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울이 버림을 받았는가? (삼상 15:1-3/17-23)
대학생활 4년 동안 줄기차게 따라다니며 수백 번씩 사랑을 고백했던 같은 과의 남학생과 결혼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3년 만에 이혼이라고 하는 아픈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다니는 직장의 다른 여직원과 눈이 맞아 아내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3년 동안이나 지워지지 않은 상처로 고통을 받다가 먼 친척의 소개로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 만난 남편 역시 결혼 전 교제하던 어느 여인과의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다가 결국 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은 두 번씩이나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으로 자살을 결심, 독약을 먹었지만 죽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기 발견이 되어 생명은 건졌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족마비증이 와서 고통을 받고 살아간다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인의 이야기도 있고, 요즘은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라 성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까 시어머니를 몰래 부산바닥에다 내려놓고 돌아온 며느리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며느리는 가난 때문에 시어머니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버리고도 양심에 가책이 조금도 없는 그런 부모도 보았습니다. 어쨌든 누구에게든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큰 충격이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하면 멸망이요 지옥 음부에 떨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왕이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소개!▶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키도 크고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9:2). 최고 통치권자인 왕이라는 직책은 절대적인 권력의 자리요 그 자리는 오직 한 사람만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실 왕이란 되기도 어렵지만 왕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기란 더 어려운 자리입니다. 왕이 누리는 권력이나 영화는 그 나라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으며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고, 크게 출세한 것이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성경에 보면 사울이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 나귀를 찾으러 나섰다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지시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의 나이 40세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즉위하여 40년 간 통치한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는데 사울의 군대는 3천명이었고, 블레셋은 병거 3만, 마병이 6천, 군사는 해변의 모래알 같은 군대와 마주서게 되자 사울의 군대는 사기를 잃고 허둥대고 있었고, 사울 왕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는데 전쟁에 나서기 전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고 나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정해진 날이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고, 상황은 급하게 돌아가 그만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해버렸습니다. 제물을 제단에 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왕이 지금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고 물으니 사울 왕이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하기를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하나님이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계명을 지켰다면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음으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이렇게 말하고 사무엘이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사울 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버림받게 된 첫 번째 경고가 된 것입니다.
왜 사울 왕은 제사장 사무엘로 부터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라고 책망을 받았는가?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버렸다는 점입니다. 즉 왕이기에 제사장의 직무까지 할 수 있다는 월권을 했습니다. 예배도 요식 행위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불충이요, 반역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에게 맡기신 영원히 거룩한 직무입니다(출29:9).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입니다.
1. 본문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자!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괴롭히며 싸움을 걸었던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사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아말렉을 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 잡아왔고 그 왕의 가축과 소유 가운데 모든 좋은 것을 남겨두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을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엘은 사울을 찾아 아침 일찍 떠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사울이 갈멜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고 해서 그곳으로 갑니다. 사무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본 사울은 그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나이까?" 그러자 사울이 둘러대며 말하기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속아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 하리이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그러자 사울의 버티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며 앞서 한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그때에 사무엘의 단호한 답변이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울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어기는 것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했다는 자백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의 눈치를 더 살피는 나약해진 사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울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약해지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면 사람에게 굴복 당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본문에서 왜 사울이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는가?
▶1절은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화려한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 명령을 받고 이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아말렉 성 깊은 골짜기에 진을 치고 아말렉 중요도시를 다 장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기고 거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8-9절을 보세요! 아말렉의 부하들은 다 죽었는데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 옵니다. 그리고 양떼와 소떼 그리고 가장 좋은 것, 가장 기름진 것을 챙기고 가치 없는 낮은 것만 진멸했다고 보고합니다.
왜 아각 왕을 사로잡아 왔습니까? 사울의 인기 전략입니다. 자신의 용맹성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전장 터에서 적장을 사로잡아 오면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영웅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11절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23절을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먼저 사울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반역하고 버린 것입니다.
3. 사울이 버림받은 절대적인 이유 몇 가지만 찾아보겠습니다.
①탐욕과 거짓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9절).
⑴욕심이 생겨 살찌고 좋은 양과 소를 죽이지 않고 끌고 왔습니다. 3절의 하나님의 명령은 '아말렉을 치되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짐승까지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⑵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을 책망하니까 양이나 소를 끌고 온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공인일수록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⑶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착복하려다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끌어왔다는 미명으로 위장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탐욕과 거짓으로 자신의 행위를 위장하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믿/
②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11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⑴세상을 향해 가다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회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향락과 방종의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방종이나 타락의 생활은 출발은 감미로워도 마지막은 비참합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는 제멋대로 자유를 만끽했고 인생을 엔조이할 수 있었습니다 만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갈 곳이 없고 쓸 것이 없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마저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깨닫고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여기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한 것이고 아들은 성도를 상징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진 재산을 모조리 탕진했고, 술친구며 주변에 맴돌던 여인들이 그의 곁을 떠났으며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품이었고, 또 하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의 위대한 회개입니다. 이 길이 살길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믿/
⑵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다가 세상을 향하여 떠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순종의 사람, 배신의 사람, 무지몽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떠난 가룟유다는 무지몽매하게 목매달아 자살하고 배가 터져 창자가 터져 나왔습니다. 시49: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울은 돌이켜 하나님을 쫓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22-23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거역하는 것은 사슬의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순종하는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잡지 않고 불순종하는 방향으로 돌이켜 인생을 걷다가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제물이나 제사가 아닙니다. 순종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듣는다.'는 뜻입니다. '듣는다는 말과 순종이란 말은 같은 말'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잘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성자 프랜시스가 수도원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왔습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아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도 생을 받아 드렸습니다.
그 때 수도원 농장에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젊은이들에게 배추 모종을 주면서 이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뿌리를 하늘로 하고 그 잎을 땅에 심으라고 하고 프랜시스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는 조금 심다가 말고 배추 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불평하고 뿌리를 땅에 심었습니다. 그러나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가 말 한대로 거꾸로 계속 심었습니다. 프랜시스는 석양에 나와서 보고 거꾸로 심은 사람은 수도 생이 되게 하고 옳게 심은 사람은 집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왜 입니까? 일이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결과가 어찌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순종이 중요합니다. 프랜시스는 두 젊은이의 순종을 시험한 것입니다.
순종은 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큰일을 맡긴다고 했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자꾸 자꾸 순종하다 보면 큰일에도 순종하게 됩니다. /믿/
작은 일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을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토레이 박사가 말하기를 '권능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우리가 그 권능을 받은 데는 오직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절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합시다.
신학자 '본 훼퍼'가 말하기를 '믿는 사람들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게 된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면서 믿음을 배워 나가고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이 성숙해 집니다. 시인 괴테는 '내 영혼은 언제나 순종함에 따라 점점 더 훌륭한 자유를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순종함으로 무한한 영적 자유를 경험했다는 고백입니다. 순종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증거입니다. 순종은 겸손입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순종을 통해서 더 겸손해 집니다. /할/
③그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습니다(12절 이하).
아말렉 전투에서 사울은 왕 아각을 생포하고 적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던 사울은 갈멜 지방에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승전비를 세웠습니다.
그가 기념비를 세운 것은 승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술과 전략이 뛰어 났고, 용맹이 작용해서 승리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시127편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승리와 구원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었고, 사울은 자신에게 두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차이입니다.
▶삼상7:12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자 맨 먼저 그가 한 일은 미스바로 백성들을 모으고 금식성회를 열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자'란 주제로 부흥성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소문을 블레셋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기도회에 모이고 있다. 기회는 이때다 그들이 금식하고 힘이 없을 때 쳐부수자." 그래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우렛소리를 발하여 블레셋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는 미스바와 센 중간지점에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같은 기념비입니다만 사무엘은 하나님을 위해서 세웠고 사울은 자신을 위해서 세웠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개인도, 권력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전쟁을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면 그만입니다. 어디 대고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까? 어떤 경우도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챘습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고 했습니다. "왜 너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느냐?" 책망하시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념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그는 분명히 했습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기념비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세상에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한다면 겸손함이 기념비, 순종과 헌신의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을 자신의 면류관이요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기념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라면서 그분을 찬양하는 믿음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를 통해 믿음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기념비, 섬김의 기념비, 헌신의 기념비, 사랑의 기념비, 전도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늘의 기념비, 십자가의 정신으로 가득 찬 헌신의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사울이 세운 기념비는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해 기도하던 사무엘 선지자를 밤을 새워 근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는 근심의 기념비였으며, 교만의 기념비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④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25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고 했고, 26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고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진멸하되 다 진멸하라!' 이 명령을 어겼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게 했습니다.
▶롬10장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첫째는 '로고스'라 했고 또 하나는 '레마'라 했습니다. '로고스'는 들려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레마'는 임하는 말씀, 내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들리는 말씀과 임하는 말씀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단 선지자가 삼하12장에서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책망합니다. 이에 다윗은 선지자의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드려 7일 동안 눈물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레마' 임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과 달리 임하는 말씀을 거역해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입니다.
4. 왜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①아말렉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먼저 아말렉의 원조를 알아봐야 합니다. 창36:12절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가운데 특별히 첩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에서가 누굽니까?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 형으로 태어났는데 에서는 영적인 축복권이나 하늘나라의 소망이나 장자의 축복권 같은 것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고, 단지 현실에 먹고 마시고 입는 쾌락에만 중심을 두는 자였습니다.
지금 배가 고픈 현실이 더 중요하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장자의 축복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습니다. 한순간의 만족을 위하여 영원한 기업의 보장을 포기한 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고후4:18)이라고 했고 고후5:17절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부귀영화는 순간이요 잠깐입니다. 에서는 한마디로 세상쾌락에만 신경을 쓴, 육신의 정욕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신본주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닙니다. 인본주의로 자기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히12:16-17절에 보면 에서의 전 삶을 한마디로 요약했는데 그를 어떻게 평했습니까? "에서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망령된 자로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얻으려고 눈물을 흘리고 구했지만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을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이 망령된 자는 세상 것을 최고로 아는 자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도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 인본주의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날 주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이를 갈며 슬피 울어 봤자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믿/
②아말렉 족속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갈 때 가장 큰 원수는 아말렉족속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족속입니다. 아주 치차한 민족입니다. 뒤에서 공격을 했고 또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공격을 했습니다. 지금도 서양의 전통에 의하면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연약한 어린 아이나 여자들을 공격하는 사람을 인간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출17:8절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1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그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은 쳐부수라고 했는데 거역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신 광야에서 모세로 하여금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신 이후에 아말렉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제일 먼저 만난 원수가 바로 아말렉입니다.
▶성경을 보면 두 사상이 흘러갑니다. 신본주의 사상과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아벨은 신본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인본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삭은 신본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인본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본주의 삶을 사는 자들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아벨보다는 가인이 먼저, 육신의 정욕의 사람 가인이 영의 사람 아벨을 괴롭혔습니다. 또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이 먼저 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씨 이삭보다 이스마엘이 먼저 나서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야곱보다 에서가 먼저 났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괴롭히는 아말렉은 무엇입니까?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육신의 정욕 때문에 명분을 팔아버린 사람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을 기억하라'는 것은 영적인 사람들을 괴롭히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집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만났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를 반역하고 딴 길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소돔 성으로 갔습니다. 이스마엘도 이삭과 같은 믿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기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갔습니다.
이들은 같은 혈육이요,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하나님의 후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지 않았던 롯은 결국 소돔 땅에 들어가서 자신의 아내를 잃고 사위도 잃었습니다. 두 딸과 함께 소돔 성을 빠져나왔으나 불행하게도 불륜의 씨앗을 남겼는데 그 후손들이 바로 모압과 암몬 족속입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은 계속 이스라엘과 싸웁니다. 이삭과 대결했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데려왔던 하갈에게서 낳은 씨요 이는 결국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아랍 족속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싸움은 정실부인의 자식과 첩의 자식간의 싸움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으나 에서는 에돔 사람이 되었고 또 그의 후손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대적했던 원수인 아말렉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의 사울 왕은 불행하게도 자기가 살려준 아말렉 때문에 죽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살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 모습을 보고 달려온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이 바로 아말렉인이었습니다(삼하1:9). 이 청년이 사울 왕을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사울 왕은 결국 아말렉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사울왕의 왕관을 아말렉이 벗겼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자가 쓰는 것입니다. 정치는 남을 누르고 이기는 세상에서의 승리입니다. 여기서 이긴 사람이 왕관을 쓰는 것입니다. 또 경기장에서 이긴 자가 면류관을 씁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쓰는 면류관은 다릅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만이 하늘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육신의 정욕을 이긴 자만이 하늘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할/
③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애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 혈육인 아말렉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께서 애굽 바로의 군대를 홍해바다에 다 몰살시켜 버렸기 때문에 한사람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 아말렉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아말렉을 쳐라'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최초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을 살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살려준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각은 자신의 모든 금은보화를 사울에게 주어서 '나를 살려주시오!' 사정을 했을 것이고 사울은 그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엄청난 보화를 뇌물로 받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울왕의 욕심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속에 두 마음이 싸움을 합니다. 내 안에 예수를 모시려는 영적인 마음과 세상을 왕으로 모시려는 육신의 소욕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자신을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자신의 정욕과의 싸움입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건은 모두 다 내 잘못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있는 육신적인 것들을 쳐 부셔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아말렉을 쳐 부셔야 합니다.
⑴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⑵탐욕도 버려야 합니다. ⑶교만도 버려야 합니다. ⑷불신앙도 버려야 합니다. 사울이 이것 때문에 망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육성과 영성입니다. 영성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이고 육성은 육신의 정욕을 따르려는 성품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좌우로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고, 또 바울은 외치기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습니다. 자신과 싸워 이긴 사람을 성자라고 합니다.
5. 사울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인가?
사울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봄으로 우리는 절대로 그의 전철을 밟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⑴성공했으나 실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왕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삼상31:1~6 보면 사울은 또 다른 전쟁에서 전사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상당한 후 자살해서 죽습니다. 그 아들들도 같이 전사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버림받은 인생'이요 '퇴짜 맞은 인생'입니다. 사울은 이래서 '성공 같은 실패'의 주인공이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인생이 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⑵사울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가? 명목상의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하고, 신앙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그의 신앙은 겉보기에 형식적으로는 그럴 듯했습니다. 제사를 꼬박 꼬박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입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흔히 '무늬만 가진 성도'라고 부릅니다.
마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⑶감사가 빠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빠지면 그 신앙은 거짓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괜히 스스로 '거물'인척 하면 '고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이름부터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고전15:10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겸손히 감사하며 사는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⑷그는 진실이 빠졌습니다. 신앙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정직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편재성을 믿는다면 진실과 정직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논을 속이려 듭니다. 뻔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나중에 들통이 나니까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간교한 모습을 보입니다.
⑸헌신이 없는 믿음 때문에 그는 망했습니다. 믿음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이유도 섬김과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오직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들을 챙깁니다(9절).
스코틀랜드의 경건한 장로 교인의 가정에 이런 가훈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 버는 것도, 우리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도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나눠주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말렉, 즉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비결은 항상 신앙으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모든 사건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미국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 당하자 나라가 어수선하여 온 국민들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고 있을 때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 가필드는 성조기를 들고 워싱톤 네거리에 서서 외쳤습니다. '대통령은 죽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미국을 다스립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할/
바로 자신을 이기고 믿음 위에 굳게 선 가필드의 모습입니다. 그는 후대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국사를 잘 다스렸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아말렉을 진멸하셔서 모든 불신앙의 조건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시고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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