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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9:1-13 /제목: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는 편파적인 하나님?

by 【고동엽】 2022. 1. 17.

본문: 로마서 9:1-13

제목: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는 편파적인 하나님?

 

오늘 로마서 9장 1절부터 13절은 하나님의 편파적 선택 그러니까 두 가지입니다. 편파적 선택, 편파적 예정, 이것 두 가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편파적 선택과 편파적 예정 이것은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캘빈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확보한 사람, 신·구교 모두, 신·구교 모두 일치하는 교리가 이 선택과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구교가 완전히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캘빈이 로마서 9장 말씀을 가지고 이중예정 또는 선택예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전적인 이 예정론을 완화시켜서 예정의 의미를 훨씬 더 인류 모두에게 복되게 해석한 사람이 칼 바르트와 몰트만이라는 신학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칼 바르트와 몰트만처럼 해석을 해야 이 예정론이 은혜로운 교리로 들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왜 동족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배척했는가? 그러니까 동족 이스라엘은 왜 메시아를 배척했는가? 요것이 가장 큰 질문입니다. 두 번째로 왜 이스라엘은 메시아에 대해서 냉담하고 배척적이고 대적하는데 저 이방인들은 저렇게 열광적으로 교회로 돌진하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세리와 창녀가 천국으로 막 쇄도해 옵니다. 왜 세리와 창녀는 메시아의 눈을 알아보고 질주해 들어오고, 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죽이려고 하는가? 그러니까 이 두 가지 현상입니다. 이 두 가지 현상 앞에 바울은 성경 구절 4구절에서 6구절을 인용해 가지고 답변을 합니다.

 

먼저 7가지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이 왜 메시아를 이렇게 거부하는가?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졌는가? 실패했는가? 아니라는 거죠! 아브라함의 씨는 어차피 갈라디아서 4장에서 아브라함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던 이 창세기 22장 17절로 18절에서 나오는 ‘네 씨’는 사람 다수를 가리키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켜서 말했다 라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미 이렇게 바울이 해석을 했죠? 그런데 바울은 ‘네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았으니까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하 만민을,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겠다는 이 약속은 성취되었고, 이 언약은 폐하여지지 않고 성취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서 일부 이스라엘은 믿지 않고 일부 이스라엘은 믿는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이것은 무상 예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정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성경에서 보면은 이것도 갈라디아서 4장의 논리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과 육신의 자녀인 이스마엘의 갈등을 다룹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았던 사라 사이의 갈등을 말하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정통 이스라엘, 하나님의 약속의 정통 상속자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었듯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일부는 이스마엘급으로 분류되어서 지금 처음 하나님을 영접하는, 메시아를 영접하는 이 결정적 순간에서는 선택받지 못하고 배제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당시에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갈렸듯이 지금 이스마엘급 육신의 자녀와 이삭급 약속의 자녀로 갈라졌다는 거죠. 이것을 먼저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7가지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입양, 출애굽 내내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영광에 대한 집단적 경험, 그다음 조상들로부터 받은 약속들, 아! 언약들, 그다음에 율법을 선사 받았고, 교육받은 것들 그다음 예배, 그다음에 이스라엘을 끝내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종말의 약속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약속들, 그다음에 그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보유하는 이런 7가지의 특권을 가지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 메시아가 나온 이 민족적인 특권을 가지고도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부조리가 발생했는데 이 부조리 중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던 사람들은 이삭 반열이 아니라 이스마엘 반열이라는 거죠. 그렇게 말함으로써 이 논리를 설명합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메시아를 보고 영접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대다수가 전 세계 만민을 위해서 선교사로 변하여 전 세계 만민 한복판으로 종횡무진 뛰어가야 될 텐데 극소수 이스라엘만 세계 만민 가운데로 뛰어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이방인들은 떼 지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됩니다. 이방인들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넘어진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막 들어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는 저가 어떻게 선택하냐면은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선택합니다. 자 이번에는 이제 야곱의 역할이 이방인을 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창세기 25장에서 리브가의 뱃속에서 각축하다가 야곱과 에서 중에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 아무 이유 없는 선택의 원리가 이방인에게 야곱의 역할을 줍니다. 이제 이방인이 야곱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방인들의 저 쇄도하는 믿음 열기,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을 듣자마자 보였던 저 강력한 반응, 오랫동안 우상숭배에 감금되었다가 참된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극에 달한 채 가졌던 저 이방인들은 우상숭배를 즉시 중단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바울의 말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들어와서 교회를 가득 채우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 받지 못한 에서처럼 황량하게 세일산 근처를 방황하면서 이렇게 버림받은 자처럼 행동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과 에서 이 비유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에 대한 열광적 반응과 배척의 반응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삭과 이스마엘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왜 일부는 믿고 일부는 믿지 않는지를 설명할 때 동원하는 두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 바울이 청중들을 향하여 청중들의 수준에 맞게 설명하려고 든 예이지, 여기서 영원불변하는 교리를 뽑아내면서, 여기서 하나님이 이 예정교리대로 행동하지 않으면은 하나님은 안 돼! 하나님을 이 교리로 묶어내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중예정론을 만들거나 선택예정을 만들면 그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왜 안 되냐 하면은 하나님은 교리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리에 경직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해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마음대로 해도 그런 공평과 정의를 어긋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유가 예정교리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유가 예정교리에 감금되면 안 되기 때문에 예정교리를 앞세워서, 선택교리를 앞세워서 ‘어떤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이야! 저 아프리카, 사우스 아프리카의 흑인들, 그 줄루족과 저런 사람들이 왜 노예처럼 사느냐? 택함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런 19세기 독일 선교학, 네덜란드 선교학자들처럼 이런 식으로 예정교리를 인종차별에 갖다 붙인다거나 특정 민족의 불행을 설명할 때 쓰면은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약하면은 바울이 지금 여기서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통해서 왜 이방인이 훨씬 더 복음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가를 설명할 때 쓴 것 맞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 갈등을 가지고는 왜 이스라엘 사람 중에 더러는 하나님을 잘 믿고 메시아를 믿고, 더러는 믿지 않는가? 이것을 설명할 때 쓴 것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 자신이 당대적 현상 앞에서 설명하려고 든 예이지, ‘지금부터 나는 이중 예정교리를 말하겠다. 이 이중 예정교리를 믿지 않으면은 너희들 정통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마음으로 지금 이렇게 하는 것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볼 때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캘빈 모두 다 왜 지나쳤냐 하면은 이것을 영원불변한 교리로 만들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교리에 매인 하나님인 분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무한히 자유로우신 분이고, 무한히 공의로우신 분이고, 무한히 우발적이시고, 무한히 임기응변적이시고 무한히 추후대책적인 분이세요. 우리 하나님은 니느웨를 심판하겠다고 결심을 하셨어요. 그러나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 니느웨 사람들이 우발적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가 정한 결정 때문에 ‘내가 한번 결정 했으니까 나는 밀어붙일 거야! 니느웨 저놈들이 12만 명이 집단적으로 떼지어 회개한다 하더라도 내 결정은 변함이 없어! 나는 예정의 하나님이니까! 나는 결정의 하나님이니까!’라고 하나님이 경직되게 자기가 정한 결정에 우리 하나님은 매인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캘빈,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교리대로 행동해 줄 것을 기대하는데 그렇지 않죠!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중예정의 하나님도 될 수 있지만 자유의 하나님도 되고 인간의 우발적 반응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카드로 대응하실 수 있는 자유의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 자유의 원리가 이중예정의 원리 모두 다 하나가 공통점입니다. 이중예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류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이중 예정합니다.

 

자, 이중예정을 굳이 우리가 받아들인다면은 이런 겁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비선택보다 죄 아래 감금된 인류를 그냥 다 방치하는 것보다 먼저 일부를 선택하여 먼저 그 일부에게 사랑을 먼저 전략적으로 베풀고 나머지 그다음 사람들을 추후에 사랑을 베풀기로 결단하는 이런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선택을 하, 편파적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 편파적 선택마저도 인류 전체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비선택 보다는 편파적 선택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선택이 아니라 무선택이 아니라 편파적 우선선택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편파적 우선선택의 목적 자체가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니까, 자, 결론 맺습니다. 하나님이 설령 기회 균등의 공정담론에 따르면은 편파적으로 일부를 먼저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일부의 선택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비선택,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무선택 보다는 먼저 일부 선택해 주는 것이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더 좋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택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운명을 예정이론이나 선택이론으로 삼아서 하나님이 마치 예정한, 선택 받기로 예정된 사람, 구원 받기로 예정된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도 결정했기 때문에 못 바꾸는 그런 의미로, 그런 하나님을 감금하는 교리로 그런 교리를 만드는 것은 매우 잘못된 거죠. 그러니까 칼 바르트와 몰트만이 이 예정교리를 아주, 아주 기가 막히게 좋은 의미로 해석을 한 거죠. 그런데 이런 예정교리를 나쁘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속이 아주 옹졸하고 굉장히 악마적인 그런 냉혈한적인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천하 만민을 구원하려는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일부 먼저 선택하는 편파적인 선택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궁극적 사랑의, 우리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만민을 끝내 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편협한 공정담론에 의해서 책잡히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하시는 좋은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좋은 하나님을 믿는 제 인생이 너무 행복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이런 좋은 하나님을 아침마다 부르니까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보기에는 편파적인 하나님이 인류를 죄 아래 다 방치해 놓고 아무도 선택하시지 않을 수 있는 그때에도 선택해 주셔서 편파적 선택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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