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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사 53:1-9)

by 【고동엽】 2022. 2. 3.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사 53:1-9)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르켜서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라 함은 거룩한 백성이란 뜻으로, 구별된 자, 하나님의 자녀란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사는 세계가 다르고, 사는 맛이 다룹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세상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신령한 세계를 맛보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이 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있다고 믿고 삽니다.
또 보이지 않은 천국을 보이는 내 집처럼 여기고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죽어서 무덤으로 끝난다고 슬퍼하지만 우리는 죽음이 천국 가는 길로 믿고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가는 코스가 다르고,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이 다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어느 마을에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착하고 경건한 사람인데 반해 동생은 세상에 다시없는 망난이였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동생이 형에 방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보니 온몸이 피투성입니다.
"형, 내가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어요, 지금 경찰이 나를 뒤쫓고 있는데 나 좀 살려주세요"
이 소리를 듣고 형은 동생의 피 묻은 옷을 자기가 대신 입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깨끗한 옷을 동생에게 갈아 입혔습니다. 이윽고 경찰이 쫓아왔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형이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피 묻은 옷이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본인도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형언도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 편 동생은 자기 때문에 형이 죽을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으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백 번 죽어 마땅한 자기를 대신해 아무 죄도 없는 형이 대신해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형이 있는 형무소로 갔지만 모든 상황은 이미 다 끝나 버린 뒤였습니다.
다만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형이 쓴 한 통의 편지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우야, 나는 먼저 간다. 부디 나 대신에 나의 옷을 입고 나의 삶을 대신하여 깨끗하고 보람있게 살아가 다오" 이런 내용입니다.
동생은 그 편지를 읽고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기를 대신해 의로운 형이 죽었습니다. 이 때부터 동생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 두 갑절의 몫을 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변화된 몫이요, 또 하나는 형의 몫이었습니다. 형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항상 남보다 두 갑절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형이 입혀준 깨끗한 옷을 다시는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피묻은 더러운 옷을 대신 입으시고 나의 죄를 대신하여 누명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의의 옷, 거룩한 옷, 영광스런 세 마포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할/ ◀제목소개!▶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으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기간입니다.
40이란 고난을 상징한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으며, 시내산에서 모세도 40일간 금식을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40일 간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 간 이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도 40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데 신, 구교가 다 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 기간 중 자신을 더욱 더 성찰하며 회계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이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주경 학자들은 사40장-66장을 구약 속의 신약이라 부릅니다. 이유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자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게 될 사건을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53장은 그 중의 한 장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실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알려진 부분이 네 군데 있습니다(사42:1-7; 49:1-9; 50:4-11; 52:13-53:12).
오늘 본문은 그 네 번째로 52:13-53:1-12절까지인데, 여기에서 보면 예수께서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는 내용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난 당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1∼3절: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
나를 위하여 처절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②4∼6절: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이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당하신 온갖 고난과 수치는 그분이 잘못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내 죄 때문에 당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③7∼9절: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고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모든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면서 고난에 주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1-3)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누가 믿었느뇨'라는 말은 아무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말이고,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라는 이 질문은 누구도 그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예 처음서부터 사람들에 의해 거절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거룩하신 팔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신앙 때문에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요1:10∼11절에서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도다." 심지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면서 미쳤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도 배척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는 고난의 종 예수를 묘사하되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라고 합니다.
여러분, 바싹 마른땅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돋아났으니 그 싹이 어떠하겠는가? 삐짝 말라서 볼품없는 비실 비실한 삯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볼품없는 종으로 세상에 오실 것을 이사야는 지금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너무나도 볼품없었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이를 누가 흠모해 주겠는가? 또한 나이 30세가 되도록 나사렛 시골 마을에서 목수의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그 당시 목수는 최하위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권세를 가진 영광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을 정치적으로 해방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오셨고, 병든 자에게 오셨고, 소외된 자에게 오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그 분의 메시지가 맘에 안 들었습니다. '누가 오른 빰을 치거든 왼빰도 돌려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를 동행해 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실망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가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리고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약하게 보고 십자가에 못 밖아 죽었으나 그는 결국 3일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믿/할/
주님의 몸된 교회는 마른땅에 줄기처럼 약하게 보이나 결국 어떠한 환경에서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 줄기는 쭉쭉 뻗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 삯이 여호와의 팔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면 더 절망적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얼굴에 침을 벧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사람의 얼굴에 침을 벧었다는 것은 인격모독이요, 자존심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배고픔도 참을 수 있고, 고통과 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면 못 참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살인도 나고, 자존심 때문에 볼 사람도 안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멸시를 받으시고도 참으셨습니다. 왜?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우리 예수님은 심지어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온갖 질고를 다 아십니다.
■또 예수님은 문등병자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예수님 당시나 구약 율법 시대에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던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문둥병자를 보면 자기들 얼굴을 가리우고 돌을 던지곤 했습니다. 얼굴까지 가리우는 것은 그만큼 볼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런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2.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4-6)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는 원어에 "호리"라는 말이 사용되였습니다 "근심, 재난. 질병"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제일 큰 염려는 무엇입니까? 질병입니다. 그리고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획과 목적에 어긋나는 저주입니다.
또한 우리의 슬픔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슬픔'은 '마크오-브'란 말로 '고통, 괴로움. 슬픔, 비탄'이란 뜻입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인생들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어떤 죄 때문에 받는 보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고와 슬픔, 징벌을 받고 고난을 당한 것은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문제를 안고 가신 것입니다.
■4-6절에서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차례나 거듭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 때문이요, 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중요한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잘못과 죄 때문에 매를 맞고 멸시를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시는 분만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신 분은 큰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이사야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5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①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려고- 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허리가 날카로운 창에 찔리셨습니까?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가 쓰는 영광의 표시입니다. 세상에 왕들이 이 면류관을 썼습니다. 면류관은 부귀 영화 존귀를 홀로 누리는 상징입니다. 세상 임금이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릴 때 백성들은 가난과 고통과 아픔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왕으로 그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이 조롱으로 만든 가시면류관이지만 이런 상징적인 영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에 찔림 때문에 우리의 허물이 용서된 것입니다.
'허물'은 모르고 범한 죄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가 많습니다. 천국은 죄인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라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우리를 천국 백성 삼으시려고 친히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입니다.

②왜 주님의 몸과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려고- 죄와 죄악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뜻이 다릅니다. 잘못인줄 알면서도 인간의 의지가 약해서 할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죄인줄 알면서도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죄를 죄악이라고 합니다.
몰라서 범한 허물이 있고, 알고도 끌려가는 죄가 있고, 알고도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죄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물도, 죄도, 죄악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죄를 무섭게 다룹니다. 롬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59: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수렁을 만들어 놓았고, 담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음란죄가 막연하여 이를 걱정하던 왕이 온 백성에게 긴급조치령을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칠계를 범하다가 적발이 되면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두 눈을 뽑으리라!"
전국이 긴장된 상황에서 첫 번째 긴급조치 위반자가 적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다름 아닌 왕자입니다. 왕자는 '감히 누가 내 눈을 뽑아'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사실 신하들도 왕자 앞에서는 꼼작을 못합니다.
그 사실을 안 왕이 노발대발하면서 왕자의 두 눈을 직접 뽑겠다고 나셨습니다. 이제 넓은 광장에 형틀을 높이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왕자를 결박하여 세웠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친히 형틀 위로 올라갑니다.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저 엄하신 임금께서 왕자의 두 눈을 뽑아버리면 이 나라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정말 뽑으시려나?' 백성들이 수군거립니다.
드디어 왕이 왕자 앞에 가까이 갑니다. 왕이 큰소리로 '왕자는 네 죄를 알렸다. 네 죄 때문에 너희 두 눈이 뽑히는 것이다' 하고 왕은 오른손을 높이 들더니 어느새 번개처럼 왕자의 왼쪽 눈을 사정없이 뽑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오른쪽 눈을 사정없이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보니까 한 쪽 손에는 왕자의 왼쪽 눈이 뽑혀 있고, 다른 손에는 왕의 오른쪽 눈알이 뽑혀 있습니다. 아들의 죄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오른쪽 눈 하나를 대신 뽑은 것입니다.
이윽고 왕이 입이 엽니다. '백성들이여! 애비의 눈 하나로 아들의 눈 하나를 대신 할 수 있습니까?' 모든 백성들이 땅에 엎드려 '성군이시여!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도 남사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었고, 그 나라의 공의는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신 기도가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셨고, 뿐만 아니라 막힌 담을 허셨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믿/

③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여러분! 이 세상의 행복은 뭐니뭐니해도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평안이 있고, 남편이 주는 평안이 있고, 자식이 주는 평안이 있고, 돈이 주는 평안이 있고, 권력이 주는 평안이 있고, 이웃이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적인 평안은 항상 흔들리는 평안이요, 일시적이고 찰라적인 평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신 평안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④왜 우리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죄로 멍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서요,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벧전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출15: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4: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지금도 치료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신유에 역사가 일어납니다./할/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예수)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철없이 양처럼 그릇 행하였고, 제멋대로 살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인사 12사람에게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빨리 도망가라" 다음날 12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모두 집을 떠나 어디론가 도망을 가고 없더랍니다.
또 하나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담당시키지 않으시고 온통 예수께서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절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주님이 인간의 모든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지신 나의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죄의 짐입니다. ■저주의 짐입니다. ■가난의 짐입니다. 고후8: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 질병의 짐입니다.

 

3. 침목하시는 예수님!(7-9)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이었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헤롯의 궁궐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온갖 희롱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침묵하셨습니까?
■8절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우리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죽어야)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내하시면서 묵묵히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누가 보더라도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예수님이 입을 다무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미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 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힘과 권세가 없으셔서 침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부터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자신이 마땅히 형벌을 받을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신 것입니다.
■9절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은 강포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입에 궤사가 있으신 적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인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하나님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그 시신을 자기를 위해서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고이 모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가 6∼7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셔서 천국백성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2003년 4월 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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