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도 보이는 용서의 나무
사 53:4-12
사 53: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사형 틀을 종교의 상징을 삼은 것은 기독교 뿐 입니다. 우리는 왜 십자가를 걸어 놓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잘 담아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71년 뉴욕 포스트에 실린 피트 헤밀의 칼럼 《Going Home》에 실린 실화입니다. 빙고라고 하는 한 남자가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여러 시간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침울하고 근심에 싸인 모습에 초조해 보이기도 해서 어느 친절한 사람이 다가가서 어디로 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죄를 짓고 4년 동안 뉴욕 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형량 만기로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기에 4년 전에 아내에게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아내로부터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출감일이 가까워지고 딱히 갈 데도 마땅치 않은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내 집은 브로크릴이라고 하는 마을에 있는데 그 곳은 차가 지나다니는 길 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큰 참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이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만일 당신이 나를 받아 준다면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매달아놓으라고, 그것이 나를 영접해 주는 표시인 줄 알고 집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손수건이 없으면 이미 당신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줄로 알고 그저 지나쳐서 내 갈 곳으로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살던 집에 거의 다 왔는데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차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같이 초조해졌습니다. 모두들 창 밖을 바라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참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차안에서 함성이 터졌습니다. 큰 참나무가 온통 노랗게 꽃피어 있는 것입니다. 손수건 하나만 묶으면 혹시 남편이 못보고 지나갈까 봐 아내가 그 나무에 온통 노란 손수건을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용서한다.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나무입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빙고라는 사람의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한국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곳곳에 첨탑처럼 세워져 있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멀리서도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한국 하늘에 “내가 용서한다. 또 너를 용사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브라질 한 시골 마을에 남편이 병들어 죽고 딸만 데리고 사는 마리아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 크리스티나는 어려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으나 십대가 되어 가출하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이 갔을 것이라고 예상한 세계 유흥도시요 향락도시인 리오데자네이로 로 갔습니다. 마리아는 사진관에 가서 자기 사진을 여러 장 확대 복사를 했습니다. 그리고서 자기 딸이 갔을 만한 유흥가를 돌아다니면서 그 사진을 부착했습니다. 화장실에도 붙이고 또 전화박스에도 붙이고 그리고 현상금 붙은 죄인 수배하는 그런 사진 옆에도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그리고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몇 주 후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도록 춤추고 호텔을 전전하다가 피곤하여 쓰러질 듯 건물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는데, 취한 눈에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사진이었습니다. 얼른 그 사진을 떼였습니다. 그 지역에 사진이 붙는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뜯어보니 뒷면에 메모가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부끄러워서 옆에 누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끄러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 사진도 아니고 자기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엄마 얼굴만 팔린 것입니다. 딸을 찾으려면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엄마는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메모를 남겼지만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온 엄마가 딸을 대신하여 유흥가에 얼굴을 내어다 팔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대로 십자가에서 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십자가에서 죽기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놀랍게도 구약성경에 너무나도 정확히 예언 되어 있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어떤 교우는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여 짓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도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몇 번이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이라고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할지라도 용서하라 고 하셨습니다.
눅 17: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계속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한 여인이 닐 엔더슨이라는 목사님께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세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하였던 여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하나님은 그녀를 사랑하신다고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죄 많은 여자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물었습니다.“저는 자살을 시도하였는데두요?”앤더슨목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죽으려 했다고 그 자녀를 미워하여 버리겠습니까?”
십자가는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용서의 나무입니다.
이 말은 어떤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멀리서도 보이는 용서의 나무] 법무부교정기독선교연합회가 발간한 책입니다.
여기에 중국인 왕씨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16세에 가출하여 베이징에서 폭력 조직에 들어가 온갖 범죄를 저지르다가 몽골로 도망쳐 거기서도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한국에 불법 입국한 사람입니다. 전국을 돌며, 범죄와 도피생활을 하다가 영등포에서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중 노방전도를 받았는데, 조선족 전도사님이 중국말로 한국에 언제 왔느냐, 물어보는데, 따뜻한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도망자의 서글픔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언제든지 배가 고프거나 외로우면 연락하세요” 하며 교회 주소가 찍힌 명함을 건네받는데, 평생 처음 겪어 본 친절이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날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살인강도를 저지르고 결국 붙잡혀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1년 동안 수갑을 찬 채로 짐승같이 괴성을 질러대고 자해를 하며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왕씨를 안쓰럽게 본 교도소 신우회에서 활동하는 교도관 한 사람이 그를 의무과에 데려갔습니다. 그는 진료소에 들어가다가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눈에 핏발이 서 있고, 광대뼈만 톡 튀어나온 것이 꼭 해골에 가죽 하나를 씌워 놓은 것 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짐승같이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자기를 진료소로 데려온 교도관이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며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 따스한 온기,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자기도 모르게 또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생각하다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울음만 잃은 게 아니라 웃음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순간 죽을 때 죽더라도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고 싶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웃을 수 있을까?’ 그 때 ‘예수를 믿으라’ 말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믿는 것인가?’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제가 눈물과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이겠지요? 제가 저질러 놓은 그 많은 죄가 시퍼렇게 날 선 칼로 나를 겨누고 있는데 어떻게 웃음을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죽기 전에 꼭 제대로, 거짓 없이 웃고 싶습니다”그리고 벽에다 펜으로 ‘예수님’이라고 크게 썼습니다.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 줄 몰랐기에 그냥 “예수님 예수님” 지칠 때까지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의 이야기를 신세 한탄하듯이 하나씩 하나씩 풀어 놓았습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숨기지 않은 거짓말을 섞지 않은 있는 그대로 속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 때, 눈에는 안 보이지만 마~음으로 믿어지는 그 누군가가 자기 옆에 앉아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3일 밤낮을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의 죄를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교도소가 떠나 갈 듯이 외쳤습니다. “예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I" 그러다가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바닥에 깔고 앉던 모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용서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옆방에서는 ”미쳤냐“며 소리를 지르고 야간 담당근무자까지 달려와 제지하기까지 했습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은 채 꺼이꺼이 울며 그 새벽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교도관이 찾아왔을 때 물었습니다.“나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는 꼭 안아주며 “이제 우린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하면서 앞으로는 “부끄럽게 살지 말자”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혀 교도관이 주고 간 한중 성경책을 꺼내들고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그 후 2개월 동안 30번을 통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감정뿐 아니라 머리로도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죽으셨고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도소 안에서 전도자요 신앙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 마음을 더욱 정결케 하시어 제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살게 해 주세요.”
우리는 감옥에 갇힌 사형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보다 더한 마음의 감옥에 갇힌 마음의 살인자가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용서받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용서받았습니까?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큰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물건 값은 얼마를 주고 그것을 가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1만원을 주면 만 원짜리입니다. 100만원을 주면 백만 원짜리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짜리 입니까?
예수님짜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시려고 예수님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행 20:28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여러분, 여러분도 교회도 예수님짜리 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짜리 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짜리임을 믿는 사람이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 때부터 삶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몸이 예수님의 몸이며,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삶임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좀 쉬라” 합니다. “TV를 그만 보고 일찍 자라!” “몸에 안 좋은 음식은 먹지 말라” “술 담배를 끊으라” 합니다. “성경을 읽으라”“기도를 하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짜리 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하게 됩니다.
무엇 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용서하라 가 아닙니다. 용서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죄를 범한 형제들에게는 물론 자기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용서할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용서받은 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는 은혜 충만합니까? 은혜 충만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목사의 설교 아닙니다. 교회 안에 “용서”가 충만하면 ‘아멘’이고 “용서”가 부족하면 ‘아니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은혜 충만합니까? 교인들 사이에 싸우고, 비난하고, 수근수근 한다면 아직 용서받지 못하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짜리라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살았고, 마음에 ‘용서’와 ‘사랑’이 부족하다면 먼저 용서의 나무,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의 죄든 자신의 죄든, 죄를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롬 5:20 ....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러분 중에는 진정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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