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1부 예배-요한복음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한복음의 유명한 자기 계시 1인칭 단수, 에고 에이미, 1인칭 자기계시 선언이 요한복음 특징입니다. 요한복음에 7가지의 자기계시 선언이 나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선한 목자라' 이런 일련의 선언은 7가지로 나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곱씹어 볼만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언어들은 구약적 울림이 깊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내용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큰 울림을 주는 말씀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 원래 세상의 빛은 누구에게 주신 사명이었죠? 이사야 42장 1-6절에 보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하나님이 누구에게 집단적으로 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줬죠. 집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방이 빛이라는 사명이 예수님 자신에게, 집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사명이 예수님 개인에게 한 점으로 응집됩니다. 집단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사명이 예수님 개인에게 와서 concentrated 집중돼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순종을 지금 성취합니다. 누가복음 24장 27-44절에 보면,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걸 제가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이 말씀을 들을 이상적인 순종자를 예상하며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셨어요? 이 말씀을 순종할 이상적인 순종자를 가리키면서 하신 말이죠?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했는데 개개의 순간에 실패했던 불순종을 예수그리스도가 종말에 대반전으로 역전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주어진 모든 계명을 책임지고 성취하니까, 나를 가리키는 말이 되죠?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나를 가리킨다는 말은 이상화된 하나님의 백성,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되죠. 이걸 이해하면 구약성경이 굉장히 깊게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빛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은 가장 먼저 나오는 테제와 안티테제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기지 못하였다가 더 맞습니다. 어둠이 빛을 몰아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원리적으로 보세요. 캄캄한 어둠가운데 빛이 비추면 어둠이 빛을 몰아낼 수 있습니까? 원리적으로 어둠은 항상 빛에게 수동 상태에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면 어둠이 감싸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어둠상태에 있다는 걸 전제하는 말입니다.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어둠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영적 교제 상태에 있지 못하는 것이 어둠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어둠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어둠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이 비췰 때까지는 멸망 가운데 있습니다. 결국 요한복음에서 어둠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자기만족적인 자기 폐쇄적인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 지금 정확하게 유대인 공동체가 어둠입니다. 예수님이 볼 때 왜 유대인 공동체가 어둠이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은 없으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만든 일련의 율법조항을 너무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그 율법조항 몇 가지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헛된 자만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어둠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유대인의 공동체는 어둠의 공동체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어둠의 공동체를 유대인과 바리새인 공동체가 경험하는 거죠. 그럼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교제, 영생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의 모조품 유사품을 추구하며 삽니다. 영생의 모조품은 무엇입니까? 20대 때는 사랑입니다. 격렬한 연애가 20대 때 모조품입니다. 30대 때는 직장에서 급행출세, 연봉이 높고 사회적으로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갖는 것이 영생의 모조품입니다. 50, 60대 때는 건강하면서 하루 종일 골프치고 맛있는 것 먹고 사우나하면서 살면서도 연금 300만원 받고 사는 것, 철따라 골프 치러 세계만방에 다니는 것, 80, 90대 때는 3일만 아프다가 죽는 것, 우리 한국 사람들 또는 세계 만민이 생각하는 영생은 세대마다 다르지만, 이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추구하는 영생과 다릅니다.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이 남들이 볼 때, 저렇게 살면 멋있겠다, 영생의 모조품, 중국 광동에서 나오는 짝퉁 악어가방 같습니다. 짝퉁 악어가방과 루이비통이 만든 악어가방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루이비통 악어가방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광동에서 만든 중국판 짝퉁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에 가보면 이것 중국산 아닙니다, 라는 어설픈 한국말이 쓰여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가게에 가면, 파리 뒷골목 가면, 이것 중국산 아니에요, 로마든 뭐든 온 세상 관광지에 가면, 이거 중국 것 아니에요, 맞춤법은 물론 틀립니다.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써 놓습니다. 우리가 중국산 짝퉁에 속아 살듯이 격렬한 사랑, 한눈에 반해버리고 싶은 멋진 연인을 만나는 것, 20대까지는 아마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대까지는 유니세프 아프리카 고아 문제 눈에 안 들어옵니다. 내 안에 연애가 안 되고 영생이 안 되는데 무슨 세계문제 남북통일, 웃기는 일입니다. 20대는 남북통일 생각 안 합니다. 눈 오는 날 데이트할 사람도 없는 내가, 절대 궁핍한 내가, 이런 생각을 하죠. 3,40대는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연봉 얼마야? 얼마 안 돼, 많이 깎여서 1억 8천만 원밖에 안 돼, 이렇게 말하는 것, 5,60대는 주로 어디 사니? 어디로 골프코스 가니? 아직도 국내 골프코스 돌아? 이렇게 하는 것이 일종의 짝퉁 영생입니다. 대한민국 남자들 부자들이 사는 건 결국 이런 겁니다. 절대로 돈 많은 사람들이 고상한 걸 추구 못해요. 돈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고상한 걸 추구하면 이미 돈 없는 상태가 돼요. 왜? 이웃 사람을 위해 다 바쳤기 때문에 골프 코스를 돌 돈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 속에 유사영생, 짝퉁영생, 대한민국의 속물근성적 영생을 쭉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둠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즉 영적 무지 몽매상태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납니다. 창세기 1장 3절 Let there be light, There was light.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가 새로 시작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If anybody in christ, '새로운 피조물이라' he or she is new creation.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창세기 1장 3절이 새로 시작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창세기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당부하면서 자매님을 풀어줍니다. 이때 이 자매님이 느낀 것은 생명의 빛을 얻은 사람이 된 거죠. 마가복음 12장 41절에 보면, 연보궤 앞에서 예수님께서 연보하는 것을 가만히 관찰하시다가 과부가 온 재산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과부가 온 재산을 다 넣었다면서 이 과부의 헌금이 절대치로 최고라면서 칭찬하는 장면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가 3주 전에 설명할 때 요한복음 8장은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마지막 수난주간 일주일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했죠? 그 이유가 8장 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정확하게 마가복음 12장 41절 이후에 나오는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가르친 그 장면입니다. 수난주간에 있었던 본문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하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둠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유사짝퉁, 유사영생, 속은 죽음으로 질주하지만 겉은 매우 생명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남자 또는 여자가 사는 인생이 유사영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의 공동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에 잡혀 있지만 교회도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별다른 영생 보여줄 것 있어? 교회의 음란한 목사들 천지 아냐? 칠계명 어기면서도 세습하면서 교회 헌금으로 엄청난 기업을 운영하는 타락 천만한 지옥 갈 사람들이 분명한 그런 목사들의 영적지도 아래 있는 교인들은 영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영생이 무엇인가를 만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또한 어둠에 잡힌 세력으로 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밤마다 머리를 푸는 남자 또는 여자의 삶을 뛰어넘는 영생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건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즉시 포기하는 순간 영적 중립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단한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순종을 계속하는 일을 그치는 순간 어둠에 포획돼버립니다. 여러분은 이게 무슨 말인가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미완료시제, 따르기를 계속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아클로두메오입니다. 이것은 미완료 시제로써 따르는 일을 계속하는 겁니다. 미완료시제는 따르는 일을 계속 쉴 새 없이 하는, 그런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따라다니기를 포기하거나 일시중지한 사람들은 영적 중립상태에 놓이지 않고 즉시 어둠의 세력에 포획되어서 어둠에 끌려갑니다. 어둠의 세력에 포획되면 두 가지 상태가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5장 1-14절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이고, 요한일서 2장 1-17절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유사짝퉁 영생추구행위입니다. 에베소서 5장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타락한 영적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를 다 갖췄습니다. 탐욕추구자는 음란추구자입니다. 그 더러운 이름은 정치적 연루를 통해서 이권을 얻는 겁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어떤 헛된 말?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는다는 거짓된 구원론, 교회만 다니고 헌금만 다니면 항존직 선거에 당선만 되면 구원받는다는 것, 여러분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됐다는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와 함께 하면 안 됩니까? 7계명 어긴 목사님 밑에 들어가서 영적지도를 받으면 안 됩니다. 교회 헌금 100억을 MMF에 투자했다가 50억으로 절단 내는 악한 탐욕의 목사들 밑에 교회 함께 다니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빛의 자녀들의 특징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빛의 자녀인가 아닌가를 아는 방법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그 일에 오늘도 저를 써 주십시오,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게 빛의 공동체입니다. 이게 빛의 자녀들입니다. 요한일서 2장 7-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은,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인격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성으로의 완전한 개종이 지상에서 일어납니다. 이때 완전한 개종이라는 말은 지금 완성되지 않고 일생을 거쳐서 완성됩니다. 성숙한 내적인 인격자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매력적 인격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생명의 빛을 얻지 못한 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력적입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자기 절제를 잘하고 자기부인을 잘하고, I'm sorry, 내가 미안하다고 하고 화해를 주도합니다. 품성의 변화가 생명의 빛입니다. 둘째 빛의 공동체에 참여함,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여서 내가 그 공동체에 속했다는 이유로 성장하는 걸 경험합니다. 참 중요합니다. 셋째 이 세계 안에서 어둠을 압도하고 어둠을 이기는 선교사역에 동참함, 우리가 수세적으로 빛의 공동체에만 거하면서 자폐적으로 isolated 되게 고립된 공동체에만 살지 않고, 이 세상의 어둠을 비춰내며 들춰내며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강남스타일이 매우 죄악된 방식이며 지옥에 갈만한 삶의 방식임을 들춰내는 것이 바로 빛 가운데 행함, 빛의 선교사역에 동참함, 빛의 선교사역은 들추어냄 이끌어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죄를 들추어낼 뿐만 아니라 세상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내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빛의 선교사역에 동참함, 첫째 성품의 개조, 둘째 빛의 자녀들 공동체에 동참함, 셋째 빛의 들추어내는 사역과 빛의 인도사역 지도력 사역에 참여함, 이걸 우리는 선교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완전케 되지는 않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계속 점진적으로 하늘의 푯대와 상급을 향해서 전진하지만 정진의 정진을 거듭하지만 로마서 8장 23절처럼 우리 몸이 속량 받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유혹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로부터 온 구세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케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준비를 한다는 말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내 주변 사람들이 구원받았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 사는 모습, 내가 의인의 회중에 들었는가를 잘 보면서 내가 넓어가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둠 중에서 가장 큰 어둠은 빛을 가장한 어둠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가 어둠에 있다는 걸 압니다. 인생을 개차반처럼 산 사람들은 자기가 어둠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할 때 빨리 듣습니다. 자기가 어둠에 사로잡혔다는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금방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자기의가 가득한 종교인들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적개심이 일어납니다. 왜? 나와 경합하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나를 보완하고 나를 살리는 빛이 나타났다는 메시지를 세리와 창녀들은 들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 성경 안에 다 있습니다. 열심히 읽으셔야 해요. 우리 개신 교우들은 성경말씀을 스스로 읽지 못하면 루터와 칼뱅의 후예가 아닙니다. 자기를 빛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방식을 볼까요? 일곱 가지 화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9-31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누가복음 3장 6-14절에는 이런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세리와 군병과 죄인들이 몰려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둠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스스로 진단하고 자각하는 것만 하더라도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감청할 수 있는 영적감수성이 크게 자라나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자기들이 빛이라고 생각했느냐? 자기 희생물인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있었거든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가 빛인 겁니다. 자기가 빛이기 때문에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어둠입니다. 자기는 빛이고 여인은 어둠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불교도들이 어둠이고 남묘호랑교가 어둠이고 우리는 빛이라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어둠이고 우리는 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성경을 너무 안 읽습니다. 성경의 근본정신을 기독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과 똑같습니다. 첫째 술 담배하지 않는 음식법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다, 둘째 주일날 교회가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다, 그다음 우리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거룩하다, 우리는 세례 받았기 때문에 거룩하다, 세례 받았다는 증서, 안식일 지켰다는 증서, 술 담배 카바레 하지 않는다는 증서 이 세 가지, 유대인들이 그렇게 금과옥조처럼 음식법을 지켰다는 이 세 가지 때문에 오늘 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영적 지도력 아래 있는 정확하게 유대인과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영적지도력 아래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빛을 가장한 어둠인 것을 아시고, 나는 빛이다, 너희가 빛이 아니라 나야말로 빛이다, I am a light, 이때 에이미라는 인칭대명사가 쓰였습니다. 헬라어에서 인칭대명사가 쓰이는 경우는 돌출적으로, 에이미 포스 코스모,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에이미만 해도 됩니다. 에이미만 쓰면 일인칭 단수 be동사입니다. 에고 라는 대명사를 돌출적으로 쓰는 경우는 다른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들이 세상의 빛이 아니라 나야말로, 누가 세상의 빛입니까? 세상의 빛은 죄를 들추어내지만 다른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를 죄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용서함으로 어둠 가운데 포획된 여인을 빛 가운데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유명한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간증을 여기 실은 겁니다. 어둠에 사로잡혔던 여인을 빛으로 포획해 낸 그 사람이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단죄하고 비난하면서 자기는 마치 모세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옥황상제나 하나님의 심판자리에 있는 것처럼 세상을 정죄하면서 자기를 그럴듯하게 심판자리에 앉혀놓고 죄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야말로 짝퉁 빛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개인의 품성을 변화시키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여인을 포획된 어둠에서부터 건져내어 빛의 공동체로 보내주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죄사함 받는 것이 흑암의 권세에서 풀려나서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이주하는 겁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 사람들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완전히 의인이 되지 못하고 지상 안에서는 여전히 육체 안에서 투쟁하는 이유는 우리가 몸의 속량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짓는 죄는 성화를 촉진시키는 죄라고 했죠? 다시 말해서 죄책감에 빠져서 구원을 잃게 만들고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드는 죄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갈구하게 만드는 죄라고 했죠? 즉 구원을 받는 근심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백성이 짓는 죄는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하게 만들어서 성령의 근심을 공감하여 성령 충만을 애타게 갈구하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에, 그 죄는 성도의 성화를 촉진시키는 죄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좋은 죄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좋겠지만 그래도 몸의 속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고 시기와 질투를 할 수도 있고, 일순간 탐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 19-23절에 보면 성령 충만을 갈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개인의 품성 변화, 죄의 포획으로부터 건져주심, 둘째 빛의 공동체에 참여함, 빛의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말은 삶을 나누는 공동체에 참여함, 공동체에 사는 사람도 빛의 공동체에 참여하지만 우리가 자주 만나서 우리 삶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빛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같은 데 살지 않지만, 양목사와 저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목사가 저를 다 압니다. 제가 어떻게 사는지 다 압니다. 제 아내가 저를 다 압니다. 우리 삶의 동선이 투명하게 노출돼서 다 압니다. 우리 고민도 압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다 압니다. 이게 빛의 공동체입니다. 빛의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말은 나 혼자 죄의 힘 앞에, 죄의 유혹에 시달릴 때 빛의 공동체가 금방 도와줍니다. 셋째 빛을 들추어내는 사역과 빛의 선교사역에 동참함 즉 안도, 이끄는 사역, 죄를 용서하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상속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케 되는 사역에 동참함, 이것이 우리가 빛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가향교회 공동체 여러분, 여러분이 공동체 생활을 밀접하게 하게 되면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을 때보다 죄는 이길 수 있는데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또 다른 죄와 걸림돌을 자아냅니다. 참 놀라운 것은 빛의 공동체에 들어갔는데 따로따로 있었을 때는 드러나지 않던 모순이 우리가 완전치 못한 상태에서 또 드러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집단적으로 죄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데 공동체 구성원 안에 interpersonal 한 relationship에 문제가 발생해요. 헨리 나우웬이 쓴 <제네스 일기>를 보면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나옵니다.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도 읽어보세요.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 그다음 로렌스 형제가 쓴 <하나님의 임재연습>도 읽어보십시오. 수도사들에 관한 많은 글들을 보면 공동체 생활 자체가 또 하나의 어둠이라는 걸 고백합니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어떤 수도원이 있는데 수녀들이 1년에 5명씩 미쳐 나가는 수도원, 이런 묘사가 나옵니다. 그 수도원에 장발장이 피난을 갑니다. 1891년에 나온 소설인데 수녀원이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수녀들 사이에 왕따를 당한 수녀가 미쳐서 나갑니다. 공동체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어둠을 완전히 극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촘촘하게 만난다, 물리적으로 사는 공동체 아닙니다, 아주 밀접한 친교 교제권 하에 사는 사람들마저도 이 모순을 범할 수 있어요. 심지어 너무 자세하게 죄를 고백하다가 나중에 실족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저한테 너무 투명하게 죄를 고백하다가 저를 멀리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상담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그런 걸 상담하고 나면 수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 나면 저 양반이 내가 옛날에 한 그 말을 가지고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설교자들은 되도록 모르고 하는 게 좋습니다. 장님 눈감고 하듯이 해야 유리합니다. 상담하는 사람은 설교하면 안 되고 설교자는 상담하면 안 된다는 해석이 예배신학에서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영적으로 투명한 교제권에 속했기 때문에 많은 장점이 있는 반면에 예기치 않는 어둠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가향공동체는 아직까지 많은 영토를 확장한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향공동체의 영성신학은 불원간에 한국교회에 선한 빛의 영향력을 맺을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단히 남들 보지 않는 곳에서 순종을 누적시켜가서 빛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는 감격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성대로 변화되도록 오늘도 역사하시고 내일도 역사하십니다. 아침마다 생명의 빛 되시는 말씀을 읽으시고 자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만나서 빛의 자녀 공동체에 속했지만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의 세력은 완강하게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유사영생, 짝퉁영생을 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부러워하기도 하고 때때로 내가 잘못 사는 게 아닌가 내 길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가지 확신합니다. 우리 주님의 길을 따르기를 쉼 없이 하는 저희에게 생명의 빛을 허락하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빛을 상당히 만끽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우리는 우리 몸을 속량을 때까지는 완전치 못하여 자주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칠전팔기하면서 조롱하지 말고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내게 일어난 구원을 의심하지 말고, 빛의 선교사역에 용감히 참여하는 저희 되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향 형제자매들 이들이 공동체 생활하면서 크고 작은 아픔과 상처가 있을 때마다 공동체 사역을 의심하지 말고 주님 주신 위로로 더 큰 성장을 맛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한국교회가 가향공동체 같은 작은 공동체를 통하여 쇄신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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