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아시죠?”
요 20:11-18
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오늘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음을 찬양하는 부활절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거운 것은 3년 전 오늘 세월호가 침몰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3년 전 오늘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들었습니다. 그 날 영성일기입니다.
140416 수
한국에서 들려오는 충격적인 조난 소식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
저녁에 수많은 학생들이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이 안 납니다. 제가 섬겼던 안산광림교회 학생들 4명도 실종자들 가운데 있다는 소식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고난주간, 예루살렘에서 이런 마음의 아픔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어디 가서 소리 질러 울고 싶을 뿐입니다.
140417 목
아침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오늘은 오전 이스라엘 박물관에 가려는 일정을 취소하였습니다.
좀 더 주님만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이 눌리는 것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읽고 묵상한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입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너 자신을 위하여 울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위하여 웁니다.
기도하면 자꾸 세월호의 선장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왜 선장이 되었을까?
선장이라 불리워지는 것이 좋아서?
비록 배 안이지만 왕노릇하는 것이 좋아서?
‘선장의 자리, 얼마나 두려운 자리인가?’ 선장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인데, 승객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인데
준비되지 못한 선장, 얼마나 위험하며 두려운 일인가?
저 자신이야말로 ‘준비되지 못한 미숙하고 무책임한 선장’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납니다.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 뿐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에서 내려서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려설 수도 없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옵니다. 저는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세월호 선장이 꼭 저 같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너무나 눌리고 너무나 우울하였습니다. 이처럼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너무나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부활절을 맞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아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슬픔과 분노와 좌절과 고통의 수렁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주님의 부활 사건 중 한 장면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창녀였습니다. 그랬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귀신에서 놓임 받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향유 옥합을 주님의 발에 붓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니 그 비탄과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날도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간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해 할 때, 마리아의 뒤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눈이 뜨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히 믿습니다. 엄청난 믿음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대로 놀라운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다투고 분열하고, 거짓말하고 욕심을 내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많은 성도들이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지식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마리아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마리아에게만 허락된 은총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3년을 지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그들의 마음에 임하신 후에야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과 행하신 이적의 의미를 깨닫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였을 때, 허다한 제사장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예수를 죽였던 자들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제사장직을 박탈당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존귀 영광 모든 권세를 다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직을 박탈당하면서까지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제자였던 도마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스데반을 죽었던 사울이 어떻게 회심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더 증오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말만 많지 어떻게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혼란스럽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에는 개혁 대상이 명확했습니다. 세상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의 성직제도, 비성경적인 교리 등이 뚜렷한 개혁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혁 대상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성경도 잘 알고 복음도 진리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잘 알지만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싸웁니다.
죄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죄를 짓습니다.
음란한 일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음란한 일을 합니다.
돈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돈 돈 하면서 삽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십니까?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놀라고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그런 형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살면 살수록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목사님은 왜 불의한 사람이나 교회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저는 그들이 잘못했음을 압니다. 그 죄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 입을 막으심을 느낍니다. 주님은 제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가 크냐? 네가 나에게 지은 죄가 크냐?’
저는 ‘그들이 지은 죄는 몇 가지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아니 모르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제가 지은 죄가 더 큽니다’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이 자기 자신이 개혁의 대상인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한국 교회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개혁될 수 있습니까? 깨달았다고 변화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올바른 교리를 알아도 삶이 변화되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배워도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뜨거운 성령 체험을 했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화될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욕망대로 살지 않고 주님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몰라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대부분 몰라봅니다.
우리가 문제에만 집중하고, 고통에만 매달리고, 세상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을 향하여 눈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제 이름 아시죠?”
우리가 주님을 진정 갈망하면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켄 가이어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숲의 끝자락에서 살고 있던 한 어린 소녀가 숲 속을 거닐다가 그만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울어 도 누구도 찾아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소녀를 찾으러 숲 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하고 깊은 밤이 되어, 수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소녀의 아버지는 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 딸이 바위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녀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깨어나 아버지를 껴안았습니다. 아버지의 품에 꼭 안긴 딸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아빠, 제가 아빠를 찾았어요! 아빠를 찾았다구요"
소녀만 아버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딸을 찾고 찾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만나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그들을 찾고 찾으셨음을 깨닫게 될 테니 말입니다.
1984년 4월 어느 날, 21일인 것 같은데, 날짜는 정확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날은 저의 회심의 날입니다 광주 통합병원, 수술 대기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세 번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절망이었습니다. 목사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무렵,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를 붙잡는 순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너무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전 세계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 민족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 교회의 문제도 아니고 오직 저 자신을 위하여 그곳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 때, 저도 모르게 “주여, 제 오른쪽 다리를 바치겠습니다” 고백하며 엄청 울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그것만 분명하다면 어떤 것도 두렵지도 아깝지도 않았습니다.
그 날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부르고 불러도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저를 찾고 찾으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교우들의 부활의 간증을 영상으로 만나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부활의 증인 카드를 꺼내서 저와 함께 외쳐봅시다.
“내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아직 이렇게 담대히 고백할 확신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조용히 주님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한 목사님의 영성일기 제목이 “주님 저 한번 안아주세요” 였습니다.
“오늘 하루는 나의 연약함과 부족을 너무나 절실히 깨닫는 하루입니다. 기도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도도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참 힘듭니다. 주님, 저에게 은혜를 주소서. 이 밤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주님 품 외에는 제가 기댈 곳이 없습니다. ‘주님, 저 한번 안아주세요’. 주님 품에 안긴 채 잠들고 싶은 밤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 바랍니다.
다함께 “내 이름 아시죠?” 찬양하시겠습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조용히 질문하듯이 불러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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