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롬 8:31-39)
롬8장은 성경 전체 1,189장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리고 가장 사랑을 받는 장 중의 하나입니다. '스페너'라는 신학자는 "성경을 한 개의 반지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반지의 보석에 해당하고 그 가운데서 8장은 보석 중 가장 빛이 나는 부분이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31-39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누릴 영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보석 중에 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31절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이 말씀을 일인칭으로 바꾸어 보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이 말씀 믿으시면 큰 소리로 아멘 합시다. ◀제목소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경제논리입니다. 정부의 최대관심사는 사실 경제입니다. 경제가 무너지면 아무리 정책을 잘 제시하고, 아무리 교육이나 문화정책을 잘 하고, 아무리 국민들에게 달콤한 슬로건을 내 걸어도 그것은 신임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모든 일들이 경제논리로 이루어져 가는 측면을 보게 됩니다. 국가외교도 고상한 것 같지만 전부 돈 싸움입니다.
유행도 경제논리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유행이 화려하고 패션이 화려한 것 같지만 그 화려함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논리입니다. 이라크 전쟁은 군사논리로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경제논리가 그 뒤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루어 가는 역사의 진행 속에는 경제논리가 항상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치논리입니다. 법대로 해도 안 풀리는 문제는 정치로 풉니다. 그런데 정치로 푼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법으로도 안 되는 것을 풀어서 좋게 만드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정치논리라는 것은 서로간에 만남이고 대화이고 나눔이고 서로 주고받는 거래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사가 어떻게 보면 정치논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 번째는 신앙논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그 속에 답이 나오는 것, 즉 신앙으로 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경제논리로만 추구하고 정치논리로만 좇아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신앙논리가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보다 앞서야 합니다. 이 신앙논리를 무시하면서 경제논리를 앞세우고 정치논리를 앞세우면 안됩니다. 우리는 신앙논리가 굉장히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캥거루라는 짐승은 덩치에 비해 새끼를 아주 적게 낳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눈도 못 뜨는 새끼가 몸부림을 치면서 어미 주머니를 찾아서 들어가서 젖꼭지를 물고는 거기서 몇 개월 자라나야 캥거루 모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경제논리로 설명합니까? 정치논리로도 설명이 됩니까?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가 눈도 안 뜬게 에미 품을 알고 에미 젖꼭지를 알고 살려고 빠는 것을 보십시오. 누가 교육을 시켰습니까? 그건 신앙논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리고 자연만상을 지배하신다'라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볼 때 아멘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기적의 나라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북쪽에는 김씨가 살아서 공산당이 저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공산혁명사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도 안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 북한이 지금 경제논리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단물만 빨아먹자는 식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일인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남한은 지금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이 나라에 석유 소비량이 조금 있으면 세계 동메달 감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가만히 보면 그렇게 불리한 대도 그래도 이렇게 나라가 잘 돌아가고 풍성하고 잘 사는 것을 보면 기적입니다. 이것을 볼 때 정치를 잘 해서, 경제정책을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밤이면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새벽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기도소리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이 나라가 망할 것 같고, 위태로운 것 같습니다. 외국 교포들이 조국걱정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 망합니다. 우리나라는 여호와의 주권 아래서 안전합니다. 살기 좋은 복 받은 나라입니다.
저는 본문을 이렇게 바꿔보려고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나라)를 대적하리요." 대적할 자 없습니다. 북쪽에 김씨 별것 아닙니다.
여러분! 탄핵정국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신앙논리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축복 받은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편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주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해도 막강하신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고 내 아버지가 되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히13:6절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다윗의 유명한 시23: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다윗은 약합니다. 골리앗은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시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순식간에 골리앗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대적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에게는 동족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사도 바울을 거꾸러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머리에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가 큰 힘을 얻고 용기를 받았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대항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마음에 고통이 있을 때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렘29: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2.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십니다(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의 독생자의 그 귀중함을 우리의 머리와 생각으로는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창조'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그의 독자,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뒷짐을 지고서 큰 바위 주변을 빙빙 돌며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제 아들을 통해서 저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창대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은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번제로 잡아서 제사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고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자고로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라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 손으로 저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고 명하셨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큰 바위 주변을 빙빙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 알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명대로 제가 하나님께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 모리아 산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시고 즉시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을 아끼게 만드셨습니다. 그 대신 여호와이레로 예비한 수양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실제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병들어서 다 죽어가고 있다면 "차라리 내가 저것 대신에 아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대신 아프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우리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라도 하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귀하신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셨는데, 여기 '은사'는 '값없이, 공짜'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귀한 독생자까지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이야 덤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능력, 권세, 지혜, 재물,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모든 비결'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믿/
3. 우리를 송사할 자가 없습니다(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15: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내가 예수 믿기로 작정해서 그렇습니까? 내가 교회 생활하기로 결심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실 우연히 예수님 믿게 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하셨고 또 죄인이지만 주님의 공로로 의인이 되게 하셨고 장차 주님의 형상과 같이 영화롭게 되어 주님과 함께 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송사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송사한다'는 말은 검사가 피고인을 송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마귀가 '참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든지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서 벌을 받게 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입니다. 검사가 아무리 기세가 등등한 것 같아도 판사가 '무죄' 판결을 내리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죄가 있다고 해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약4:12절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고 하셨고, 요5:27절에 주님은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 했고, 고후5:10절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계1:7절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때" 피할 수 없이 그 앞에 드러나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입법자가 되시고 재판자가 되시는 주님이 '의롭다'고 판결을 내리시면 그 어떤 참소하는 마귀도 송사할 수가 없습니다.
4.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요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주께로 끌고 오셨습니다. 그들은 개처럼 끌고 온 여인에게 모세의 율법으로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엎드려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고 일어서서 말하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이성을 되찾은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죄인임을 깨닫은 무리들은 돌을 놓고 각기 처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살길이 열립니다. 만약 그 여인이 성전의 대제사장에게 끌려갔다면 그 여인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주님 앞에 나옴으로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후5:1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떠한 인생이라도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살길이 열립니다. 주님은 우편 강도의 죄도 허물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네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①"죽으실 뿐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정죄함을 받으실 것입니다.
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나 때문에 대신 예수님이 정죄함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②"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사망은 예수님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실 때,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생명이 된 것입니다.
③"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편은 존귀한 자리,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어떠합니까?
엡2: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예수와 연합한 우리들도 하나님은 지극히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④"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 누가 우리를 송사하고 누가 우리를 감히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5. 우리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35).
이제 바울은 더욱 확신에 찬 어조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결단코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정세는 다 변하고 세상 사람도 다 변할 수 있습니다. 전에 우방이었던 나라가 오늘의 원수가 될 수 있고 전에 원수였던 나라가 오늘의 우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변하지 않겠지 했던 사람도 배신하고 변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 자기의 생명까지 버려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 대신 정죄를 당하여 형벌을 받으신 우리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과 고통과 고난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성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환난도 끊을 수가 없고, 곤고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그 어떠한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곱 가지를 다 합친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일곱 가지의 고난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한 번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일곱 가지 고난을 몸소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당했던 육체적인 환난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태장으로 맞았습니다. 돌로 맞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인 환난뿐만 아니고 심령의 곤고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늘 교회의 대한 염려로 인해서 그의 마음은 억눌리는 듯했습니다.
또 그가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핍박이 있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먹지도 못했습니다.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에게는 적신도 있었습니다.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쳐서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시내의 위험도 있었고, 강의 위험도 있었고, 바다의 위험도 있었고, 강도의 위험도 있었고, 광야의 위험도 당했습니다. 어디서나 칼이 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칼을 갈며 동맹한 사람이 무려 4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영문 밖에서 칼로 목 베임을 받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들이 과연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끊지를 못했습니다. 바울은 고후5: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한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파도처럼, 밀물처럼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왔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음으로서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36절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시44:22절의 인용구로 주님의 고난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우리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극심한 고난을 겪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고난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미리 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미리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와있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단계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감히 그 누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겪는 고난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후의 승리와 영광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 우리는 모든 것에서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함께 하시지 때문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한 번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고후12장에 있는 내용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었습니다. 질병이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서 세 번씩이나 주께 간구했습니다. 자기 육체에서 가시가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가 그의 육체에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가 받은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고후12:9절의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이 그 응답을 받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고후12:9-10절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를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자기 육체를 찌르는 가시를 참고 견뎌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할 정도로 그는 넉넉히 이겨낸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그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인도할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연은 더 높이 올라갑니다. 황금이 용광로에서 녹는다고 해서 황금이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불순물, 찌꺼기만 없어질 뿐입니다. 더 순수해 질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돈독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순수하게 만들어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7. 확신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할 때 "누가"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을 거쳐서 이제는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무엇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가 겪었던 모든 고난들이 끝나고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 없이 여전히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온 우주 속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열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덟 가지는 서로 두 가지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짝을 이루지 않고 개별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짝은 "사망과 생명"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떠한 사연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짝은 "천사와 권세자"입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입니다. 반대로 권세자는 악한 영, 악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 곧 그것이 선한 존재이든지 악한 존재이든지 간에, 어떠한 존재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결코 끊지를 못합니다.
셋째 짝은 "현재의 일과 장래의 일"입니다. 현재로부터 장래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떠한 사건과 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능력"은 짝을 이루지 않고 개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능력도, 그 어떠한 권세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는 없습니다.
넷째 짝은 "높음과 깊음"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낮게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라는 말씀으로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등 아무리 다른 목록들이 수없이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겁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넉넉하게 이기고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 (2004년 3월 21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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