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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염려하고 낙심하며 절망하십니까? (요 14:1/슥 4:6-9)

by 【고동엽】 2022. 2. 5.

왜 염려하고 낙심하며 절망하십니까? (요 14:1/슥 4:6-9)

 

어느 날 한 사람이 우거지상을 하고 뉴욕거리를 지나가다가 적극적인 사고가인 '노만 핀센트 필'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듯 인사하고 나서는 "목사님! 죽겠습니다. 저는 문제 속에 삽니다. 문제 넘어 문제,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목사님 문제없는 곳은 없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은 "있지! 그곳으로 가고 싶은가?" 그 사람은 반색을 하며 "목사님 그런 곳이 있습니까? 나를 당장 보내주세요" 필 목사님은 정색을 하며 "저 넘어 공동묘지가 있지! 거기는 전혀 문제가 없다네! 죽은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야"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욥5:7절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불티가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고난이 오고 문제가 닥치면 염려하고 낙심하며 절망합니다.

▶대게 사람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자신의 문제 때문입니다. 자신의 건강, 사업, 가정문제, 그리고 가족관계 등 자신과 관계된 문제들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②더 크게는 역사, 현실과 상황 때문에 근심합니다. 지구가 지각 변동을 일으켜 지진을 일으키고 홍수가 터지고, 한파가 일어나고, 가뭄이 계속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인구가 불어나면 식량 부족 상태가 오진 않을까? 자연의 고갈, 대기오염, 세계정세, 국제 정세를 표방한 여러 가지 위기의식과 환경에 대한 건강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③결국 죽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은 죽음입니다. 왜 우리가 하루에 세끼를 빠뜨리지 않고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왜 병원에 입원을 하고 몸이 좋다고 보약을 해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입니다. 민방위 훈련이 왜 필요합니까? 살아남기 위한 수단입니다.
죽음보다 더 사람을 겁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을까봐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근심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석가 헨드릭슨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는 것을 그만 두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주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지 말 것과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깊게 보면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만약 근심하지 말라는 명령만 있고, 다음 명령인 나를 믿으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별로 의미가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생애 속에 보면 근심하는 자들에게 안심을 주신 사건들이 많습니다. 마14:27절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며 근심하던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이 일어나자 파도보다 더 많은 근심과 불안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로서는 파도 그 자체보다 불안과 걱정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여기서도 '안심하라'고만 말씀하셨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위로의 말씀 정도로 밖에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니 두려워 말라!'는 즉 '나다! 내가 해결한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막5:36절이하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슬픔과 절망 속에 빠진 야이로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두려워 말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만, '믿기만 하면 네 딸이 살게 된다.'는 말은 창조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믿/

▶저는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근심 걱정 염려와 낙심과 절망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맡긴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맡긴다는 것을 설명한다면, 목적지를 위해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비행기나 배를 탄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비행기 안에 배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배가 항구를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비행기나 배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비행기나 배가 가는 곳에 나의 목적지에 가게 되고 나 자신의 방법은 유보되고 조종사나 선장에 의해 가게 됩니다.
'나를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근심에서, 절망에서, 낙심에서 일어서는 비결입니다. /믿/ 그러나 문제는 이 세상에는 마음놓고 나를 맡길 만한 대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근심 걱정 염려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도 사고가 잦습니다. 요즘에는 비행기 타는 것도 걱정, 배를 타는 것도 걱정, 자동차를 타는 것도 걱정, 그렇다고 걸어 다니는 것도 안심이 안 됩니다.
언제 우리가 걷고 있는 다리가 무너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 누워 낮잠이나 자야겠다며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브레이크가 파열된 트럭이 덮치는 바람에 낮잠 자다가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마음놓고 나를 맡길 대상이 없고, 맡길 장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상황 속에서 평안을 찾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참된 평안과 안식은 '나를 믿으라! 내니 두려워 말라! 나를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주님께 적극적으로 맡기고 의지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 "네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할/ ▶오늘 주제가 염려와 낙심입니다.

 

1. 염려라는 말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염려는 헬라어로는 '메릿 네오'이고, 영어로는 '워리'입니다. ▶몇 가지 뜻이 잇습니다.
①'걱정한다, 근심한다, 마음이 찢어진다. 나누어지다, 길옆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②'물어뜯는다.'는 무서운 의미도 있습니다. 또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는 가공할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질식하게 하고 숨을 못 쉬게 하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 놓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③염려란 또 '마음이 나누어지다'는 뜻도 있습니다. 약1:8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염려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마음에 평안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감정을 나눔으로 감정으로 하여금 안정을 잃게 합니다. 염려는 이해를 나눕니다. 확신이 없이 흔들립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판단의 기준이 나누어집니다. 결심의 가능을 나누어 놓습니다. 그러다가 염려가 누적되면 정신파탄에, 생활파탄, 인생파탄으로 이어집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또 염려는 각종 질병을 유발시킵니다. 고혈압, 심장병, 신경통, 위궤양, 소화불량 등등,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 염려는 육신 적인 것이라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눅21: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둔하여진다는 말은 '감각을 잃어버린다는'뜻입니다. 염려는 영혼의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지나치면 기도가 끊기고, 찬양이 멈추어집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풍비박산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손해입니까? 우리가 손해입니다. 믿음이 풍비박산이 나면 누가 좋아합니까? 사단마귀가 좋아합니다. /믿/
노벨의학상을 받은 '카렌'박사는 염려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염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6: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할/ 맡겨 버리라는 말은 던져버리라는 말입니다. 권고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성경학자는 신구약 전체를 연구하다가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는 말씀이 366회나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하다가 "아하 1년이 365일이니까 1년 내내 하루같이 근심하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구나 생각했는데, 왜 366번을 말씀하셨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생각하고 연구하다가 전광석화처럼 깨달음이 왔습니다. <4년마다 하루가 더해지는 윤년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그 하루까지도 너희 믿는 자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구나.> /할/ 얼마나 큰 관심이요, 돌보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는 분이십니다. /믿/아멘!/

 

2. 낙심, 낙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1:2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받고 낙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1:28절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사람에겐 건강이나 성공, 출세나 행복은 더할수록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질병, 실패, 아픔, 고통, 따위들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이 못됩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낙심입니다.
히브리어로 낙심은 '마사스'인데, '용해시키다. 황폐시키다' 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나 낙심은 비슷한 것입니다. 낙심은 건강도 희망도 행복도 용해시켜버리고 황폐하게 만듭니다.
또 헬라어로는 낙심은 '카로스'인데 '무가치한, 해로운'이라는 뜻입니다. 낙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해무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한숨쉬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괜히 낙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낙심할만한 이유가 있고 사건이 있기 때문에 낙심합니다. ▶사람들이 낙심하는 경우 대게 이런 경우입니다.
①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입니다. 질병, 실패, 그 어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②사회적인 문제들 때문에 낙심합니다. 사회생활에 적응이 안 된다든지, 뒤떨어진다든지 하는 등의 문제들 때문에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③정신적인 문제들 때문에 낙심합니다. 정서적인 불안, 노이로제, 신경과민, 고독, 단절 따위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낙심의 또 다른 표현은 절망입니다. 실존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의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낙심이나 절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또 있어 왔습니다. 이미 지난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고, 지금 그것을 간직한 채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절망이나 낙심을 어떻게 극복하고 물리치느냐에 있습니다. 제 아무리 절망이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으면 절망에서 짓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절망이 크고 낙심이 태산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물리치고 이겨낼 힘만 있으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낙심이나 절망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리에 영접하면 됩니다. /믿/ 바울은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후4:16절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습니다.
시42: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이웃 간의 불화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업실패의 문제,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구설수에 올라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산이 생겼다고 말한답니다. 보통 문제를 산이라고 하지만 큰 문제는 큰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막11: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가랴 선지자도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산 같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배경을 보십시다.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해방을 맞아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포로 전체가 다 돌아온 것이 아니고 일부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온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폐허 된 그대로였으며, 성전도 무너진 채 그대로였습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해방이나 귀환의 기쁨보다는 국토를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일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 큰산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①돈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돈을 벌어 귀국한 것이 아니라 70년 간 종살이하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당장 먹고사는 것조차 걱정입니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성을 재건하고 성전을 새로 짓는다는 말입니까? 이와 같이 그들에게는 경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②이스라엘 국민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이 있었습니다. 먹고살기가 각박한데다 이렇다 할 영도력을 가진 지도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묶여지질 못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성전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돈이 어디 있느냐? 며 반대를 합니다. 또한 성과 벽을 틈틈이 쌓아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다고 하면 천천히 하자고 점잖게 거절을 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③주변국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사마리아인, 애굽인, 에돔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70년 간 주인이 없는 빈 땅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짓밟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두가 비아냥거리기를 <하나님을 믿는 나라꼴이 불쌍하구나!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큰소리치더니 겨우 이거냐! 죽었다가 깨어나도 너희들의 힘으로는 성벽과 성전을 재건할 수 없을 것이다> 악담을 하면서 심지어 쳐들어와 방해를 놓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돈 좀 벌었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아부하며 지내던 사람들은 바벨론이 자기 나라인 양 지내며 귀국은 아예 생각도 않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이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적들의 조소가 이어졌고, 방해공작이 심해졌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큰산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요즈음 우리네 상황이 그렇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불황이라고 합니다. 죽겠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염려가 생기고, 낙심이 되고, 절망감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본문에서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을 찾게 됩니다.

 

①성령을 의지하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6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산과 같은 문제가 가로막혀 있다고 염려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스가랴는 힘차게 외쳤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할/
여러분!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식도 있고, 수단도 방법도 있는데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6: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키는 모든 문제일 수도 있고, 목숨일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목숨을 단 몇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능력으로 수단과 방법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우리는 지난 88올림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나라에서 치렀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올림픽 경기 중 100M 달리기는 불과 10초만에 끝나는 짧은 경기이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화제를 낳았습니다.
'벤 존슨'과 '칼 루이스' 둘 중에 누가 이기느냐는 것이 세계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벤 존슨'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약물을 복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2등을 한 '칼 루이스'에게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후에 '칼 루이스'는 "벤 존슨은 약물에 의존하였으나,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결국 승리는 나의 것이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큰산과 같은 문제를 이길 수 있습니다. /믿/
로켓을 타지 않고서는 달나라에 갈 수 없는 것처럼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큰산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수단과 방법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네 힘으로 안 되고 네 능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성령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요, 이 사실 앞에 아멘 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성령의 힘은 폭발력이 있는 강한 능력 '두나미스' 입니다. 여러분, 염려. 근심, 걱정, 낙심, 절망 등을 성령의 능력으로 녹여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이 능력을 주십니다. 막9:23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출33:19절에서 하나님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우리가 절망과 낙심에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②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7절)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천사가 스가랴라는 선지자에게 계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계시의 내용은 스룹바벨 총독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영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할/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송수천 목사에게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산에 네가 무엇이냐, 네가 송수천 목사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아멘! 아멘! 아멘입니다. /할/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 중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약 5만 명을 이끌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후, 바벨론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고,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어 고국으로 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왕국과 왕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하게 됩니다.
이에 스룹바벨은 총독 자격으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페르시아 황제의 후원을 힘입은 이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다음 해에 바로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이 일은 쉽게 마무리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 속에 많은 어려움이 있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낙심하고 약 14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 때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이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스룹바벨아 낙심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태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다 평지와 같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스룹바벨 총독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을 내어 일어서서 모든 난관들을 뚫고 멋지게 성전 건축을 마무리짓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이스라엘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할/

 

▶여기서 말하는 큰 산은 무엇인가?
⑴교만한 강대국을 가리킵니다. 교만했던 바벨론과 에집트, 앗시리아, 에돔, 그들은 자신들의 군대의 힘과 능력을 믿는 교만한 산들이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혼합주의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를 말합니다. 혈통이 혼혈 족이 되었다는 것도 있지만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과 가나안의 신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들이 성전건축에 동참하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그것들은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하다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교만한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 보다 높으냐? 네 권력, 네 재물이 무엇이냐? 그것이 하나님을 이길 성싶으냐?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⑵하나 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던 이스라엘의 노인들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시작되는 스룹바벨 성전 건축을 보면서 아직은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성전건축을 방해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면 큰 산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가 되는 성림의 공동체가 됩시다.
옛날 고구려와 백제를 이기고 통일한 신라는 국토는 하나가 되었으나 국토 안에서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이 신라인과의 분열이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국론이 분열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일치하게 한 사상이 있었는데 바로 '원효의 화엄사상' 즉 '일심' 사상입니다. 원효는 이 정신을 가지고 민중 속에 들어가 결국 백제인을 신라인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까요?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
⑶인간의 절망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염려, 낙심, 절망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망을 창조하십니다. 인간은 문제를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어떠한 문제라도 길은 있습니다.
프랭클린 홀은 '하나님의 능력은 원자탄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절망의 산아! 낙심의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너지고 평지가 될 것입니다. /할/
⑷인간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나의 어떠한 걱정이 하나님의 걱정이 아닙니다. 나의 절이 하나님의 절망은 아닙니다. 나의 문제가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문제가 더 큽니다. 심각합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큰산아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유는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믿/아멘!/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행위'가 있고, '권세의 행위'가 있습니다. 믿음과 권세는 다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는 권세가 주어져있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주셨으니'입니다. '주실 것이니' 미래가 아닙니다. 이미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대형 트럭에 많은 짐을 싣고 장풍을 일으키며 고속도로를 달려갑니다. 그러나 교통순경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권세입니다.
스가랴도 '큰산을 물리쳐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평지가 되어라!' 권세로 명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권세로 명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권세를 믿음으로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권세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장해 주십니다. 오직 예수의 권세로 큰산을 명하십시오, 믿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할/

③하나님의 은총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7절).
이렇게 큰산을 향하여 '평지가 되리라' 외칠 때 무리들이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할/
여러분, 은총이 무엇인가? 은총이란 은혜라는 말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는 승리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어 성벽을 쌓고 성전을 다시 재건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모두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심, 걱정, 염려, 낙심, 절망, 좌절, 개인문제, 가정문제, 사업문제는 내 방법과 수단으로 해결하려는 교만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신으로 되어 짐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큰산을 나누시는 하나님! 깊은 골짜기를 메우시는 하나님! 험한 인생 길을 걷어 내시는 하나님! 가시밭길을 평탄한 길로! 고달픈 내 인생 길에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 울고 있을 때 눈물을 닦아주시고, 병들고 상처 진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염려하고 낙심하며 절망합니까? 믿음으로 일어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할/

 

4. 염려와 낙심과 절망 대신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염려, 근심, 걱정, 불안, 낙심'이라는 말들은 다 같은 염려과에 속한 것들입니다.
▶주님은 염려하는 인생을 향하여 무어라고 하십니까? 마6: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염려한다고 작은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한다고 죽음에서 우리의 생명을 일각이라도 연장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염려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염려한다고 무너진 사람이 일어서는 것도 아니고 대학 떨어진 자녀가 붙는 것도 아닙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염려하며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성경은 돈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믿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주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믿/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는다면 근심 걱정 버리라는 것입니다.
②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사람이 역경 중에서는 누구나 도움을 찾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고, 권력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도, 권력도 상대적인 것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만이 완전하십니다. /믿/
③염려를 주님께 몽땅 맡기시기를 바랍니다(벧전5:7).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신앙 사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⑴무엇을 맡기라고 했는가? '너희 염려'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인생 길에 가장 무거운 짐인 '염려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⑵얼마만큼 맡길 것인가? 베드로는 '다 맡기라'고 했습니다. 일부만 맡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도, 건강도, 자녀도 다 맡기라고 하십니다.
⑶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맡기는 대상이 중요합니다. '주께 맡겨야' 합니다. 우상에게 맡기거나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⑷맡기는 태도입니다. '맡겨 버리라'입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져버리듯이 몽탕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염려하고는 관계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염려의 짐을 한꺼번에 벗어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말은 '믿는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맡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은행을 믿고 맡기듯이, 이발사를 믿고 맡기듯이, 기차를 믿고 타듯이 맡기라는 것입니다. ▶맡기면 모든 염려를 다 처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여기 권고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는 의미를 비롯하여 '높이다, 일으키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관심을 가지고 돌보셨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옥살이하는데서 권고하셔서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웠습니다. /믿/
④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습니다.
고전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너무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아십니다. 시험하실 믿음의 분량까지도 아십니다. 믿음의 분량이 넘는 시험을 주실 때에는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도 항상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되겠습니까?
⑤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염려대신에 기도합시다.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나 염려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나 행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염려를 책임져 주십니다. /아멘!/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큰산은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앞에 여리고는 정말 넘기 힘든 큰산이었습니다. 이중 성벽에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여리고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가지고 성벽을 돌기만 했는데 그 난공불락의 성은 기적과 같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할/
아무도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헤브론 산지도 믿음을 가지고 도전한 85세의 갈렙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닌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신의 역사가 그 산지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여 나갈 때 우리를 가로막는 큰산들이 무너져 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다면 저 큰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큰산이 무엇입니까?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나의 성령으로 된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와 좌절의 큰산이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죽음과 절망의 큰산이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불치병이라는 질병의 큰산이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낙심과 낙망의 산이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무기력과 패배의 큰산이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돈이라는 경제적 큰산도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아멘!/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 평지가 되리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스룹바벨이 될 때, 우리의 모든 문제는 거뜬히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나갈 때, 교회 부흥을 가로막는 큰산이 무너져 내릴 줄로 믿습니다. 전도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큰산도 무너질 줄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의 큰산들이 다 무너져 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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