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예배! (요4:23-24/창8:20-22/롬12:1-2)
주님은 예배에 관해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4: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어서 예배자를 찾으신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쳐주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자들이 넘쳐 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는 늘 예배드리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바다에 물이 넘쳐나도 정작 마실 물을 찾기가 힘든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도 정작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찾기가 힘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는 많으나 참된 예배자는 찾기 힘들다는 탄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창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4-5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하나님께서 아벨을 참된 예배자로 받으셨지만 가인은 참된 예배자로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단지 드리는 데 의의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의 인생은 그 자체로 실패였다는 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배의 성공은 곧 인생의 성공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예배에 성공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예배정신(요4:23-24)
하루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가라는 동리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주님께서 보내실 성령을 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대뜸 여인을 향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말을 듣고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섯 번째 바꿔 가며 살아보아도 삶의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자기의 추하고 복잡한 과거를 송두리째 폭로하시는 이상한 유대인을 향해 그녀는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역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마구 고쳤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이 그리심산이라 했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곳도 그리심산이라고 했으며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제일 먼저 희생 제사를 드린 곳이 그리심산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리심산이 아니라 에발산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그리심산을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자라 온 것입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으냐?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일까요?
멕시코의 '쿠이케틱'이라는 홍인종이 쓰는 '예배'라는 말은 '개가 꼬리를 젓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꼬리를 젓는 일, 즉 개가 그 주인을 알고 기뻐하며 충성을 다하듯, 사람도 하나님께 대하여 예배할 때 그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 다니는 한 청년이 한번은 조그마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교회는 성가대도 없고 교인도 몇 명 안되어서 도무지 예배드리는 것 같지가 않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적 예배란 웅장한 교회당과, 수천 수만명의 교인들, 성가대의 장엄한 합창이나, 격조 높은 목사의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토레이 목사는 '예배에는 성경을 읽는다. 그러나 성경 봉독 그 자체가 예배는 아니다. 또 예배에는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기도는 예배는 아니다. 찬송을 부른다. 그러나 찬송 그 자체가 예배는 아니다. 그것들은 다 예배로 인도하는 길은 되지만 예배는 아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 앞에 인간의 영혼이 꿇어 엎드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신령'이란 말은 '영',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영화롭게 할 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또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은 내 영의 가장 높은 차원의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영화를 보면 감동을 받는 내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좋은 책을 보면 받는 감동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감동이 있습니다.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시작도 성령의 인도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배 기도도, 신앙고백도, 말씀 증거도, 찬양도, 헌금도, 예배중의 평강과 축도도 성령 안에서 인도 받아야 합니다.
'진정'이란 말은 '진리', '진심'을 의미합니다.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어서 나오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린양이 되셔서 흘려주신 보혈의 피로 인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으시고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는 어떤 사람인가? 참된 예배자의 기본 자세를 알아보아야 합니다(창8:20-22).
노아는 나이 480에 홍수 심판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나이 600세가 되던 해 비로소 하나님의 예언대로 홍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40일 동안 주야로 홍수가 쏟아져 물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150일이 지나서야 물이 지면에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닿게 되었고 40일이 지난 뒤에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내어 상황을 살폈습니다. 물이 걷히고 땅이 마른 후에 무려 홍수가 시작된 후 1년하고도 10일만에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노아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21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하나님께서 노아가 드리는 이 제사를 기뻐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참된 예배자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①예배의 목적이 옳았습니다.
20절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노아가 드린 제사는 여호와를 위해서 드린 제사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실패하는 원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배의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드린다는 생각, 목사님을 위해 드린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한 분계십니다. 이 분은 예수를 믿지 않던 분입니다. 청년 때 지금 부인이 된 권사님을 너무 사랑해서 '이 여자 없이는 못 살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기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그게 어디 말처럼 됩니까? 약속을 어기고 교회 다니지 않으며 몇 해 세월이 흘렀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가버렸답니다. 이유인즉 교회를 나가면 돌아갈 것이고 아니면 끝내겠다고 협박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아내를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교회 나가는 목적이 오직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 도중에 큰 은혜를 받고 변화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장로가 되었는데 예배의 목적을 바로 알고 드리니 그렇게 경건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누군가의 강요 때문에 교회에 올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간청에 못 이겨 그 사람을 위해 예배드리러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예배는 사람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연중 대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그리워 예배에 나왔다'. '은혜 받기 위해 예배에 나왔다', '능력 받기 위해, 응답 받기 위해, 문제 해결 받기 위해 예배에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배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예배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②예배의 동기가 옳았습니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일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만사 제쳐놓고 제사부터 드렸겠습니까?
40일 동안 주야로 홍수가 퍼부었습니다. 온 땅이 물로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1년 10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땅이 말라서 저들이 홍수에서 나와서 땅을 디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든 동물들, 삼라만상이 1년 이상 지속된 이 홍수에 다 쓸려나간 것입니다.
노아 가족들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저들이 방주에서 나오면서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정말 그 많던 세상 사람들 가운데 오직 노아 가족들만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만 선택하셨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감사한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이다.
시8: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제가 도대체 누구기에 저 같은 것을 주께서 마음에 두시고, 저 같은 것에게 말씀하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동기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실패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감사와 감격이 없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이 설교 준비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사모님이 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스펄전 목사님이 "내가 십자가를 바라봐도 마음에 감격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생각해도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울고 있소..."
그렇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빠진 예배를 드린다면 이것은 통곡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③예배의 방법이 옳았습니다.
20절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특별히 정결한 제물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제사법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자세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 제사 방법의 키워드는 '거룩'입니다. 모든 제사 규정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할 것인가에 맞춰져있습니다. 그러면서 반복해서 말씀되는 구절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니 만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큼 거룩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예수를 믿게 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이 분은 유별나게 불심이 깊던 분이셨습니다. 매일 새벽 불공을 드리셨는데 새벽 불공 전에 매일 같이 목욕 재개하셨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새벽 기도를 드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매일 새벽에 목욕재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교회 나오기 전에 남보다 1시간 전에 일어나 목욕을 하려니 잠도 부족하고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할머니 꼭 그렇게 안 해도 됩니다" 말씀을 드렸는데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돌로 만든 부처 앞에 헛된 불공드릴 때도 목욕 재개했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습니까?" 지금은 권사님이 되셨는데, 교인들이 "이 권사님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받으시는 것 같아요? 이분하고 예배를 드리면 예배가 달라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속 사람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에 합당한가 살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상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자리하고 계신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가 자리잡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의 속 사람을 정결케 준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헌금을 준비합니다. 성경 찬송, 복장도 꼼꼼히 살핍니다. 그리고 미리 도착해서 찬양으로 마음을 열며 예배에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준비 없이 예배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거룩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준비해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게 될 때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면서 마음속에 다짐을 하셨습니다. 21-22절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고 밤이 쉬지 아니 하리라"
한마디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기독교 예배가 다른 이방 종교의 예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첫째는 말씀 선포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례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시고 흘리신 피를 예배 현장에서 재현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배자들의 심령에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능력을 덧 입혀주시고, 놀라운 은혜의 강물을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 뒤에 그 사람의 예배 현장에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그 참된 예배자를 크게 축복하십니다. 더 큰 은혜와 감동을 맛보게 하십니다.
3. 하나님은 지금도 거룩한 산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롬12:1-2).
지금 바울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말합니다. 이것은 공예배가 아니라 생활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균형 잡혀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공예배와 생활의 예배가 균형 잡힌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균형을 잃어버리면 문제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공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활은 엉망이어도 예배만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는 예배도 잘 드리고 생활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 집사님 한 명이 이삿짐을 챙겨서 교회로 왔습니다. 이 일로 교회가 떠들썩했습니다. 이유를 알고 봤더니 남편 집사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집에만 가면 악마 같으니 집에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교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①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립시다(1절).
우리 나라 초대 선교사였던 미국인 언더우드의 어린 시절 일화 가운데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유년 시절 주일 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헌금은 안하고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한번은 주일 학교 선생님이 기도하는 언더우드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 그랬더니 언더우드가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 그 대신에 저의 몸을 드리곤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와서 사역했습니다.
본문에서 몸을 드리라는 말이 언더우드처럼 선교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도 해당이 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첫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재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면 그것은 많은 헌금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사울왕의 예)
둘째, 내가 죽어지는 것이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여기서 죽는 다는 것은 목숨을 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구약의 제사에서는 제물이 살아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죽어야 제물이 됩니다. 신약의 제물은 목숨은 살아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이 죽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속에서도 끝없이 욕망이 올라옵니다. 그 욕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욕망에 대해서 죽어지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는데 감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한다면 감정에 대해서 죽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봐서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면 내 생각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상대에게 욕이라도 한번 해주고 싶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그럼 내 자존심이 죽은 것입니다. 내 감정이 죽은 것입니다.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포기했다면 내 소원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영적 성장이 필요합니다. 롬7,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두 가지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육신이 원하는 것이고 하나는 영혼의 원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자신 속에서 끝없이 싸웁니다. 그 싸움에서 육신이 승리하면 육신적인 생활이 되는 것이고 영혼이 승리하면 영적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도 바울과 같은 싸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늘 영혼이 육신에게 패해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육신이 원하는 것이 있어도 영혼이 강하기 때문에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영혼과 육신의 강함의 차이 크기의 차이입니다.
성도가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훈련된 사람은 영적으로 더 강할 것입니다. 훈련된 사람은 영혼이 육체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십니다. 그 사람의 훈련 정도에 따라서 시간은 다르게 걸립니다. 적극적으로 훈련하는 사람은 짧은 훈련으로도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②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2절).
여기 '세대'(헬: 아이온)는 시간적인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그 시대의 유행 즉 지금 이 세상을 을 말합니다. 지금 이 세상을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 세대는 하나님 없이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독립적인 존재로 생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람은 마치 운전사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형사고가 납니다. 왜 사람들이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자꾸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세대는 사단의 종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엡2:2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귀의 조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2:2에 보면 끌려 다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구에서 일어난 지하철 참사를 보십시오. 중년의 한 사람이 절망감에 사로잡혀 죽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지하철 안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마귀가 역사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 세대는 타락한 인간의 열매(사단의 열매)를 맺는 세상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 배가 열리는 일은 없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만 열립니다. 아무리 비료를 많이 줘보십시오. 비료를 많이 줬으니까 배가 열릴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과 열매가 더 열립니다.
신앙생활을 열매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고 육신으로 충만하면 육신의 열매가 열립니다. 마귀로 충만하면 마귀의 열매가 열립니다.
나무가 바뀌기 전에는 절대 열매가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나무를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없이 살 때는 타락한 인간의 열매를 맺든지 사단의 열매를 맺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면 나무가 바뀐 것과 같아서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③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2)
사람의 가치는 외모로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사람은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변화를 받아'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의 변화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④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거룩한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호4:6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둘째,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 분입니다.
셋째,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열리게 됩니다.
4. 우리가 예배드릴 때 상주실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히11:6).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큰상이 노벨상입니다. 우리 나라도 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음으로 노벨상 수상 국가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벨상이 생긴 유래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이 말년에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왕, 파괴의 발명가 노벨이 죽다' 라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노벨의 죽음으로 착각하고 오보를 낸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기사로 큰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정말 자신이 죽었을 때 신문에 '파괴의 발명가'로 보도될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벨은 곧 많은 재산을 희사해서 '인류 복지에 구체적으로 공헌한 자'에게 상을 주도록 하는 노벨상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노벨상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이 있습니다. 영화인들에게 수여되는 '아카데미 상'이 있습니다. 이 아카데미상에서 여러 부분을 수상하게 되면 그 영화는 흥행이 보장됩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는 11개 부분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고, 그 명성 때문에 대흥행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기자들에게 수여되는 '퓰리쳐 상'도 유명합니다. 영화인들에게 수여되는 큰상으로서는 '대종상'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용감한 시민상' '장한 어머니 상' '효부상'이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수여되는 메달들도 상에 속하고, 국가에서 수여하는 각종 훈장도 다 상에 속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상급에 관한 말씀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마10:41-42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의 상을 사모해야 합니다. 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빌3:14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상급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3년 3월 9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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