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주일예배_요한복음 14장 25-31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예수님의 수난사에 대해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비교해보면 놀랍고 독특한 요한복음만의 특징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반복되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강력한 타자의 폭력에 의하여 예수님의 운명이 좌우 되는 것 같은 표현이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그들의 악행과 그들의 완곡한 자기 확신에 대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 의하면, 아쉬움이 일어나면서 전봉준이 잡혀가면서 호남의 민중들이 느꼈던 좌절감이 공관복음서에는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당국자들의 갈등은 힘의 비대칭성과 불균형성에서 오는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비췹니다. 유다가 배반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산헤드린에 좀 더 예수님을 변호해줄만한 유력한 의원이 몇 명만 더 있었다면, 또는 대제사장과 예수님 사이에 끈끈한 인적관계성이 있었다면 이런 참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수동태로 표현된 구절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누구에게 잃는다, 당한다, 버림받는다, 버림당한다, 고난을 당한다, 이런 수동태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강력한 능동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파라 디도미, 강력한 능동태,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적으로 말하면 힘이 달려 죽은 사건이고, 스파르타쿠스가 BC 70년에 3년간의 노예반란이 실패로 끝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겁니다. 전봉준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죽음은 세계도처에 깔려 있죠. 상당히 정당한 명분을 가졌지만 명분상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힘에 밀려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온 세상의 그런 죽음입니다. 힘이 약하여 옳지만, 장준하도 그렇게 죽었죠. 장준하, 정몽주, 그렇게 죽은 것 아닙니까? 옳지만 힘이 달려 죽은 것 아닙니까? 공관복음서적으로 역사를 쓰면 의분이 일어나면서 이런 죽음을 막아야겠다는 도덕적 십자군 느낌이 들죠. 그런데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하나님과 독생자이신 예수님 사이에 원초적 결단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인간의 우발적 변수적 행동들은 전혀 문제가 안 되고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를 주신 사건이고, 두 번째 독생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신 사건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함으로써 인간의 우발적 행동 때문에 예수님이 비참한 참변을 맞이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오고 간 깊은 대화, 우리가 포착하기 힘든 높은 단위의 영적인 교감, 서로에 대한 신뢰, 이걸 우리가 짐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으면 십자가 사건은 빌라도가 전혀 상관할 사건이 아니고. 우케이 아르콘 푸코스, 이 세상 임금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사여탈권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아버지 뜻을 성취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는데 내가 돌아가려면 순종을 통하여, 죽기까지 복종하는 이 복종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그 길은 아버지가 이스라엘 민족의 죄, 인류의 죄를 대신지고 죽는 어린 양의 길로 인생을 마쳐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버지 뜻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자발적으로 제단에 올라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거죠.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을 보면 빌라도적 박해자가 있을 수 있고, 유다적인 배신자가 있을 수 있고, 베드로적인 변절자가 있고, 내 인생을 어렵게 하는 관료적인 완강함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 같은 악의 삼각동맹 같은 구조가 내 인생을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내 인생을 십자가로 몰아넣고 나를 죽도록 강요하는 이런 역경들의 구조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이 모든 우발적 인간의 악행들을 없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결단이 가능하다는 거죠. 참 중요합니다. 내가 매장되기 원하는 사람이 있죠. 내가 끝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재기불능의 파산을 당해서 다시는 사회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들려고 나를 신체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죽여 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강도에 따라서는 약간 다르지만, 내가 승진하지 못하게 막는 사람도 있고, 내가 광채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대적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깊은 교제와 사귐의 맥락 안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은 나에게 트라우마를 주고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유다에 집착하게 되고 베드로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고 빌라도에 대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악행에 대해서 분노하게 됩니다. 나를 이런 역경의 한가운데 집어 던진 하나님의 목적은 내 인생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내 인생을 매장시키고 나를 영구적으로 재기불능의 파탄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 이것이 내가 겪어야 하는 고난의 총량이라면 내 인생에서 반드시 이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이 굴욕도 감수 하겠다는 결단이 우발적 악행 요소들을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있는 비범한 담대함이 생기고 그것이 바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함이라는 거죠.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함이라는 것은 나에 대한 참혹한 악행의지를 가지고 덤벼드는 대적들이 아버지 하나님 뜻을 성취하도록 내가 선이 되고, 내 죽음을 도와주는 겁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버지 뜻입니다. 나의 죽음을 도와주고 내가 굴욕당하고 패배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 뜻인데 나를 굴욕과 패배로 몰아넣는 악행자들과 대적들, 명백한 악이 내가 결심하기에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 뜻을 성취하고 목적을 이루어드리는 도구가 된다면, 나에게 일어난 가장 최악의 일도 내 인생에 서성대는 악당들의 동아리도 내가 아버지의 뜻을 순도 100% 순종하는지 여부를 판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소품이라면 절대적 평안이 온다는 거죠. 내가 힘이 약해서, 베드로를 불러서 예수님이 신파조로 이렇게 할 수 있죠. 베드로야 우리가 왜 이렇게 됐냐? 내 꼴이 말이 아니지? 우리가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다면 괜찮을 텐데, 왜 너는 친척도 한 명 없니? 왜 너는 산헤드린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전화 한 번 해봐라, 내가 유다를 뽑지 않아야 하는데, 유다 그놈이 그럴 줄 몰랐어, 인간에게 초점 맞춰서 해석하면 화를 남기고 앙금을 남기고 자책을 남기고 할 수 있죠. 그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겪기를 원하는, 나에게 저 말을 해서 영구적으로 동요되기 원하는 악행자들의 말의 영향력을 곱씹고 묵상을 하면 그 사람은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악행자들이 나에게 한 폭력적인 언사들과 흘겨보는 눈, 무시하는 말, 교란하는 말들을 듣고 그들의 언어로 내가 매장되고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길을 가겠다, 역설적으로 버림받고 제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는 이 경험이야말로, 이 생매장당하는 경험, 버림받은 경험, 굴욕적인 십자가를 지고 비참하게 죽는 경험, 하나님 아버지와 가장 완벽하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이 경험이야말로 내 순종의 극댓값이고 내 믿음의 극댓값이고 이런 순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아담인류의 죄를 영구적으로 대속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버림받고 가장 최악의 심판을 받는 이 자리에서마저도 아버지의 뜻은 선합니다, 아버지는 옳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믿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이 일이 아담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믿음이 된다는 거죠. 예수가 그의 삶의 극단에서 보여준 믿음과 순종과 신뢰는 빛의 속도로 하나님과 멀어져가는 인류의 모든 일탈과 타락과 패역을 상쇄하고도 남는 엄청난 우주적인 귀소본능을 일으키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신앙의 힘이 되는 거죠. 예수님의 언어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멀어질 수 없고 빛의 속도로 더 빠른 속도로 아버지의 품 안에 안기는 거죠. 이 처참한 십자가의 현장 안에서, 이건 너무 깊기 때문에 이걸 제가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낯섭니다. 요한복음이 너무 놀라운 것은 이해했다고 안심이 되는 순간 다음날 보면 또 다시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은혜가 된다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순간 그랬다가 또 다시 잊어버립니다. 정말 십자가의 진리, 내가 만일 이 순간적인 깨달음상태로 일상을 산다면 정말 두려운 게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일상생활을 이렇게 못 삽니다. 신파조로 나갑니다. 아이고 어째서 그러냐? 아는 사람이 없냐? 왜 군대에 아는 사람이 없냐? 검찰에 아는 사람이 없냐? 아버지 하나님 뜻을 이런 방식으로 성취해준 것은 참 이상하죠. 죄가 이상하기 때문에, 아담인류가 아버지하나님께 반역하여 일탈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등을 지고 불화상태에 빠진 과정의 이상함 때문에 그걸 만회하기 위한 독생자의 순종방법이 대칭적으로 이상한 거예요. 하나님이 sadistic하게 보이죠. 독생자에게 비상 먹어봐, 맛이 어때? 이걸 마셔야 내 아들이지, 꼭 이런 느낌이 들죠.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한 유치한 방법, 아버지가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채찍 100대, 곤장 500대, 인두 250도로 10번 쑤시기, 그래도 너 나 믿겠냐? 온 몸에 인두 상처가 난 아들보고 내 아들,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정상이 아니죠? insanity가 있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래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겠다고 소리치는 것은 마치 8살짜리 아이가 아버지의 폭력에 채찍에 500대, 혁대에 500번 맞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 같아요. 이게 그렇게 기괴하게 보여요. 이게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고 누구도 아버지에게 아들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해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입증해주길 기대하지 않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렇게 처참한 일을 당하면서도 아버지께 순종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주장의 불합리성, 우리 인간의 죄가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말이 안 되는 일탈과 타락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신뢰,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한 거죠. 독생자 예수를 보고 있는 한, 독생자 예수의 이상한 방식으로 아버지 하나님 뜻을 성취하는 이 극대값적 순종을 보는 한, 우리 하나님은 모든 인류 개체 인류 개개인들의 타락을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보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정말 어렵더라고요. 헬라어 성경을 새벽 4시에 올렸습니다. 하도 고민이 돼서요. 두시부터 묵상을 했는데 그 전날 분명히 깨달았거든요. 노트에 필기를 해놓고 내일 6시정도에 기록해야 하는데 잠이 깬 거예요. 나는 이해한 것이 아니다, 다시 본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싸해졌습니다. 머리는 띵하고 이해는 안 되고, 큰일이네 이거, 헬라어를 다시 읽으면서 번역을 다시 하면서 또다시 깨닫게 됐습니다. 토요일 주일이 빨리 지나가길 저는 바랍니다. 제가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놨는데, 만일 내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지 않고 떠나기만 하고 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끝난 거죠. 내가 육체로 떠난 것이 영적으로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함이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보혜사 성령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믿고 평안을 누려라, 40일 동안은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이 올 것을 믿고 가불의 평안함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받지 않고 또 다른 보혜사가 올 것에 대한 믿음 때문에 평안을 유지했으니까 일종의 평안, 샬롬을 가불하여 앞당겨 쓴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다음주가 성령강림절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기 전 지상에서 10일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현존 없이 엄청나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때는 또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샬롬을 누렸습니다. 그 증거가 마가의 다락방 제자들은 온 집에서 120문도가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집과 같은 아늑한 유대감 속에서, 집과 같은 가족적인 연결 속에서, 집과 같은 가족적인 신뢰와 공동체적 열망 속에서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예수님으로 오실 것, 예수님의 요청으로 오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요청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낸다는 말은 예수님이 요청했기 때문에 보낸다는 말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재현하고 대신할 것을 의미하여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 이런 말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오시면 경험하는 샬롬 시대가 열립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샬롬을 누릴 것을 기대하면서 먼저 누립니다. 시험을 잘 친 사람, 시험을 잘 쳤다는 말은 시험 결과가 발표날 것을 기대하면서 샬롬을 먼저 누립니다. 발표가 났습니다. 진짜 자기가 받은 성적을 보면서 샬롬을 누립니다. 그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샬롬 평안 에이렌은 세상이 주는 에이렌과 다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것과의 결속 속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세상은 큰 기업, 복지가 아주 잘 된 기업에 들어가면 평안을 누립니다. 사대보험이 될 뿐만 아니라 자녀들 장학금까지 주는 회사에 들어가면 유사구원감이 발생합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저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과 결혼하면 우주적 평안함이 몰려듭니다. 그 뒤는 어떻든가 평안이 옵니다. 나에게 엄청난 힘이 되는 존재와 결합할 때, 내 은행잔고가 많을 때, 적어도 내가 부동산이 많을 때 신적안정감이 있고 무언가 온유함이 있습니다. 대부분 돈이 많은 사람은 평안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어딘지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평화가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아도 돈이 많으면 웬만한 걸 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벤츠 긁어도 7천만 원 물어주면 됩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우리는 벤츠가 지나가면 손이 경직돼서, 지나갑니다, 벤츠는 긁으면 3천 5백만 원 물어준다는데, 보험회사에 직원이 평화를 앗아갔습니다. 1만 km이하 뛰면 5% 돌려주는 흥국 화재보험에 들어서 하루에 27km이하를 타면 5% 다시 돌려받습니다. 벤츠가 굴러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세요? 벤츠가 난리도 아니에요. 고객님만 몰라서 그러는데, 제가 보험료를 48만 2천원 내고 있거든요. 3년 계속 줄어드는데, 가끔 운전합니다. 지나가라, 정말 요새 기도하길래 주여 제 옆에 벤츠가 지나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그런 게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사장이 자기는 월급 안 받고 1 달러만 받겠다고 한 사람이 있어요. 빌 게이츠는 MS 마이크로소프트 취직하면서 월급 1달러 받겠다고 했잖아요.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돈이 주는 엄청난 위안의 힘이거든요. 돈, 아는 사람이 많은 것, 인맥, 어장관리의 튼튼함, 전부 다 힘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그런 겁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영속적으로 발생하는 평안이 아니라 타자, 외부 요소에 지배당하는 의존하는 평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보증하는 평안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성령을 내 안에 보내주셔서 생명의 영을 내 안에 보내주셔서 내 삶을 성령의 활동사역권 안에 동선을 배치시켜주는 절대적 안보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삶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상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절대평안입니다. 제자들은 절대평안을 선물로 주는 예수, 이 절대평안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때 우리 마음에 realization이 됩니다. reality가 됩니다. 현실이 되고 성령 충만하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면 강력한 마약을 먹은 효과와 같이 엄청난 정신이 탈구된 것 같은 희열에 빠지고, 새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고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 아니라 주장하고 마치 내일 세상이 끝나서 예수님이 재림할 것처럼 느끼는 무시무시한 시간관을 갖게 됩니다. 너무 충만하면 곤란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가 바보 이반처럼 바뀌어 버립니다. 절대평안은 그런 겁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루살렘 당국자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너희의 인생을 좌우할 것, 너희 생명을 여탈할 것을 걱정하지 말고 너희들이 나에게 3년 동안 전 재산을 바치면서 추종하고 따라다녔던 삶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투자금을 받아서 투자도 하지 못하고 부도수표 날리는 건축 시공주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 반드시 돌아온다, 너희들이 거할 곳을 만들어놓고 반드시 돌아온다, 내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믿고 평안을 누려야 한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임을 여러분이 들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고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은 아담인류의 죄를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고 상쇄시키는 극댓값 순종과 신뢰를 바치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살기 위하여 나는 기꺼이 죽음도 감수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순종을 100% 하기 위한 것이고 아담인류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것을 순식간에 회복시키기 위함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당시 때까지 궤도를 일탈하고 하나님과 멀어진 이격을 하나님과 결속시키기 위하여 이 길을 간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이스라엘 구원사가 완성되는 것이고, 인류의 구원사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는 길은 우중충함으로 비장한 느낌이 들더라도 사실은 엄청난 우주적 희열이 있고, 아버지와 독생자의 굳은 결심과 세상이 채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교감의 역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는 이유다,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당혹하지 말고 황당해 하지 말아야 한다, 내게 일어나는 시나리오, 유다가 배반하고 내가 붙들려가고 심문당하고 굴욕을 당하고 뺨 맞음을 당하고 꽁꽁 십자가에 못 박혀 쳐죽음을 당하는 사태를 볼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렇게 말해주는 이유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일뿐 어떤 지상의 권력자도 독립적인 변수도 제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그는 나에게 생사여탈권을 갖고 좌우하지 못한다, 31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놋뱀처럼 들려 죽임을 당하여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아들 독생자는 놋뱀처럼 들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들리는 놋뱀이 되기 위해서 이 길을 간다, 세상 사람들이 곧 알게 되고 너희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된다, 대한민국 단군자손의 후손까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 진리가 오늘 우리까지 도착했습니다. 이 진리가 온 세상 만민이 알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온 세상 만민들에게 보편적으로 퍼져서 이 진리를 상식으로 보급하는 사람들이 모여 동아리를 이룰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이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는가, 구원의 논리를 해명하는 하나의 본문으로 읽을 수 있고, 또 적용하는 거죠. 우리는 주님처럼 독생자의 어린양으로, 독생자도 아니고 어린양도 아닌데 우리는 죄인으로서 벌 받기도 하고 고난 받기도 하고, 한마디로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이 안 될 수 있는 너저분한 고난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본문을 읽고 주님은 그랬다 치자, 우리는 어린 양도 아니고 독생자도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지시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엉망진창인 나라에 살고 있다, 내 주변에는 이런 영적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나를 핍박하는 저 악당도 우주적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섭리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동물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버림받고 수치를 당하고 생매장 당하는 것, 삼중적 수동태의 경험, 십자가에 있는 삼중적 버림받음 수동태 경험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죠. 첫째 내가 내 죄 때문에 이런 곤경을 초래했다면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경험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경험이라도 벌 받는 것이지 죄를 속죄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사기를 치고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가서 벌을 받습니다. 벌 받는다고 내 죄를 속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감옥 가서 사는 징벌은 내가 받지만 징벌자체가 속죄를 가져오지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징벌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징벌 경험 + 속죄경험이 되기 때문에 주를 영접하고 나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얻기 때문에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죄가 없는데 당하는 고난은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과 같은 고난이기 때문에 유사 대속적 기능이 있고, 내가 속한 삶의 맥락 안에서 어딘지 모르게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는 섭리가 있습니다. 이건 사람마다 잘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죄가 없는데, 내 죄가 아닌데 고난의 파도가 밀려오고, 오히려 내가 믿음이 좋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믿음이 없다면 안 당해도 되는 것이 내 양심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고난을 자초하는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어린양의 고난과 유사한 고난이고, 속죄의 의미가 있고 속죄적인 의미를 갖는 고난이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수난을 당하고 내가 매장당하고 죽임 당하는 것은 의미 있다, 지금 당하는 이 고난에 죄가 없지만 내가 당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짐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 고난을 져야 마땅할 누군가가 용서가 되고 각성이 되고 영적유익이 된다면 내가 하는 게 낫다, 이런 고난은 요한복음의 적용이 가능한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죄도 아니고 섭리도 아니고 엉망진창인 고난이다, 대부분 이런 고난입니다. 둘 중에 하나면 좋은데 개인적으로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굳이 분별하자면 일주일 내내 그 사람의 말을 청취해야 하고, 동선을 포착해보면 응답되지만 본인이 진술해야 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의 죄와 나의 어설픈 영성이 결합하면 아주 너저분한 고난이 옵니다. 포괄적으로 이 안에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아담인류의 죄에 대한 응벌로서의 고난이 있고 대속의 고난이 다 있다면 세 번째 고난도 그렇게 보거든요. 홀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신적 유기감, 아무도 없고 고아처럼 내버려졌다고 해서 심하게 요동하고 근심하는 상태가 오늘 본문이 극복하고자 하는 상태잖아요. 내가 죄 때문에 심하게 요동하고 근심하면 샘물과 같은 예수 이름을 믿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됩니다. 내 죄 때문에 근심하지 말고, 내가 의로운 길을 걷다가 엄청난 고난을 자초했다면 그 동요와 근심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간섭과 내섭을 통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개가 섞여 있다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내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기도하고, 영분별을 해달라고 기도하면 전자의 고난도 될 수 있고, 성령 안에서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해명해줄 고난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깊은 동요와 근심을 이겨갈 수 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오심으로 해소하지 못할 깊은 근심과 동요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오늘 어떻게 되는가? 나는 누굴까? 총체적 판단과 마비를 가져오고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냉담을 가져옵니다. 근심과 동요는 하나님을 향해서 툰드라적 한랭전선을 엄청 만들어서 예배에 반격을 해버립니다. 가장 빠른 것은 성령이 풍성하게 역사하는 예배에 참여하면 가장 빨리 냉담이 없어집니다. 성령인 충만한 예배, 성령이 충만한 기도회, 성령이 충만한 사람과의 영적인 멘토링을 경험하면 냉담상태가 빨리 없어지는데, 제가 볼 때는 우리 교회는 예배가 많이 빈곤합니다. 좋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훨씬 더 하나님 임재를 많이 느낄 수 있는데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부족합니다. 찬양만 잘 드려도 설교 들을 필요 없이 헌금 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찬양도 모자라고 설교도 모자라기 때문에 아직까지 성령 충만한 예배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기회를 가지는 겁니다. 진짜 성령 충만한 예배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서 고난 중에 있고 깊은 동요와 근심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예배에 한 번 만 참석해도 힐링을 경험하고 또 다른 보혜사의 어루만짐을 경험할 수 있는 고전적 classic한 진짜 예배를 회복했으면 좋겠다, 저는 그런 간절한 열망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해주셔서 우리 가향교회가 빈들에 메마른 풀과 같은 공동체지만 어떻게 하면 깊은 근심과 동요 속에 영적으로 급격하게 냉담해져가고 영적 기력을 회복할 길이 없고 저 심해에 있는 산호초처럼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영적 직립 보행자처럼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런 아쉬움, 그런 간절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죽여 버리려고 우리를 생매장시키려고 산 자의 땅에서 끊어버리려고 살기를 가지고 쇄도하는 어둠의 힘 앞에서도 우리 주님은 아버지에 대한 끈끈한 신뢰로 죽음의 공포, 신적 유기감의 공포를 이겨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고아처럼 버려진 상태에서 세상이 조장한 근심과 두려움에 지배를 당하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주님이 나를 보듬어 안아주지 않는다는 심각한 고독감, 이런 것이 우리를 세차게 진동합니다. 하나님 정녕 우리가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고 어린 양의 피보혈의 공로를 찬송하고 기도함으로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신적 연결감 우주적 결속감을 허락하여 주소서. 한 번 예배만 드려도 한 번 기도회만 참석해도 세상이 조장하는 냉담함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격 감사하여 바친 헌물을 하나님 친백성, 교회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아낌없이 소생시키는 데 써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있는 이 물질이 우리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는 없어서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고 영양이 부실하고 공부의 꿈도 펼치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쏟아지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독생자의 마음으로 돌보는 신적인 풍요 신적인 대범함 신적인 자애가 넘치는 공동체 되기를 원합니다. 흔들리는 직장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벌어들이는 소득을 감격으로 바쳤던 성도들을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고 그들의 가정과 자녀도 축복하여 주소서. 직장이 흔들려서 생업이 불안정한 아들딸들 있습니다. 하나님 꼭 붙들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실패하여 재기하는 형제들 있습니다. 주님 소생시켜 주소서. 되살려 주소서. 귀한 예배를 우리 몸 전체를 봉헌 합니다. 받아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평안 창조하여주심의 역사가 깊은 동요 속에 불안과 근심 속에 삶의 중심이 흩트려져버린 하나님의 자녀들 위에 그들의 일터 위에 가정 위에 자녀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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