 그 '코스'를 따라서 돌아야 합니다.
마라톤은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마라톤은 종점까지 달려야만 인정받는 경기입니다. 중간에 제아무리 잘 달렸어도 끝까지 달리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죽을 때까지 열심히 달려야 됩니다. 한두 번 성공이 다가 아닙니다. 한 두 번의 실패로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거리를 다 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전9: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빌3: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다 달려야 합니다. 도중에 기권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달리되 상을 받도록 좋은 기록을 위해 달려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에게는 달려가는 골인 지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 자들에게도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①우리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경주하는 것입니다.
무슨 장면입니까? 원형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관중석에선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응원하는 사람들, 관중석에 들어선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들'은 바로 바로 11장에서 언급된 믿음의 선조들,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요셉, 야곱,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삶의 갖가지 풍파와 우여곡절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낸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경주의 모든 코스를 다 마치고, 결승점을 통과한 선배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그리고 오늘 믿음의 경주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격려의 함성과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열박스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가장 힘든 코스인 십자가의 난코스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고난의 경주를 시작한 크리스천들을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의 더 깊은 의미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주목하는 사람들이 마치 운동장에 운집한 관중들처럼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동선수끼리만 하는 경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기록도 저조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흥이 안 나서 그렇습니다. 연극도 마찬가지로 관중들이 많아야 배우들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구경꾼들이 많이 모이면 먼저 구경꾼들에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신통치 않으면 관중들이 야유를 보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실망했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는 증인들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신앙의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이 우리의 신앙을 봅니다. 네 남편이 보고 네 자녀들이 보고 있습니다. /믿/

 

②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들의 복장을 보셨지요? 가벼운 복장입니다.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는 음식 먹는 것을 조절합니다. 체중이 너무 무거우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무거운 짐이 있다면 신앙의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무거운 것은 우리들의 염려, 근심, 걱정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 왜 염려를 하고 근심을 하십니까?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55: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시68: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 /할/
또 여기 무거운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리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다면 은혜의 단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행24:16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산에 오르는 사람, 먼 길을 가야하는 사람의 행장이 가벼워야 하는 것처럼 은혜의 높은 봉에 오르고, 천성을 향해 가는 사람은 버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의 나쁜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빠지는 습관, 늦는 습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을 잘 지키는 습관, 성경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이런 습관들이 귀한 것입니다. 모이는데 열심을 냅시다. 철야예배, 새벽예배, 구역예배에도 기쁜 마음으로 동참합시다.
시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잘되든지 못되든지 우리 앞에 당한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들을 버리고 신앙경주에 힘써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할/
또 여기 '무거운 짐'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고, 유익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과도한 오락이나, 육신의 안일을 위하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 유익이 없습니다. 물질만 소유하고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한 청년 부자는 그에게 재물이 많다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친을 장사지내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하다가 주님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주님을 믿는데 있어 무거운 것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습니까? 달리기하는 선수에게 그의 몸에 휘어 감고 펄럭이는 옷자락이 있다면 조금만 방심하면 그것 때문에 걸려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걸려 넘어뜨리는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습니까?
쾌락을 추구하십니까? 정욕에 여러분의 몸을 내어 맡기고 있습니까? 세상 노는 재미에 빠진 친구들이 있습니까? 그것들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끊어야 하고 벗어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습니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얽매이기 쉬운 죄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자는 단호해야 합니다. 결단이 아니고는 따를 수 없습니다. 결단이 없기에 성장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
또 1절 중반에 '얽매이기 쉬운 죄'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를 벗어버리는 비결은 회개입니다. 잠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할/
죄를 그대로 두면 죄는 반드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질병, 번뇌, 사업의 실패, 물질의 손실, 삶 속에 수치를 당하며 나중에는 심판으로 영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지은 죄를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했으면 다시는 그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김유신 장군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어떤 기생에게 빠져 책이고, 무예고 다 집어치우고 날마다 그 기생집에 갔습니다. 그 소식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 어머니는 젊은 유신이를 꿇어 앉혀 놓고 당당히 책망을 합니다. 책망을 받은 효자 유신은 어머니 앞에 꿇어 엎드려 "어머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가지 않겠습니다."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정말로 그 결심대로 여러 달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봄 날, 유신이 봄바람을 쬐일 겸 산책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립니다. 그런데 한참 잘 달리던 말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가만히 보니 전에 놀러 다녔던 단골 기생집 앞이었습니다. 말은 습관적으로 멈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김유신은 단칼에 자신의 애마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단칼에 자르고 끊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워지고 범할수록 꼬이고 얽혀서 결국 벗어버릴 수가 없고 헤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마치 그물에 새가 걸리는 것과 같이 처음엔 발목만 걸리지만 몸부림치다보면 몸뚱이 전체가 걸려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바울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가지고 신앙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엡4:22-24).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③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1절)
신앙생활을 경주로 비교했습니다. 한가한 봄날에 산책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 경주 중에 장애물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장애물 경기는 보통 달음질과는 다릅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운동회 하면 이 장애물 경기가 가장 인기였습니다. 특히 그물 밑으로 기어들어 갈 때, 이마가 벗겨지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날 수도 있지만 남보다 앞서야 된다는 승부 감 때문에 열심히 뚫고 나갑니다.
신앙생활도 이런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심은 인내를 동반해야 합니다. 한번 열심 내고, 두 번 열심 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의 열심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뽑기 위해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모이는 시간이 새벽 4시였습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회사 문은 잠겨 있었고 모인 이들은 저마다 불평을 하며 한 사람씩 가버렸습니다. 다섯 시간이나 지난 아홉 시쯤 겨우 문이 열려서는 남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몇 입니까? 사람의 팔은 몇 개입니까?' 등등. 그런 질문만 계속해대더니 "감사합니다. 이제 모든 시험이 끝났습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 회사 입사시험의 전부였고 며칠이 지난 후 몇 명에게 이런 합격 통지서가 도착했습니다. "저희 회사 입사 시험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시간을 지키는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네 시 정각에 온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신은 인내 시험에도 합격하셨습니다. 당신은 네 시에서 아홉 시까지 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평범하고 짜증을 낼 수도 있는 질문에도 화내지 않고 온화하게 대답함으로 성격 시험에도 합격하셨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시간 지키기, 인내, 원만한 성격 이 모두를 충족하셨기에 합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11장 소위 '믿음의 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11장은 믿음 장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우다가 승리한 위대한 선배들이 수십 명이 나옵니다. 그들이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이들 믿음의 선배들의 공통점은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3절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는 '일하면서 참는 인내'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내라고 하면 '참는 것'을 생각합니다. 문을 딱 닫아걸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 고통을 혼자서 삼키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기도하면서 인내하고 봉사하면서 인내하고 충성하면서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약1: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참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일반 성도들보다는 집사가, 권사가, 더 참아야 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렵다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 받을 자를 추리고 계십니다. /믿/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①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 바라본다는 원어는 '안드로포스'인데 사람도 '안드로포스' 즉 땅을 보는 자가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란 의미입니다.
골3: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위를 바라보고 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땅에 살면서도 관심은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거부로 큰 성을 쌓고 살수도 있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장막에 거하며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위를 바라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세례를 맞아 죽을 때 돌을 들어 던지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머리를 들고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스데반은 기쁨이 충만하였고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노아도 위를 바라보고 산 사람입니다.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맨 위쪽 지붕에 창을 하나만 내도록 특별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보이는 창 외에는 어디에도 창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늘만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할/

 

②예수님은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믿음의 주요'
이 한 마디 속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주'라는 말은 '생명의 주인'이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은 여기서는 '지배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 분의 지배아래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말 우리들이 그 분의 지배아래 들어가 있느냐? 그 분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힘들고 고단하고 피곤해도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까워도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있는가? 신앙생활은 그 분의 지배를 받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창설자, 믿음의 인도자, 즉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경기하는 운동선수들에게는 코치가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을 지도하시는 스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의 달음박질을 잘하려면 그리스도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합니다. 즉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여기 '온전케'하신다는 말은 '완성한다는 말과 책임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약한 존재를 강한 존재로 완성해 주시고, 깨어진 것들을 싸매어 주시고, 찢어진 것들을 한데 묶어 하나 되게 하십니다. /믿/
여기 온전케 하신다는 가장 깊은 뜻은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온전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의 인도를 잘 받으면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날마다 자라나 끝내는 온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④그런데 우리가 바라보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⑴자기 자신은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연약합니다. 유혹과 시련에 빠지기 쉽습니다. '조석변개',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이 심합니다. 저도 제 자신이 맘에 안들 때가 너무 많습니다. 또 자신의 과거에 실패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에 잘 나갔던 때만 생각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⑵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허물 많고 실수도 많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허물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주의 종에게도 허물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바라보고 예수를 믿으면 믿다가 낙심하기 쉽고 넘어지기 쉬우므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
⑶환경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환경 바라보다가 물 속에 빠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죄에 빠졌고, 다윗은 밧세바의 누드를 보다가 간음죄,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 성의 세상 향락이 그리워 그곳을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⑤어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⑴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피 흘려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직전에서도 우편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좌우 편에 강도와 함께 달리셨습니다. 모든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머리를 흔들며 침을 뱉고 욕을 할 때, 좌편강도도 예수님을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우편 강도 마음속에는 전광석화와 같이 계시의 빛이 떠올랐습니다.
"이분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 믿음을 붙잡은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우편 강도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고전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⑵부활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⑶재림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림교회는 항상 깨어있는 교회가 되십시다. 모이기를 힘쓰고,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영혼구원의 사명 감당하는 교회로 달려갑시다.
⑷치료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아담 이후 인간은 다 병이 들었습니다. 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생활이 병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가정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고 역사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누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서울 대학이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안기부가, 서울시장이, 노 대통령이 치료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들도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을 고치시고, 문둥병을 고치시고, 각양각색의 어떠한 질병도 다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이 아픕니까?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치료의 여호와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병을 온전케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⑸환난에서 구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풍랑을 만났던 제자를 구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오늘도 풍랑을 잠재울 수가 있습니다. /믿/ 우리들의 가정의 풍랑을 잠재워주십니다. 사업의 풍랑도 잠재우십니다.
시91:15절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나는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할/
⑹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그 땅, 그가 밟은 모든 땅은 모두가 옥토로 변하여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⑺입으로 시인하며 바라보십시다. 사람은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⑻좋은 것으로 상주실 분임을 인정하면서 바라보십시오.
⑼감사하면서 바라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니라!"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개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 드렸더니 기만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 책임져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할/
2절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했고, 3절은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⑥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⑴수치스러운 십자가였습니다. 파렴치범, 반란죄,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벌로 성 밖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형은 두고두고 그 명예와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지탄받는 수치스러운 형틀이기에 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았습니다.
⑵십자가형은 육신 적으로도 고통스럽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밖에 매단 후 고통 받다가 햇볕에 말려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팔목이 찢기고 발목이 찢기는 아픔은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계속됩니다. 그 고통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⑶정신적인 아픔,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정신적 아픔을 십자가에서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아픔을 다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 주님의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⑷부끄러움을 참으신 주님의 인내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존심과 체면과 자신의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침해를 당하거나 무시당했을 때는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벌거벗겨 죽는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멸시와 조롱과 천대와 십자가의 고통까지를 개의치 아니하는 것은 그것들이 잠시 동안으로 끝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통이나 부끄러움은 잠시 동안이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떤 부끄러움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⑸배신감도 참으셨습니다. 큰 소리 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들이 주님을 정죄했습니다. 그것은 굴욕이고 모욕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참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셨습니다. 심지어는 가롯 유다의 배신도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참아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상급을 바라보면 참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참을 수 있습니다. 왜 참아야 합니까? 주님이 참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스승이십니다. /할/아멘!/
⑹사랑의 시금석은 인내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그를 위하여 참아야 합니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만나주어야 합니다.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희생이 따라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참아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고 하셨습니다.
▶'챨스 카우만'은 '향수를 담았던 그릇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그 조각마다 향기를 풍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달려가도 향기가 나고 걸어가도 향기를 풍깁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예수를 증거하고, 성공과 번영 속에서도 예수를 높이게 됩니다. /할/

 

⑦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⑴마음이 평안합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⑵마음이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15:10절 이하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합3:17)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할/ 영적인 부요, 마음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⑶주님을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면 그 사랑의 감정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잠8: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⑷속 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여러분,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평강에서 평강을 더해준다고 했습니다.
⑸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꾼으로 자원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외친 그의 일성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일꾼으로 써 주소서!" /할/
⑹예수의 이름을 주는 자가 됩니다. 즉 능력자가 됩니다. 행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에게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명하자 벌떡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⑺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벧후1:5-7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무지개는 7가지 색깔이 합하여 무지개가 되고, 도래미파솔라시 7음이 합하여 음악이 됩니다. 신의 성품은 8가지 요소가 합해질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도 예수를 바라보는 자에게 오는 축복입니다.

결론의 말씀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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