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9-17)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와: 자기 날 사랑해! 아담: 그럼, 하와: 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아담: 그렇다니까, 하와: 내가 제일 예뻐? 아담: 야, 여기 너밖에 다른 사람이 어디 있냐? 사랑은 귀한 것이기에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대중가요나 TV 드라마의 단골 메뉴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삶은 삭막하고 이기적인 세상이 됩니다.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듣고 사용하다 보니 그 의미가 퇴색된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의 값어치가 있을까요? 어쩌면 길에 떨어져 있어도 선뜻 줍지 않는 10원 짜리 동전 같은 모습은 아닐까요?
홍수가 나면 천지가 물인데 마실 물이 없어 어려움을 겪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데 사랑받지 못해 굶주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박애(博愛)의 종교 즉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든 안다니든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사랑이 있는 곳,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곳,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여 사랑하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고 믿어주고 있는데 정작 우리 안에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괴로워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제목소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고, 사랑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건강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풍성한 열매의 삶을 산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 사랑 안에 거하면 11절에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22:37-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①선택받은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사랑 받기로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기로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②축복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③상처(고난)를 받는 삶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는 나를 나되게 만드는 또 다른 모습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상처는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상처받고, 부모나 자식에게 상처받고 연인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선천적인 장애로 인하여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 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는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상처입니다. 상처는 우리를 아프게 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허물어뜨립니다.
하지만 이 아픈 상처가 바로 나를 나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만의 독특한 사람이 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상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처는 오히려 헬렌 켈러를 위대한 여성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에 청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베토벤으로 하여금 육신의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귀를 통해서 음악을 창작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미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링컨은 어린 시절에 어머님을 여의었습니다. 어린 링컨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성경책이 링컨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찬송가 작사자 중에서 가장 많은 찬송시를 창작했던 크로스비는 장님이었습니다. 크로스비는 비록 육신의 눈을 사용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상처 때문에 영혼의 눈으로 만물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초등학교 때 학교로부터 거절당하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에디슨은 그 상처를 딛고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우뚝 섰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도 아픈 상처가 오히려 그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에서라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통해서 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요셉은 형제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형들의 상처를 통해서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인물로 성장합니다.
모세는 광야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상처가 모세를 모세되게 만들었습니다.
한나에게는 잉태할 수 없는 상처가 있었고, 다윗에게는 사울이라는 상처가 있었고, 에스더에게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의 상처가 있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상처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질병의 상처가 있었고, 마가는 선교사로서 처절하게 실패하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외로운 상처가 있었고, 수가성 여인은 가정적인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처들은 야곱을 더욱 야곱되게 하였고, 요셉을 요셉답게 만들었으며 모세를 모세답게 완성해 놓았습니다.
상처는 또 다른 모습의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피하고 도망가기보다는 정면으로 대면하며 다가설 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좋은 도구라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④나누는 삶입니다. 나누는 삶만큼 큰사랑이 없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유가 나누어주는 삶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10: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0: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구약 성경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430년의 애굽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불순종과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광야의 여정 동안에도 하나님은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시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배반하였지만 한번도 하나님은 배반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택하신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을 통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4:31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 사랑의 최고의 절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낮고 낮은 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3가지 모습을 살펴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낮아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온 인류의 역사와 우주 만물을 손에 붙드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무명의 시골마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곳은 더럽고 냄새나는 마굿간이었습니다.
기왕이면 만왕의 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면 화려한 모습으로 오시지 이렇게 초라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밥을 굶어보지 못한 자는 배고픈 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괴테’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병상에 누워있는 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집에 산 사람은 집 없는 자의 서러움과 슬픔을 알 수 없습니다. 실직해 보지 못한 자는 일하지 못하는 자의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사업의 부도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그들의 시린 가슴과 절망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11: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은 눈높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의 눈높이에 상대방이 맞추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오, 길과 진리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들을 다시는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우리들을 향하여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끊임없이 배반하는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라고 할 때는 어떤 사이를 말합니까?
기쁠 때 만나면 기쁨 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 지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고 초를 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또한 친구란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줄 아는 사이입니다. 내가 무어라고 말하든지 간에 들어주고,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이 진짜 친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힘들고 어렵고 곤고할 때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친구가 있는 분입니다.
또한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가 진짜 친구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진정한 우정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하고 떠날지라도 곁에서 믿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웹’ 박사는 좋은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①상대방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②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간에 진실하지 못하고 속이면 좋은 우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깨어지면 우정도 깨어집니다. IMF 때문에 친구끼리 갈라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믿었던 친구간 보증 때문에, 돈 때문에 갈라진 우정이 많답니다. 우정관계는 진실이 아주 중요합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라야 됩니다.
③평등의식입니다. 요즘 우리 세태용어 중에 ‘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너하고 나하고 평등하다’라는 말입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그것은 옛 속담입니다. 이제는 너와 내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서로 비슷했는데 2-30여년이 지나고 나면 사회적으로 차이가 많이 날 수 있습니다. 자기는 별 볼일 없는 자리에 있는데 친구는 높은 위치에 있다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너와 나는 똑같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재산이 많든 적든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대할 수 있다면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거짓말을 하고, 때로는 배신할 줄도 뻔히 아시면서도 "너는 내 친구"라고 속삭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세상 친구는 나를 배반하고 버릴지라도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내가 속이면 그냥 들어주고 참아 주십니다. 배반할 지라도 책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지만 주님은 한마디 왜 그랬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나는 아직도 너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믿고 있는데 너도 그럴 수 있느냐고 그의 미래를 보십니다. 인간들의 친구관계는 현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지만 주님은 과거를 보시지도, 현재를 보시지도 않습니다. 내일의 변화될 모습을 보십니다. 비록 지금은 배신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못된 친구이지만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십니다. 앞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눈높이로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높이로 낮추셔서 우리를 감싸 주시는 사랑입니다.
▶한 잡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초등학교 학생 교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랑하는 같은 반 친구가 백혈병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정성을 모아 병원비도 거두었습니다. 친구들의 간절한 정성과 사랑으로 퇴원을 하여 학교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다보니 머리가 모두 빠져 까까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놀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친구가 오기전 학급회의가 열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최고의 기쁨으로 맞이할 것인가가 주제였습니다. 혼자 까까머리로 올 친구를 생각하여 모든 반 아이들이 머리를 깎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친구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학교에 왔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반 친구들이 모두 자기와 똑같은 까까머리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 선생님도 울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온 친구도,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머리를 모두 깎은 친구들도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높이 사랑입니다. 자신의 눈높이가 아닌 상대방의 눈높이로 맞추어 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친구요 사랑의 관계인줄 믿습니다.
이런 친구관계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카페에 와서는 고급양주, 독한 술을 두 잔씩만 먹고 가는 것입니다. 종업원이 가만히 보니까 참 이상하게도 혼자 와서는 딱 두 잔만 먹고 갑니다. 하루는 물어봤습니다. “손님, 어떻게 그렇게 혼자 오셔서 꼭 두 잔만 잡숫고 갑니까?” 하니까 내 친구가 죽으면서 “나는 이제 죽으니까 네가 내 대신 술을 한잔씩 먹으라”고 말하고 죽었답니다. 그래서 한 잔은 내 몫이고, 한 잔은 친구 몫이라고 친구대신에 자기가 먹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잔씩만 먹는 것입니다. 또 종업원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오늘은 한 잔만 하십니까?” ?나는 이제 금주를 했고 친구 술만 먹어주기로 했네? 친구 핑계대고 술을 계속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화목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구속의 은혜가 없기에 아들을 살아있는 산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뛰어 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 쓰심으로 우리의 머리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심으로 우리의 가슴으로 지은 은밀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13절에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를 위해 생명을 던지면 그것은 참으로 의로운 죽음이 됩니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김수현’ 군이 전철에 떨어진 일본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습니다. 그것이 일본인들의 가슴을 움직였습니다. 자기 동족들도 뛰어들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도 한국 사람이 일본인을 구했다는 것이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일본 총리가 참석할 정도로 일본을 움직이게 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의로운 죽음은 강팍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하도록 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극치는 무엇입니까? 롬8:5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주님은 영원한 저주의 형틀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3일 만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집니다. /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마음의 고백이라면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한1서4: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요한1서 4: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20절에 “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21절 "우리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사랑과 눈높이 사랑과 희생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이룬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의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본문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받은 자녀로서 우리들이 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선택으로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도 또한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먼저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온전히 죄 씻음을 받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집을 나갔지만 그것은 배고픔과 수치스러움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였습니다. 기쁨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과거를 보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됩니다.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친구로서의 관계를 얻게 됩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사랑은 상대적 사랑입니다. 부부사랑은 절대적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싸움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부사랑 자체가 상대적 사랑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맺어준 하나의 제도적 사랑이 부부사랑입니다.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맺어진 상대적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①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1서4:7-12).
요일4: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단번에, 무조건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신 것을 뜻합니다.
사랑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1서4: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8절 끝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입니다.
②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요한1서4: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한 인생들에게 참사랑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③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12절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은 분명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표현된 그 사랑을 우리가 나타내 보일 때 우리 안에 거하심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④사랑의 대상은 자기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세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기 백성입니다.
⑤사랑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요한1서4:9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위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확실한 목적, 영원한 목적,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⑥사랑의 결과는 성도의 변화입니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일찍이 요한일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요한1서4:12절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하”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절대성’에 가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절대성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너무 오만하다, 자만하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유일한 참 진리라고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심을 고백을 할 때 세상의 철학과 이교에서는 독선이고 고집스럽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타협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고 매매할 수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한 진리는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십니다. 이것을 고집하는 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법정 스님이 지은 ‘무소유’라는 책이 일반대중들에게 크게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불교와 기독교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는 요한일서를 인용하면서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것이라고 글을 썼습니다. 그 논리와 그의 그 문필은 수많은 세상 사람들 앞에 공감을 주었습니다. ‘아 그렇다, 법정의 말이 맞다’ 거기에 세상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교들은 전부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은 거기에 동의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상대적 진리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서구교회가 무너졌습니다. 미국에 있는 구라파인들이 와서 세웠던 교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상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주말문화가 주일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주일은 선데이가 아닙니다. 주일은 할리데이가 아닙니다. 주일은 로드스데이(roads day)입니다.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휴일도 아니요 월화수목 가운데 하루가 아닙니다. 이 날은 주의 날입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며 이 날은 구별된 날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복 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우리가 상대적으로 타협을 하면 안됩니다. 주의 날을 타협하면 안됩니다. 휴일화 하면 안됩니다. 왜 우리는 주의 날을 귀중히 여겨야 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가 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의 신입니다. 유일한 우리의 구주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예배,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우리에게 양보될 수 없는 절대 진리입니다.
주님은 본문 16-17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2004년 3월 7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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