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22)

by 【고동엽】 2022. 2. 3.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22)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 중에 바울이 3주간 머물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탄생한 교회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라'고 것이고, 도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떤 설교가는 삼행의 신앙이고 삼불의 신앙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삼행의 신앙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본이고, 본질이고, 원리입니다. 이를테면 이 삼행의 신앙은 '하라'는 적극적인 신앙의 형태를 제시해 준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 같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냥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했으면 경우에 따라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될 것인데, 말씀 앞에 한결같이 어려운 조건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과,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는 아주 어려운 조건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삼불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해서는 안 되는 것 즉, 이번에는 '하지 말라'는 신앙 형태의 제시입니다. 그 세 가지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18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곧잘 민심이니 천심이니 하는 소리를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민심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늘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탄핵정국에도 각 당이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다음 총선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예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한 때 '김심'이란 말이 한동안 유행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김심도 민심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은 민초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하며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어디에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뜻, 즉 천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효자인가? 부모님의 뜻을 잘 헤아려 받드는 자가 효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드는 자가 바른 성도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 먼저 '하라'고 하신 '삼행' 신앙부터 생각해 봅시다!

 

1.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여기 보면 '항상'이라는 부사에 악센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기쁨을 '카이로'라고 하는데, 그 뜻은 '유쾌하다, 은은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폭죽 터지듯 잠깐 기쁘다가 불꽃 사라지듯 꺼져버리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은은하게 항상,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그런데 기뻐하되 '항상,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즉 기쁠 때만 기뻐하지 말고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리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떤 면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일 때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날 밤에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내일 새벽이면 예수님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자기를 팔 제자 가롯 유다가 그곳에 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금 심정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찬을 마치고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결코 유쾌한 길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그런 등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마26:30절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찬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찬미와 그 기뻐함이 바로 종교적인 힘이고, 신비한 능력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찬미했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도했고, 스데반 같은 이는 순교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종교적인 삶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원천은 어디인가? 빌4: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안에서'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 밖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출세한 기쁨, 성공한 기쁨, 인기 누리는 기쁨, 돈 벌고 잘 사는 기쁨 등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365일이 기쁩니다. 일생이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성공해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실패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고 잘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병들고 못살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기쁨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눅10:20절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합3:18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②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롬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③말씀 속에서 위로와 기쁨이 큽니다. 렘15:16절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고, 고전13: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④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시63:7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46: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는 근심 중에서라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영적인 기쁨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기쁨으로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짧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혼자 세상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처럼 근심과 염려의 얼굴을 가지며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2.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냥 기도하라고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쉬지 말고"라는 말 때문에 지키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눅18장에는 "항상 기도하라"고 했고, 엡6장에는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은 숨쉬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기도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산소를 들여 마셔야만 살 수 있듯이 영적 생명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을 들여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안 하면 죄가 됩니다.
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았던 사무엘은 삼상12:23절에서 "결단코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데 있습니다. 그럼 밤낮 예배당에서 기도만 하며 살란 말입니까? 그럼 언제 가정생활하며 언제 사회생활을 합니까? 이런 의미의 쉬지 말고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기도에는 4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부르짓는 기도와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와 ▶생활 속에 기도와 ▶삶 자체의 기도가 있습니다.
여기 '쉬지 말고'는 24시간을 입으로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단히 의지하라는 것이요, 항상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라는 의미요,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①믿음으로 기도한 자는 다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1: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②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을 만나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55:6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③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7:7-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④주안에 있는 자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 생활은 예수님이 몸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홀로 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히5:7절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이것은 곧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심한 부르짖음과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이요, 통로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소돔성 멸망의 계시를 받았고, 모세의 기도는 애굽의 학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여호수아의 기도는 태양을 멈추게 하므로 아모리 사람을 대파하였고, 한나의 기도는 사무엘을 얻는 기쁨을 맛보았고, 다윗의 기도는 모든 위기를 모면케 해주었습니다.
엘리야의 갈멜산상에서의 기도는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나타내었고, 다니엘의 기도는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구원을 체험했으며, 히스기야의 기도는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대를 멸절시키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고,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옥문을 열게 함으로써 간수장이 예수를 믿는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는 탕자를 성자로 변화시켰고, 루터는 하루 세시간씩 기도하였기에 종교개혁의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지름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새벽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산에 가서만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삶 속에서 쉬지 말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긴장을 풀지 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면 그 순간 방심하게 되고 허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틈을 타게 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엡6:18절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3.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범사'란 말이 묘한 말씀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모든 경우에, 어떤 경우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익이 주어졌을 때는 물론이고, 손해를 보았을 때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몇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①'받았으니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무엇인가를 받았으니 감사하는 감사, 그것도 감사는 감사입니다. 어떤 이는 많이 받았으면서도 감사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많이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불평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받아도 적다고 불평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받았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고 있고, 평안하게 살아가면서도 또 다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받았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도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석자는 이 감사를 '어린 아이 감사'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무엇인가 받아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②'깨달음의 감사'입니다.
깨달음의 감사는 받아서 하는 감사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감사의 형태입니다. 행복은 가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것은, 사람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깨달음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알고 깨닫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감사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가 없죠.
유태인 신학자 몽테 피오르는 "생각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깊이 생각하게 되면 모두가 감사함을 알게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가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가 어느 해에 무우 농사가 잘 되어서 거의 사람 몸뚱이 만한 무우를 수확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잘된 무우를 혼자 먹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이 농부는, 농사가 잘된 것이 그 고을을 잘 다스려 주는 원님의 선정 탓이라 생각하고, 그 무우를 잘 포장해서 원님께 갖고 갔습니다.
원님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칭찬한 뒤에, 하인을 불러 요즘 관가에 들어 온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최근 들어 큰 황소 한 마리가 들어 온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원님은, 그 황소를 끌어다가 이 농부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농부는 무우 한 개를 바치고, 그 대신에 크고 좋은 황소 한 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온 동리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심보가 고약한 농부 한 사람이 생각하기를, "무우 한 개를 바치고 황소 한 마리를 얻었으니, 내가 황소 한 마리를 바치면, 이번에는 땅이라도 몇 마지기 얻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키우고 있는 황소를 끌고 원님에게 갔습니다.
"원님, 저는 오랫동안 집에서 황소를 길러 왔습니다만, 이렇게 크고 좋은 황소는 처음입니다. 이것이 다 원님께서 백성을 잘 다스려 주신 덕택인 줄 알고, 이 황소를 바치려고 가져왔습니다"
원님은 이 말을 듣고, 농부의 마음씨가 착하다고 칭찬한 다음에, 하인을 불러 요즈음 관가에 들어온 것 중에서 귀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하는 말이, '며칠 전에 들어 온 크고 잘 생긴 무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원님은 그 무우를 이 농부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농부는 별 수 없이 무우 한 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아메리카 주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그 옆에는 얼음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가지고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이 안내하던 멕시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곳 부인들은 참 좋겠습니다." "왜요?"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까요. 이곳 사람들에게는 온천과 냉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이 "천만예요." "왜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비누가 나오지 않으니까 불평입니다." 그랬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죄인 인간은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③자족하는 감사입니다.
자족하는 감사는 아주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우리들이 이 단계까지 도달하려고 하면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꽤나 성숙해져야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 모든 사람에게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누구냐?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자족하는 삶이고 자족함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옛말에 '지족 안분'이라는 말이 있는데,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지켜 사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지족 안분'이 네 글자를 생활 신조로 삼고 살았고, 처세의 지혜로 삼고 살았습니다.
빌4:11-13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④믿음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인들로서 믿음의 감사를 할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받고 나서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깨달음과 자족하는 감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감사는 감사 중의 감사이고, 최고의 성숙한 신앙 의식에서 주어지는 감사입니다.
믿음의 감사는 받아서 하는 감사가 아니고 빼앗기고도 하는 감사입니다. 또 믿음의 감사는 건강해서 하는 감사가 아니고 병들고 나서도 하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감사는 오래 살고 장수해서 하는 감사가 아니고 일찍 죽으면서도 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격이 다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믿음의 감사입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10남매를 잃었습니다. 집이 무너져서 한꺼번에 10남매가 죽은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전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동방의 부자였던 욥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양과 소와 약대들을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또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스럼이 돋아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기적일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욥1: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것이 환난 중에 나오는 믿음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 감사를 믿음의 감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평안하든지 고난스럽든지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범사의 생활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감사할 만한 조건을 찾아내어 감사하는 사람만이 신앙인답게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지 말라'는 삼불의 신앙을 알아보자!

 

1. '성령을 소멸치 말라'(19절)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들의 삶에 임재하셔서 감동하시고, 감화하시고,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십니다. 신앙인은 이 성령의 인도에 순응하고, 따르고, 용납하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여기 '소멸'이라는 말은 "불을 끈다"는 뜻으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민하게 접근을 했습니다. 아주 무절제했고, 혼잡했고, 은사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광신적인 교회였고, 영적으로 교만해서 결국에는 영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도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감동은 있고, 열정은 있는데 그 대신 의지력이 없습니다. 매사가 감정적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순간 뜨거워지고, 순간 식어지고 해서 자기 조절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깊이 있는 신앙으로 발전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각종 은사도 많았지만 문제도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너무 성령의 활동을 배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이 냉랭했고, 이론적이었고, 매우 논리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뿌리는 있고, 뼈대는 있어서 좋은데, 대신 그 신앙은 힘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형태에서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입니다. 이것은 둘 다 좋지 않은 형태입니다. 지나친 은사 중심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이론적인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합니다.

 

2. '예언을 멸시치 말라'(20절)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에 의한 판단보다도 인간적인, 이성적 판단을 우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예언도 무시하게 되고, 나중에는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게 되면 나중에는 예수의 재림 교리까지도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이미 생명을 상실하고, 내용을 모두 버린 껍데기 신앙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자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 계획 속에는 경고가 들어 있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무시하게 되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인간 자신입니다. 성경 중에서 예언서를 보십시오. 그 예언 속에는 모두 장래에 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미래를 잃게 됩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고 무시하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비행기로 경고 전단을 뿌렸습니다.
"1945년 8월6일 낮 12시에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을 투하하니 시민들은 모두 50㎞ 밖으로 대피하라"고 일주일 전부터 경고 전단을 살포했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이를테면 이것이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미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그 경고의 글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살길에 대한 안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자신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손해뿐만이 아니고 죽습니다. 이보다 더 절박한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은 마땅히 이 메시지를 믿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예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단을 받아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언을 무시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 메시지를 읽고 나사 그대로 믿고 대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메시지를 믿었던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정오, 약속대로 예언대로 원자탄이 히로시마시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뻔쩍 하면서 단 3초 동안에 3천도의 열을 동반한 원자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히로시마시의 30만 인구 가운데 20만 명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핵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언을 멸시치 마라.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이 없다고 하나 보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이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라." 언젠가는 예언 그대로 주님은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예언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면, 어느 날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이 터져서 모두가 멸망했듯이 그렇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3.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악해지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사람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하고,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악해지는 데는 수고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악해집니다.
사람이 악하게 변하는 데는 환경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와 자주 어울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주위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맹모 삼천지교란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묘지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날마다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매일 장사하는 흉내만 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서당 근방으로 이사를 했더니 비로소 공부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악해지는 데는 이 환경이 주는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또 사람이 악해지는 데는 무감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번뇌스럽기도 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것도 무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다 주일에 예배를 한 번 빠져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괴롭습니까? 금방 벌을 받을 것 같고, 불안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 번 빠지고 세 번 빠져 보십시오. 그런 대로 익숙해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주일 빼먹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경로가 그렇습니다. 처음에 죄를 짓게 되면 겁이 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잠이 오질 않습니다. 머리가 복잡한 생각으로 번뇌스럽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덤덤해집니다. 무감각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또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날이 갈수록 더 큰 죄를 짓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을 죽이는 사고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순간 펄쩍 튀어나옵니다. 왜냐하면 자극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를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삶아 내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솥에다 찬물을 붓고 그곳에 개구리를 넣으면 가만히 있습니다. 그때 솥 밑에다 불을 서서히 지피면 물이 조금씩 데워집니다. 그러면 이 개구리들이 따뜻한 물에서 기분 좋게 헤엄치고 다닙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개구리들이 따뜻한 물 속에서 기분 좋게 놀고 있는 동안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물이 뜨거워져도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 개구리들이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삶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악을 버리라"하는 식의 직접 화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는 한은 악은 저지르지 않습니다.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수간 튀어나오듯이 사람들에게도 죄가 분명하게 다가오면 순간 뒤로 물러섭니다. 그것은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을 저항 없이 죄로 물들게 하는 주위의 환경입니다. 그 환경은 사람들을 소리 없이 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악은 선보다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선해지기보다는 선한 사람이 악해지기 더 쉬운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선한 행동은 배우지 않고 나쁜 버릇은 아주 쉽게, 힘들이지 않고 배웁니다. 왜냐하면 선보다 악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앵무새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앵무새가 욕을 잘했습니다. 주인이 이 못된 버릇을 고쳐 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윗집의 앵무새는 노래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이 욕을 잘하는 앵무새를 가지고 이웃집에 가서 주인에게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하루만이라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욕하는 앵무새도 노래를 배우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욕 잘하는 앵무새가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하룻밤을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렇게 노래를 잘하던 앵무새도 욕을 하더라고 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단하고 행하는 역사와 작심하고 하지 않는 귀한 성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4년 3월 14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