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가 주는 교훈! (삼상 6:10-16)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가난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 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는 마지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그때부터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도구들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지요. 성경은 우리 인간을 그릇에 비유를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릇의 목적은 그 모양의 아름답고, 아름답지 못한데 있지 않습니다. 그 그릇이 금으로 만들었느냐, 아니면 흙으로 만들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그릇의 목적은 쓰임 받느냐, 쓰임 받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소들이 우리 주님께 쓰임을 받은 소들입니다. 성경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일꾼들의 이상적인 상을 말할 때 본문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를 교훈 합니다. ◀제목소개!▶
■먼저 본문의 배경을 알아보자!
삼상 3장 이하에 보면, 사사시대의 황혼기에 엘리 제사장 때에 영적 암흑기가 도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죄에 빠져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아니하고 형식과 의식만 난무'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을 계승해야 할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법궤정신, 예배정신입니다. 우리 나라보다 훨씬 작은 나라이지만 민족 정신이 뚜렸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정신만은 뚜렸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모셔야할 제사장의 아들들이 불량자들이 되어서 사람도 무시하고, 법도 무시하고, 하나님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알만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정치가, 종교가. 지도자들이, 백성들이 다 부폐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불레셋이 쳐들어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대패하여 약 4,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어서 졌다고 생각을 하고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메고 갔습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중요한 일에는 앞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법궤를 앞세우고 건넜더니 물이 갈라진 일이 있었고 그래서 법궤가 있는 곳에는 승리가 있고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법궤, 언약궤, 혹은 여호와의 궤라고도 불려지는 이 궤를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길갈이라는 곳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수4:18-20). 그 다음에 벧엘에 있다가 실로에(삼상3:3)까지 옮겨왔었는데, 당시의 제사장 엘리 때에 '아벡'이란 곳에서 진을 치고 블레셋과 전투에서 무작정 법궤만을 앞세웠다가 패전함으로 3만명이 죽고, 그만 법궤마져 불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였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어서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읍니다.
이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이 전사했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제사장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더 슬픈 이야기는 비느하스에 부인이 이런 비보를 듣고 산기를 느껴 해산을 했는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가봇은 이스라엘의 부끄러움이요,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에서는 약 7개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마디로 큰 재양이 임하고 고통과 혼란만 왔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음으로 보물을 빼앗았다고 좋아했습니다. 법궤는 금으로 입혀져 있기 때문에 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십계명을 새긴 두 돌비가 들어 있고,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불레셋의 삼대도시인 아스돗, 가드, 에그린으로 법궤를 옮깁니다.
①블레셋의 아스돗 사람들은 그 두려워하던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 온 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Dagon)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법궤를 다곤신전에 두었는데 오히려 법궤로 인하여 그들의 다곤 신상이 부서지고 재앙이 일어났습니다(5:2-4).
다곤은 해양신으로 위는 사람의 모양이고, 아래는 인어처럼 고기 꼬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곤 신전에 둔 이유는 여호와의 신을 다곤신과 대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는 참패입니다. 다곤은 능력이 없습니다. 박살이 났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대적하는 자는 이렇게 박살이 납니다.
5:3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우상 섬기는 사람도 그 열심히 대단합니다. 그들도 산 기도를 합니다. 모욕제거하고 합니다. 가짜를 가지고도 진짜보다 더 열심히 믿습니다.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다곤이 궤 앞에서 엎드려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신 신이며 전능자이시며, 스스로 계신 신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5:3절에 보면 다곤 제사장들이 다른 사람이 알기 전에 도로 제자리에 갔다가 놓습니다. 그런데 4절에 봅시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
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이번에는 아주 속된 표현으로 작살이 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당할 신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엘로힘(전능자)의 하나님이요, 여호와(언약, 약속)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법궤가 재난을 가져오는 것 인줄 알고, 8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의논을 합니다
그 당시 블레셋은 다섯 지방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수령들에 의하여 각각 분할 통치되던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로서 그들은 실제 집단 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②그리하여 방백들의 의논 끝에 하나님의 진노는 다곤 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가드라는 곳으로 옮기도록 결정을 합니다(5:7-8).
그런데 법궤를 가드로 옮겨 간 이후에 가드에서는 더 큰 문제가 성 전체에 발생하였습니다. 9절에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 지라'
독종은 돌림병으로 극심한 피부 질환으로 피부가 완전히 망가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스돗보다 가드에 더 큰 재앙을 내리셨음을 뜻합니다.
③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10). 이 곳은 다곤 신은 섬기지 않았고 대신 바알세불을 섬기는 성입니다.
그런데 그 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5:11-12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④드디어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다시금 모여 심각한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블레셋족속들이 법궤를 자신들의 또 다른 도시로 보낸다 해도 옮겨진 그 도시 역시 앞의 다른 도시들처럼 하나님의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아예 법궤가 원래
보관되었던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 족속은 법궤로 인하여 많은 재앙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 위한 블레셋 사람들의 의논과 방법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잘못 다룸으로서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제 정치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조언을 받아서 종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먼 자기들을 괴롭혔던 독종의 모양대로 금으로 다섯 개의 독종을 만들고 또한 금으로 다섯 개의 쥐를 만들어 속건제 제사를 드린 후에 그것들을 상자에 넣어서 법궤와 함께 수레에
실어 보내자 것입니다.
그런데 삼상5:11절에 의하면 법궤를 본 처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법궤가 가는 곳은 당시의 본 처인 '실로'가 아니라 예루살렘 서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벧세메스입니다.
블레셋사람들이 법궤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①법궤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실로는 당시 블레셋 인들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고(4:10),
②법궤로 인해 마지막으로 재앙을 당한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성읍이며,
③법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수21:16).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아직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택하여 수레를 소에 메우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게 하였습니다.
오래전에 현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에 들어간 것이 생각납니다. 이 소들이 남북의 대화를 여는 귀한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베세메스로 떠나는 암소 두 마리를 보면서 우리들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1. 선택받은 소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가 있습니다. 밭을 가는 소, 짐을 나르는 소들이 있습니다. 이 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한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기 위한 소입니다. 세상일을 하기 위한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소입니다. 많은 소들 중에 구별되고 선별된 소입니다. 역시 성도가 하나님께 택함받고 직분자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우리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된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나를 뽑아주시고 선택해 주신 그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딤전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계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 사명의 멍에를 멘 소입니다(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새 수레'는 한 번도 세속적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수레를 말합니다.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소'는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은 짐승을 말합니다.
암소 두 마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멍에를 메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멍에요, 이 세상의 멍에 치고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멍에를 맨 소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직장의 멍에가 있습니다. 사업의 멍에도 잇습니다. 정치적인 멍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각기 다른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부모의 멍에가 잇고, 자식의 멍에가 있습니다. 남편의 멍에가 있고, 아내의 멍에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각기 다른 멍에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멍에는 사명의 멍에입니다. 정말 중요한 멍에는 하나님의 법궤인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고 가는 멍에인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 멍에를 맨 자들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성전을 쓸고 닦습니다. 주일마다 부식 준비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 본문의 두 마리의 암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의 땅 벧세메스로 가야만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가봇'의 비운의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키 위한 사명으로 선택된 암소들입니다. 빼앗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는 위대한 사명을 받은 소입니다.
우리들도 이 사명의 멍에를 준 줄로 믿습니다.
3. 이 소들은 사명을 위해서는 자식들도 초월했습니다(10).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이 소에게는 젖먹이는 소가 있었습니다. 모성애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송아지는 떼어서 우리에 가두었습니다. 뒤에서는 어린 새끼의 어미 찾는 소리가 처량합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사명 때문에 육정을 초월해야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암소는 본능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에 따라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마10:37-38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가족을 등한히 하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주의 일을 감당키 위해 인정을 초월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가정 일보다 우선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의가 우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는 먼저 그의 나라입니다.
다시 한번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4. 사명의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두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될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84:6절에도 성도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이 터져야 합니다. 또한 그 죄에 대한 사죄 때문에 북받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키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을 보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눈물로 기도햇더니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눈물을 씻어 주신더고 약속했습니다. 계7:17절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예수님도 구속의 길을 걸으시면서 울고 가셨습니다. 히5: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5.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大路)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여기 '치우치다'는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의 뜻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은 종종 성경 안에서 철저한 순종을 가르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벧세메스입니다. 벧세메스라는 말은 태양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지역적으로는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역의 땅입니다.
두 암소는 의견 충돌도 없이 협력하여 정해진 코스로만 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천성문을 향하여 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푯대를 향하여 묵묵히 순종의 걸음만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좌우로 치우치는 자가 많습니다. 바른 성경적 가치관이 없을 때, 바른 사명감이 없을 때, 바른 역사관, 바른 구원관이 없을 때 좌우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눅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다"고 하십니다. 또 약1:5-6절에 "두 마음을 품고 갈팡질팡해서도 안 됩다"고 하십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6. 하나님과 동행한 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가 먼 거리인 블레셋 땅에서 벧세메스 땅까지 곧장 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기 힘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법궤를 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어쩌면 법궤는 하나님이 지워주신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불레셋에서 벧세메스로 가는 길은 계속해서 높은 길이 이어지는 경사로입니다.
또한 결코 가까운 거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 땅에서 벧세메스까지 그 소가 수레를 메고 성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간 것은 법궤를 멘 그 소에게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 안 된다'고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환경 탓이라든지 다른 곳으로 그 이유를 돌려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동행자는 세 가지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①목표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하나는 우로 가고, 하나는 좌로 가자고 한다면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②뜻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뜻이 서로 다르면 다툼만 일어날 따름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가 없습니다.
③보조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주님과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가족끼리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성도끼리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주의 종과도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7. 목적지까지 잘 도착한 소들입니다.
험한 길, 높은 고개, 고달프고 피곤하며 목마르고 배고픔을 참고 견디며 드디어 벧세메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신앙의 길이 험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다 가면 구원선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때문에 그 좁은길 마다하지 않고 갑니다.
히3: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엡6:2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축복도 참고 충성하는 자에게 옵니다. 기도 응답도 그렇습니다. 오늘 암소 두 마리는 그의 사명의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습니다.
8. 암소 두 마리는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14).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비록 소이지만 그 법궤를 메고 마지막 도착했을 때 여물이라도 많이 주고 편히 쉬게 해 주어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법궤를 메고 온 소를 잡아다가 수레를 장작으로 삼고 소를 잡아서 그 위에 번제물로 희생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단번에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모형인 동시에 사명자들에게 보여준 순교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있게 살다가 죽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죽음으로 순교하는 것도 귀하지만 신앙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충성하는 것도 산 순교자의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은 롬14: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12: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물로 죽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먼저 목사가 죽어야 합니다.
■다음에 장로가 죽어야 합니다. ■권사가 죽어야 합니다. ■집사가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사는 길이 열립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날마다 분초마다 정과 욕심, 혈기와 고집을 십자가에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3년 3월 23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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