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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용기! 위대한 결단! 위대한 구원! (막 10:46-52)

by 【고동엽】 2022. 2. 2.

위대한 용기! 위대한 결단! 위대한 구원! (막 10:46-52)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어느 날 한 스님과 같이 히말라야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한참 산길을 오는데 한 사람이 추위에 얼어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다싱은 둘이 함께 부축하자고 하니까 그 스님이 하는 말이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는 모두 얼어죽을 테니 나는 먼저 가야겠다"며 먼저 사라졌습니다.
선다싱은 그 사람을 등에 업고 눈보라 속을 헤치며 얼마쯤 내려오는데, 조금 앞서 갔던 그 스님이 길가에 쓰러져 꽁꽁 언 채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쓰러진 사람을 업고 땀을 흘리면서 온 결과 자신도 살고 업혔던 사람의 생명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용기와 결단이 한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예수 천당! 불신지옥'하며 노방전도 하다가 술 취한 청년에게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면서기가 와서 말려주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못마땅한 듯 일어나면서 면서기를 꽉 붙들더니 '당신이 내 면류관 하나 쫓아 보냈소!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그를 교회당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할 수 없소 당신이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하며 면서기에게 전도했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제일 귀한 일입니다. 우리교회가 올해 한 영혼이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인류역사의 발전은 '용기'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용기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용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 생각할 수가 있으며, 이 용기는 이성적인 용기와 신앙적인 용기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흔히 이성적인 용기는 헬라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문명을 발전 시켰으며, 신앙적인 용기는 히브리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문명입니다.
우리는 이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용기가 필요하며, 나아가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 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겨레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선생은 일찍이 자신의 소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라고 외칠 것이다. 그는 자나깨나 '민족의 자주 독립'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의 소원은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온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가진 자에게 그 소원을 허락해 주십니다.
빌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모두 소원을 가지십시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소원은 '보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간추려 보자!
오늘 말씀을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인생에서 가장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다가 위대한 새 출발을 시작하는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도 거지였고,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거지였으며, 더더욱 그는 세상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태어나서 비극적인 출발을 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남에게 구걸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년이 되어서는 여리고성 문 밖에 나와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붙잡고 구걸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의 입술을 통하여 예수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시며,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평안을 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을 영접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바디매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자기도 눈을 뜨고 거지 생활을 청산할 것이며, 새로운 삶에 출발을 할 것이라는 영롱한 꿈과 마음에 설레임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위대한 꿈을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꿈을 통하여 역사해 주십니다.
어느 날 바디매오는 성밖에서 사람들의 붐비는 소리와 떠들썩한 소리에 온통 신경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참다못한 바디매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갑니까?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고 계신다네" "뭐라고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요"
그토록 만나기를 소원했던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하니 바디매오는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은 듣기를 소원하며, 사모하며, 갈망하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열심이 찾으면 주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믿/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경인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껏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지 바디매오에게 "잠잠하라, 이 거지 소경아, 조용히 해!"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주님을 찾을 때 옆에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비방하고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동요치 않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더더욱 소리쳤습니다.
신앙인들은 환난이 오고 고통이 오고 역경이 오면, 더더욱 소리쳐 하나님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관중을 의식하지 않고 더더욱 소리 질러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때 바디매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주님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디매오는 그 당시 나라에서 거지들을 위해 허락하여준 거지 옷을 던져버리고 주님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주님은 인자하신 음성으로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디매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순간 바디매오의 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할/
바디매오는 생전 처음 아름다운 산천초목을 보았고,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바디매오는 주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바디매오를 분석해 봄으로, 우리도 그의 신앙의 인격을 배우고자 합니다.

①그의 신분과 형편은 어떻했는가?
한 마디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소경에 거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소경이 아닙니까?
'헬렌켈러'는 나에게 단 한 시간만 눈을 뜨게 해 주신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저 푸른 하늘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를 이토록 도와준 '설비안' 선생의 얼굴과 그 눈동자를 한번 똑똑히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바디매오는 한 마디로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②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소낙비와 같아서 빨리 서둘지 않으면 지나가 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고후6:2절에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후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기회를 잡는 것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46-47절에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그러니까 길가에 구걸하러 나갔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전지식이나 정보 없이 구걸하러 나갔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내가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선물을 의미합니다.
▶행3장에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 역시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공교롭게도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하듯이 돈을 구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자,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혀 상상도 못할 복을 받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특히 제가 목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바디매오는 소리 내어 부르짓는 믿음의 결단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47절 "소리질러 가로되" 48절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소리 질렀다는 것은 목청을 돋구었다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는 소리 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체면 상하는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부르짖는다'는 말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소리 지르고 부르짖는 기도를 말합니다.
●얌전하기로 소문난 새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으면서 소리 지르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절대로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달이 차가자 그녀는 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이를 낳더라도 치사하게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 그녀의 남편도 '당신은 애 낳으면서 소리 지르지 않겠지' 다짐을 했습니다.
드디어 산부인과에 입원하고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원한지 8시간만에 아들을 분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병원 생기고 저 여자처럼 소리 지르고 떠든 여자는 처음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리 지를 때 질러야 합니다. 참지 마십시오. ▶대게 사람들은 세 가지 경우에 소리를 지릅니다. ⑴공포의 순간에 소리를 지릅니다. 그땐 누가 소리를 지르라고 하지 않아도 지릅니다. ⑵아프고 절망할 때 사람들은 신음을 합니다. ⑶기쁘고 즐거울 때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호합니다.
우리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짖어 소리 지르는 것은 기도와 찬송뿐입니다. 이 소경은 방해가 있을 때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거기서 끝나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석학자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을 만나고자하는 바디매오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소리는 입술의 소리가 아니고, 심장에서 나오는 소리요, 영혼의 고함 소리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바로 지금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③그의 신앙의 고백은 무엇인가? 신앙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저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뒤만 돌아보지 않았을 뿐 부르짖는 소리를 이미 다 듣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돌아보지 않으셨다고 해서 당장 낙심하고 돌아설 필요는 없습니다. 죽석 응답만이 응답은 아닙니다. 무 응답도 응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먼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가 계속 큰 소리로 힘써 소리 지르자 주께서 멈추시고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소경에게 다가가서 "안심하라, 일어나라,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47절 보면 소경이 맨 먼저 들은 소문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말은 당시 주님 이외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청년시절을 보내시면서 성장했기에 나사렛 예수란 호칭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47절 하반절에 보면,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라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릅니다.
마1: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메시야의 족보가 나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2대 왕으로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입니다.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게 되는데 그분이 곧 메시야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고대하고 고대하는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도 그들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고 믿지 않고, 나사렛 예수로만 알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디매오는 한번도 주님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예수라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주여! 주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그리고 승천하시고 또 다시 이 땅에 심판의 주님으로, 만 왕의 왕으로 오실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④그의 간청이 무엇입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애원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그는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애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자비와 긍휼'하심이 없다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한 사람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⑤그는 신앙의 장애물을 극복했습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칠 때 무리들이 어떤 반응을 했습니까? 48절 "많은 사람이 꾸짓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소경 거지인 그를 동정하기는커녕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의 결단은 고독속에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철학자 '케엘케골'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결단을 가리켜 이 일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외톨이의 결단'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단에는 아무런 동조자도 없습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길에서는 동반자가 아닙니다. 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결단은 언제나 고독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난관은 뚫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뽕나무가 난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난관을 이용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7배나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이기고 승리합니다.
시42: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⑥그의 용기와 결단을 보자!
겉옷을 버렸습니다.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소경이 맨 먼저 취한 태도는 '겉옷을 내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겉옷이란 평소엔 입거나 걸치는 것이지만 달리기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는 벗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만나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겉옷을 내어 버렸습니다.
●그가 겉옷을 내어버리기가 어려웠던 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그는 거지였습니다. 거지에게 겉옷은 재산목록 1호입니다. 이 겉옷은 낮에는 옷으로 밤에는 따뜻한 이부자리가 됩니다.
⑵'반듯이 겉옷을 버려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주저 없이 겉옷을 던져 버렸습니다.

●겉옷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⑴그것은 곧 신앙의 장애물입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것들이며, 내가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돈을, 취미를 귀하게 여기다가 신앙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관계 때문에, 어떤 사람은 체면이나 오락이나, 레저 때문에 신앙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⑵겉옷은 진실을 가리는 수단입니다. 모든 추한 것, 바르지 못한 것들을 겉옷 속에 감추어 둡니다. 겉옷 속에 칼을 숨기고, 권총을 숨겨도 모릅니다. 그 속에는 거짓과 슬픔과 교만과 오만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⑶회개를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옛사람 그대로는 구원도, 축복도, 기도 응답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엡4: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약5:16절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⑦주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 그는 '뛰어 일어' 났습니다.
위대한 용기요, 위대한 결단입니다. 이 장면을 바클레이는 "총알같이 달려왔다. 그 이유는 단 한번뿐인 기회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를 향하여 뛰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방향 목적이 중요합니다. 왜 뛰며 어디를 향하여 뛰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뛰시기 바랍니다.
좌우간 현대인들은 부지런히 뜁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뜁니다. 남자도 뛰고 여자도 뛰고, 어른도 뛰고 아이도 뜁니다. 사람이 바빠졌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동안 구걸하는 일로 하루하루가 바빳던 사람입니다. 하루 일과가 수고로 시작하여 수고로 끝나는 삶입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일대의 단 한번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갔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 안에 진정한 의미의 참 해결이 있습니다. 그분 안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어떤 젊은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부푼 기대를 안고 결혼을 했습니다만, 살아갈수록 만족보다는 실망이 더 커갔습니다. 드디어 3년이 되던 해부터 부부싸움이 잦아졌습니다. 드디어 더 이상 부부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정법원도 찾아가 봤습니다. 대답은 좀더 인내하고 서로 양보하라는 말뿐입니다. 주례해준 은사 선생님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3년 권태기를 잘 넘겨보라고 말합니다. 친구도 만나보았습니다. 당장 헤어져버리란 친구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이나 동기간들을 만나기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생의 의미가 없어지고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을 소개받았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소개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그 가정에 중재자로, 화해자로 소개해주었습니다.
갈등과 증오로 뒤범벅이 된 이 두 사람 사이에 주님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들이 심령이 치료되고, 생활이 치료되고, 가정이 치료되고, 삶아 치료되었습니다. /할/
여러분! 문제 해결의 근본이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 달려가세요! 거지 바디매오는 주님을 향해 힘차게 일어나 달려갔습니다.

 

⑧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51절 '보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 소원이 무엇이냐?'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의 소원을 고백했습니다.
▶희랍어에 선생이란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랍비'입니다. '나의 큰 자, 나의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둘째는 '랍오니'인데, '나의 증인, 나의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여기 바디매오의 대답은 '랍오니'입니다. 즉 당신은 나의 증인이란 말로 불렀습니다. 나의 증인이란 말은 '나를 잘 아시는 선생님, 내 문제, 내 인생에 대하여 증인이 되시는 분'이란 뜻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증인, 나의 인생 길에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억울함, 고통, 말못할 사정, 처지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에게 우리의 소원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고백은 그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안을 열어 하늘의 비밀을 보아야 합니다. /아멘/
영안이 밝아지면 신령한 생수를 발견할 수 있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천군 천사를 볼 수 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소원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땅입니까? 바디메오는 외쳤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의 진정한 축복은 예수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⑨소경 바디매오는 어떤 용기를 가졌습니까?
⑴불행을 극복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대하여 좌절했다면 그는 아마 두 가지의 결과를 내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살했던지, 아니면 스스로 운명이나 팔자로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체 평생을 거지로 자학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지금은 소경이지만 반드시 고치겠다는 용기를 잠시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났고, 그 만남의 기회를 붙잡고 도전했던 것입니다.
▶불행이 닥쳐오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도피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극복하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분이 양과 돼지의 차이를 '양은 시궁창에 빠지면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돼지는 거기에 드러누워 뒹군다'고 했습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희망을 가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디매오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⑵앞을 향하여 전진하는 용기가 바디매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진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의 단을 안겨주십니다.
시126:6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⑶포기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바디메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을 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예수께로 가는 걸음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그에게 닥친 방해와 어려움과 시험 앞에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아니하고, 더욱 힘차게 도전하며 앞으로 전진합니다.
우리의 패배는 포기에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과 시험이 오면 포기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아름다운 역사를 늘 방해하고 훼방합니다. 우리의 발을 붙잡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주위 사람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환경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약해지고 흔들려서 포기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원로 마귀가 은퇴를 하면서 자기가 가장 잘 사용하던 무기들을 졸개 마귀들에게 소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무기는 '절망과 포기'라고 했답니다. 그 마귀는 자신이 이제껏 그 무기를 사용하여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지옥에 보낼 수가 있었다고 자랑했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용기를 잃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신념으로 살아간 사람이 영국의 '윈스턴 처칠'입니다. 그가 수상직에서 물러난 후 어려서 다니던 자기 모교 후배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결코! 라는 명언을 남겼답니다.
⑷자기를 희생하는 용기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기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달려나갔습니다. 그 겉옷은 그의 전 재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포기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본토 친척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실의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 여기에 부활의 새로운 능력이 임합니다. /믿/

 

⑩바디메오가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
⑴그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51절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보게 된 줄 믿습니다. 그는 예수의 능력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삼라만상을 그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⑵그는 믿음으로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구원 뿐 아니라, 은혜 받은 후 믿음으로 영혼까지 구원 얻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⑶그러나 더 큰 기적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눈이 뜨게 되었다고 자기 집으로 먼저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주님은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게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를 따랐습니다. 끝 절에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2004년 2월8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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