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치료(구원)받은 여인! (막 5:25-34)
'헐버트 웰스'라는 사람이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에 보면, 주인공인 대주교는 매일 오후 5시가 되면 성당에 들어가 정확하게 한시간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이 날도 정확히 오후 5시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종이 기도합니다. 종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놀라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종아 네가 너의 기도를 지금 듣고 있느니라. 무엇이든지 구하라" 깜짝 놀란 주교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주님 진짜 듣고 계셨군요" 그러고는 꽈당!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을 고발하는 내용이지요. 예배 시간을 지켰다. 기도 시간을 채웠다. 이 사실 한가지만으로 만족하고 자위하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놀라운 확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내가 기도한 내용 보다 더 아름답게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찬송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과 확신 없이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배드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소개!▶
막5장에는 예수를 만난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1-20절까지에는 군대 귀신들렸다가 예수를 만나 치료받은 사람이, 21-43절에는 중병에 죽게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과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고 있던 여인이 주님을 만나 치료받고 구원받은 내용입니다. 본문은 마9:20-22절과 눅8:41-56절에서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갈릴리와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으며, 특별히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들이 몰려와 주님 앞에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으며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그곳에도 큰 무리가 모여들어 병을 고침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 라고 하는 사람이 급하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저희 집에 오셔서 내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니, 예수님이 쾌히 허락하시고 회당장과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생긴 사건이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한 여인에게 어느 날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혈을 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하혈은 심해져서 의원을 찾아가 자기의 증세를 말하고 진맥을 한 다음에 약을 지어 가지고 와서 먹었으나 혈루증이란 병이 좋아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잘 고친다고 하는 의원들은 다 찾아 다녔으며 좋다고 하는 약도 다 먹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은 차도가 생기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으며 그를 아는 사람들은 혈루증에는 이것이 특효약이다 저것이 특효약이다 하면서 가지각색의 약들을 구해 주었으나 그의 병은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병은 한가지지만 약은 수천 가지란 사실을 아파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일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고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면서 여인은 있는 재산을 약값으로 다 없애 버렸으며 수없이 많은 의원들을 통하여 고침을 받아 보려고 했으나 고침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병은 더욱 심하여 졌으며 날이 갈수록 온 몸은 뼈와 가죽만 남게 되었습니다.
벌써 그가 병으로 고생한지도 12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순간 이 여인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자기의 병을 고침 받으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여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주님은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려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는데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가까이 나아간 여인의 마음속에 이런 믿음이 생겨납니다. '내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내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이 생기고, 그러한 믿음으로 손을 대니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혈루 근원이 멈추고 그의 병이 깨끗하게 치료받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병이 예수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고침을 받았으니 이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고침을 받은 여인만이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뒤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불평스럽게 말하기를 "주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미는 것을 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말은 한 두 사람이 예수님 옷에 손을 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손을 대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예수님의 옷을 만진 모든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지고 고침을 받은 자를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보시려고 뒤를 돌아보시니 이 여인이 도저히 숨 길 수 없을 알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자초지종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하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인은 병만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구원받았으며 다시는 질병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천년 전에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이런 믿음만 가지면 똑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공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자세하게 알아봅시다!
1. 그 당시 이 여인의 형편은?(25-26)
①혈루증으로 부정한 여인입니다.
레15장에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나와있습니다. 문자적 의미: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흐르는 병. 의학(醫學)적인 의미: 만성 자궁 출혈병으로 자궁 근종 이라고 부름.
레15장에서 유출병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병, 부정한 병으로 선언해서 아무도 환자를 만져서는 안되고, 만약 환자가 만진 물건에 손을 대면 함께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피는 생명의 근원인데, 피가 계속 유출된다는 것은 결국 죽는다는 뜻이 됩니다. 매우 무서운 병이다. 가슴아픈 것은 혈루병을 앓는 여인은 이혼의 사유가 되었고, 가족들과도 별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병은 고통스러운 병일 뿐만 아니라 여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겨서 말하기도 꺼리는 병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사람들과 함께 살수 없는 병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둥병과 혈루증 이었습니다. 두 환자는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밖으로 쫓겨나 그들끼리 살았습니다.
하혈한다는 사실보다 더 괴로운 것은 율법에 의해서 몸에서 뭐가 흘러나오는 병을 가진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한 사람을 만지거나 접촉하면 그 사람들도 부정해집니다. 또 부정한 사람이 사용한 모든 물건도 다 부정해집니다. 사람들이 부정해지지 않으려면 이 여인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고 이 여인을 주위에 있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여인에게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부 부정해지지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인은 고립되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습니다. 또 이렇게 부정해지면 하나님께 예배드릴수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는다고 알려 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몸 고생, 맘 고생, 신앙고생을 다 하게됩니다. 하나님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세상도 버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운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도 독방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혼자 외롭게 산다면 얼마나 고독하겠습니까? 학교에서도 왕따 당하는 학생들은 외롭습니다. 여러분들! 세상과 단절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 문제는 그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건강에 관한 음식이라면 아무 것이라도 먹어 치우는 실정입니다. 몸에 좋다 하면 가릴 것이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②허비하는 인생을 산 여인입니다.
본문의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12은 만수로써 오래 고생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닌 12년을 허비한 여인입니다.
이렇게 저주스러운 삶을 끝장내기 위해서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습니다. 용하다고 하는 의사를 다 찾아갔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의사를 만나면서 병의 고통만 더해 갔습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그녀가 가진 물질도 쏟아 부었지만 병이 호전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절망만 가중되었습니다.
12년의 기나긴 세월을 재산까지 허비하며 몸부림쳐 보았지만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만난 의사들이나, 이 세상 물질이 결코 그녀의 마음에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다른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질병과 싸워 볼 기력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12동안 혈루증으로 자기의 모든 인생을 질병으로 짓밟히고, 수많은 물질을 동원시켰으나 오히려 병만 더 가중되어 버렸고, 모든 물질은 다 허비했다고 합니다. 탕자는 세상 쾌락으로 허비하는 인생을 살았고, 이 여인은 질병으로 인한 허비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허비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 쾌락에 물질도 시간도 허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의 나라와 그에 의를 위해 세상을 살라고 하십니다.
왜? 그곳에 축복이 있고 구원이 있고 삶에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묘한 것은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난 시점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린 때"였다는 점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할 때까지 기다리실까요? 그 때가 두 손을 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홀로 병과 싸우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 많으신 하나님을 만나 기적적인 치료를 받는 복된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시34:18절 말씀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2. 복된 소식을 들은 여인(27)
절망과 소외의 수렁에 빠져 있는 여인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어느 날 혈루증 앓던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불치병, 난치병을 고쳐주시는 치료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들과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치료자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놀라운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 - 구세주- 라는 소문이 팔레스틴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기다려 왔던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병으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소식을 이 여자도 들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 이 소문은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그녀는 소망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중풍 병자도 일으키시고, 열병도 고치시고, 귀신들도 내어쫓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생을 포기하려던 그녀에게 들려 온 소식은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식이, 생명의 소식이 그녀에게 들려진 것입니다. 확실히 그녀의 믿음은 들음에서 났습니다(롬10:17).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것! 이것은 곧 은혜입니다. 오늘날 신앙유형을 살펴보면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보고 믿는 신앙형태와 듣고 믿는 신앙형태가 그것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이방종교나 원시종교에서 성행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물체를 만들고 우상을 만들고 부적을 써서 붙이고 어떤 시각적 표징을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듣고 믿는 종교입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했고, 요20: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으며, 벧전1:8절에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중요한 동사가 두 개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와 "손을 대니"입니다. 주께서 기적을 베푸신 사람들에 관한 성경 기사에는 반드시 '듣고'와 '믿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들음이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듣고'는 '청취하다. 안다. 깨닫는다'는 의미로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여러 정보를 청취한 결과 자신의 병을 고쳐 줄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들음으로 주님을 믿었습니다. 복된 귀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 주님이 계신 곳까지 왔습니다.
주님만이 구원의 길임을 듣고 깨달은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자 온갖 어려움을 무릎 쓰고 찾아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의식적으로 부정한 여자입니다. 가까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제한 받는 여자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분의 옷만 만지면 살겠다는 결연하고도 절대적인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는 절대적인 신앙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구원의 고백을 드린 여인(28)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여기서 '함일러라'는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의 손이라도 잡아야 하고, 누구의 옷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사랑의 손을 잡고, 출세를 위하여 권력의 손을 잡고, 생활을 위하여 기업가의 손을 잡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는 친구의 손을 잡는 우정의 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손을 잡아서 잘되면 좋지만 안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불행하게 되고, 잘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잘못되고, 영광을 위하여 잡았지만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의 손보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고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 가운데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10명의 정탐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다.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손을 잘 잡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손을 잘 잡았습니다.
이 여인의 발걸음은 요6:37절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불결한 여인으로서 감히 예수님께 나아가 '나를 도와주소서 나를 고쳐 주소서'라고 애원 한마디 못하고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그녀의 절박한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참으로 순수하고 간절한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나온 그녀는 그 겉옷만 만져도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의 충동을 느꼈습니다. 주여, 나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할 수 없는 여자입니다. 나는 떳떳하게 교회도 나갈 수 없는 여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예수님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나의 피난처입니다. 주여, 나를 치료해 주세요. 이런 간절한 심정으로 옷깃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었다'하는 말은 '예수님과 연결이 되었다, 혹은 예수님과 인연을 맺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이 되고 예수님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인연을 맺고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4. 이 여인은 믿음으로 치료(구원)을 받았습니다(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어떤 의사도 못 고치고 어떤 약도 못 고친 병을 단 한번의 믿음의 '터치'를 통해 고쳤습니다. 여인자신도 이 병이 낳았다고 느낄 만큼 강력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지나가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인의 인생에 새 날이 열리고 광명이 찾아온 시간입니다. 12년을 괴롭히던 질병이 깨끗이 떠났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날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여인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전부 부정해집니다.
여인이 혈루증이 있는 부정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예수님도 당연히 부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되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졌는데 부정케 되기는커녕 반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염된 것이 아니라 여인이 깨끗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부정을 씻고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정만 아니라 영혼의 부정함도 씻으시는 하나님입니다.
5.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30)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마자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막5:29). 이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믿음의 능력은 어떤 능력입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신적 능력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어떤 믿음이 자신 안에 있는 신적 능력을 빼 가는 것을 바로 아셨습니다.
여인이 '내가 그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을 때, 그 믿음은 응답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능력이 이 여인에게 부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진 사람은 이 여인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옷 술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체를 직접 만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가 옷을 만졌는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받은 은혜를 확인시켜 주기 위한 물음이요, 네 믿음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며, 그녀로 하여금 많은 무리 앞에서 간증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6.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31).
무리가 에워싸 밀고 있는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나이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주신 자와 받는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이 여인의 믿음을 못 쫓아옵니다.
7. 오늘도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예수님께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경꾼 같은 많은 사람에게 관심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싶어합니다. 참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가던 길을 돌이키면서까지 보고 싶어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힐긋 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심히 쳐다보신 것'입니다. 야예 발걸음을 멈추고 한 여인을 찾아서 둘러보고 계셨습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하는가?" 하면서 찾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바쁘신 예수님이 발길을 멈추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진 여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기뻐하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만이 이런 것을 경험합니다.
7. 감사의 고백을 드린 여인(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 말씀은 여인이 주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써 몸을 굽혀서 최대한의 예를 취하고 생긴 모든 일을 사실 그대로 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인은 처음에 주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셨을 때에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곧 담대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신앙이 바로 우리 성도의 고백인 것입니다.
8. 축복을 선언하신 예수님!(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은 영혼 구원을 말함이요, 여기 '평안히 가라'는 말은 평안 속에서 영원히 살라는 말입니다. 불안과 절망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이 여인은 이제 질병에서 건강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육신의 치료입니다. 12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에게 절망했고, 여러 의사들에게 절망했고, 세상에 대해 절망했을 때 주님으로부터 영육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9. 결론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 인정받은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과 그녀를 연결시킨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나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내가 같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에 가면 서약을 합니다. 주례자가 묻습니다. "고락간에 변치 않고 생전에 일정한 대의를 지키기로 서약하십니까?하고 물으면 예라고 대답을 합니다.
신랑 신부는 서서 서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 사람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서약합니다. 그리고 서로 일생을 의탁합니다. 서로 만납니다. 서로 관계를 가집니다. 믿음으로 상대방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됩니다. 내가 주님을 신뢰하는 순간 나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주님을 신뢰하는 순간 성령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나는 성령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9절 "이에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 몸에 깨달으니라"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믿는 순간 남편 것이 아내 것이고 아내 것이 남편 것이 됩니다. 친구와 친구가 믿고 신뢰하는 순간 친구의 것들은 서로의 것들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는 순간 주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의 평안이, 주님의 축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2003년 2월 23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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