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
시 95:1-11
시 95:1 오너라, 우리가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 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 소리 높여 외치자. 2 찬송을 부르며 그의 앞으로 나아가서, 노래 가락에 맞추어, 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
3 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 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다. 마른 땅도 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
6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 오늘,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 "므리바(다툼)에서처럼, 맛사(시험함)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9 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 사십 년을 지나면서, 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 나의 길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 11 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격스런 마음으로 예배하여야 마땅합니다.
시편 95편은 ‘하나님을 즐거이 예배하자’는 호소로 시작됩니다.
시 95:1 오너라, 우리가 주님께 즐거이 노래하자. 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 소리 높여 외치자. 2 찬송을 부르며 그의 앞으로 나아가서, 노래 가락에 맞추어, 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
이런 말씀을 읽으면 ‘시편은 맨 이런 말씀 밖에 없나?“ 하며 식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시편 95편의 이 말씀은 다릅니다. 눈물겨울 정도로 안타까운 호소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즐거이 노래합시다! 소리를 좀 더 높여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으니 좀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하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마치 불이 났을 때, “불이야” 하는 심정입니다.
시편 기자가 왜 그렇게 심각합니까?
이 시편을 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95편은 :7 하반절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것이 시편 95편의 배경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왜 우리 형편이 이렇게 비참해졌는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대언합니다.
:8 므리바에서처럼,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므리바, 맛사라는 지명은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데, 므리바는 ‘다툼’ 이라는 뜻이고 맛사는 ‘시험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았으며, 아침마다 만나를 먹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받았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불평 원망을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지명까지 바꾸셨겠습니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10 사십 년을 지나면서, 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 나의 길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 11 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
약간은 거부감이 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싫증을 내시고 화를 내시고 ‘멸망시키리라’ 맹세까지 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돌이킬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8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해졌다고 했습니다.
:8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그 말은 마음이 돌덩어리 같아져서 더 이상 돌이킬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신 것입니다.
:10 '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 나의 길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두 마디 불평 원망하는 것이나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예배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즐거이 예배 합시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예배가 살아있으면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 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며, 그가 지으신 것이다. 마른 땅도 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절망했었습니다.
물 없고 먹을 양식이 없는 광야에서 계속 불평하면서 원망했습니다.
여리고 성 앞에서 자기들은 메뚜기 새끼들 같다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그 절망의 순간이 엄청난 간증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정말 믿고 예배한다면 우리의 삶에도 그런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일찍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영 제국의 왕실은 당시의 존경받던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 윌리암 템플에게 대 국민 방송설교를 요청하게 됩니다. 당시의 영국은 나치 독일의 기세에 대항할만한 객관적 전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국 국민들은 싸움을 하기도 전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채로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그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대영 제국의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일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주장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그분을 경배하며 그 동안의 우리의 죄,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고 전쟁 가운데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편 27편을 보면 다윗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고!’, ‘군대가 자기를 향하여 진을 쳤다’ 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당당합니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에게 어떻게 이런 담대한 믿음이 가능했을까요? 그의 기도에 답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기도입니다. 군대가 죽이려고 달려드는 상황이라면 무엇을 소원할까요? 마땅히 ‘하나님 살려 주세요. 적들을 물리쳐 주세요.’ 라고 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평소에 예배를 통하여 늘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예배를 통하여 경험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의 소원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 때, 점검할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예배는 어떤가?”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드리게 되고, 마음으로는 “아, 예배하기 싫다” “찬양할 기분이 아닌데.” “왜 이렇게 짜증만 나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위기 보다 큰 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제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급히 도망쳐 나오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빨리 나오세요. 집이 무너집니다“ 소리쳤습니다. 꿈에서 깬 후 한동안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무슨 뜻인가?’
오늘 설교하는 시편 기자의 심정을 깨우쳐 주신 것 같았습니다.
“예배가 죽은 교회는 무너지는 집과 같습니다.”
어릴 때, 교회학교 선생님 중 연세 드신 여권사님, 늘 “예배를 이렇게 드리면 안 돼.” 귀찮을만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당시 생각해 보면 예배시간에 장난치고 떠드는 것이 그 권사님에게는 얼마나 안타깝고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권사님은 부드럽게 달래셨지만, 젊은 남자 선생님은 긴 막대기로 혼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커 가면서 예배드리는 것을 다 힘들어 합니다. 아직 십자가 복음도 알지 못하고, 살아계신 하나님도 모르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교회에 나와 주는 것만도 대단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가정에서도 예배드리고 싶은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자녀들이 그대로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정 예배 때문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배에 눈이 뜨인 사람과 아직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이처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릴 때 교회 선생님이셨던 그 권사님의 심정으로, 어른들인 여러분에게 예배 바로 드리자고 가르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을 것이면 바로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가 가장 기본입니다.
예배 시간에 습관적으로 늦거나, 찬양 중에 휴대폰을 보게 된다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제가 예배에 눈이 뜨인 계기는 1985년 당시 [경배와 찬양]으로 소문나기 시작한 서울 온누리교회, 목요찬양집회에 구경(?)을 갔었을 때였습니다. 목사가 되고도 제 예배는 상당히 율법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드려야 하는 것이었지 너무나 기쁘거나 감격스러운 감정은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온누리교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확 하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본당 가득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많이 모인 것도 충격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예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찬양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손을 들고,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조용히 엄숙히 예배드리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예배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 마음에 예배부터 제대로 드리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7가지 방향의 첫 번째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복을 세어 보는 것이라는 서양격언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고 살고 있다는 말이고, 받고 있는 복을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 소대섭 목사님 영성일기를 보면 매일 50가지 감사제목을 쓰고 계십니다. 어제 김승회 목사님의 영성일기에는 33가지 감사제목이 쓰여 있었습니다. “와, 이렇게 감사할 제목이 많은데 감사할 줄 몰랐구나!”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 시절의 애환을 노래한 시입니다. 성전에서 노래하던 아삽 자손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목을 놓아 울자, 바벨론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시 137: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에서 부르던 노래를 이방 땅 우상숭배자들 앞에서 세속적 즐거움과 종교적 조롱거리를 위해 부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삽 자손들이 찬양을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그리면서 몰래 숨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 137: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비록 포로 생활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혀가 입천장에 붙어 평생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결국 이 노래, 이 예배로 인하여 그들은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받은 은혜, 받고 있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잊으면 예배가 죽고 예배가 죽으면 모든 것이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슬픈 장례식 때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창업하고 두려움과 염려가 많은 순간에도 하나님께 먼저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이렇게 예배하면서 예배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YWAM의 유명한 사역자인 진 다니엘 여사가 신학생 때, 과로로 쓰러져 크게 낙심하였을 때,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골 1: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진 다니엘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네가 할 수 없는 일은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내가 다 할테니까!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
진 다니엘은 자신이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배였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주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자기 위로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부르신 곳에서’ 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그 후렴이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찬양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예배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가 죽으면 다 죽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성찬식은 예배 중의 예배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충만함이 넘치는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부르신 곳에서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 만족함을 느끼네
사랑과 진리의 한줄기 빛 보네 /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 살아갈 때 삶이 되는 / 그곳에서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 살아갈 때 삶이 되는 / 그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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