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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9:14-24
제목: 하나님의 야곱 편애, 공의로운가?
우리가 예정교리 또는 선택교리 이런 교리를 들을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차가워질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똑같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예정을 해서 원천적으로 믿을 기회까지 빼앗아 버리면은 하나님의 예정은 기회 균등의 공정담론을 어그러트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중립적 상태에서 특정 사람을 예정하거나 예정하지 않아서 그를 진노의 그릇으로 삼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방해하는 예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원천 봉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과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장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 그 궁극적 계획에 이바지하고 그 기여하는 중간 전략이라는 거예요. 중간 전략. 그래서 먼저 창세기 12장 1절로 3절요,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먼저 읽고 나서 오늘 본문을 읽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2장 1절부터 읽어주십시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네, 땅의 모든 족속이, 땅의 모든 족속이 복 받는 날을 하나님은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디모데전서 2장 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게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다음에 빌립보서 2장 10절, 11절이요.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날이 온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이 일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미래라는 것! 자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본문 읽습니다. 우리 최은혜 자매님 저랑 한 절씩 교독합니다. “네” 예, 9장 14절,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맘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자, 이 그릇, 긍휼을 받도록 예정된 그릇은 바울이 말하는 ‘우리’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핵심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인데 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예를 든 사람이 진노의 그릇은 바로, 긍휼의 그릇은 모세 또는 모세가 대표하는 이스라엘, 히브리 노예들을 가리킵니다. 자,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과 파라오, 모든 인류를 죄와 저주 가운데 내버려두셔도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공평한 냉담함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평하게 내버려 두신 상태보다는 하나님은 일부에게 편애를 통하여 공평하게 내버려 두신 저주 아래 있는, 사망 아래 있는 인류를 일부를 먼저 선택하여 그 저주와 사망의 쇠사슬에서,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하나님은 보이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당신의 의도를 보이시기 위하여 당신에게 반응하는 사람의 반응 여하에 따라서 진노가 부각되는 선택된 그릇이 있고, 하나님 긍휼이 부각되는, 하나님의 긍휼이 찬란하게 빛나도록 선택된 그릇이 있는데 히브리 노예들은 아무 공로가 없는데, 히브리 노예들은 아무 공로가 없는데 하나님의 긍휼을 일방적으로 덧입는 선택된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 이때 우리는 히브리 노예들과 파라오라고 하는 이 비대칭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봐야 됩니다. 이때는. 히브리 노예들과 파라오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개입하기도 전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 때문에 한 사람은 압제자이고 한 사람은 압제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 긍휼을 드러내기가 훨씬 쉽습니다. 지상에서 권력을 갖고 압제할 정도로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긍휼과 사랑을 표현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압제 받는 히브리 노예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그 인생에 역사하면은 훨씬 그 인생이 확 달라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파라오 같은 절대 군주 밑에서 일방적으로, 비대칭적으로 압제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정의감이 충족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사회 정의감이 충족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하면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부터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7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엉성하고 가장 열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사상에는 열등자와 천한 자와 없는 자를 선택하여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는 일종의 균형을 잡아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정의감이 선택에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칼빈과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이것을 추상적인 인간 모두에게 선택교리를 적용한 이런 식으로 선택교리를 무한히 논리를 확장하면은 적용점이 약간 빗나갑니다. 성경은 분명히 ‘파라오와 히브리 노예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파라오가 아니라 히브리 노예를 선택했다’ 그 말을 지금 하고 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나 캘빈과 이런 신학자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어떤 도시에 A라는 사람은 선택하고 B라는 사람은 선택 안하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좀 패러디하고 약간 희화화시켜서 하나님 선택이 심히 자의적이고 신비한 자유, 하나님의 신비한 자유의지, 하나님의 신비한 임의적인 결정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유의지, 선택과 예정교리를 보편적인 하나의 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보세요. 이게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히브리 노예들이고, 모세이고,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한 사람은 히브리 노예를 압제하는 파라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를 압제하려고 하는, 이 압제하는 파라오를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참았습니다. 약 1년 3개월이라고 그럽니다. 이 재난의 기간이. 왜냐하면은 농사 짓는 기간이 한 번 사이클이 돌았기 때문에 7개월에서 1년 3개월 동안 걸렸던 이 무지무지 긴 재난을 통과하도고 파라오는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래 참고 관용을 보이면서 이 파라오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를 썼는데 파라오가 회개 불가능 지점까지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까 하나님은 그 완악한 상태로 내어버려 두셨습니다. 이게 바로 뭡니까? 진노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9가지 재난을 만나도 이 돌이키는 마음이 안 생기는, 하나님을 향해서 회개의 가능성이 영구적으로 봉인된 이런 사람을 완악하게 내어버려 두십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내어버려 둠을 당하면은 회개할 길이 없습니다. 제 자녀와 제 아내와 저의 부하와 저의 직원과 저의 학생들이 저를 아무리 비난해도 제가 잘못을 돌이킬 힘이 없습니다. 왜? 완악함에 내어버려 두었으니까요. 이런 상태에서 지금 예정과 교리, 선택교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이중예정, 선택교리가 나오는 지점을 잘 보세요. 갑자기 아무 상관 없는 특정인 A, 특정인 B, 한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된 사람, 한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예정된 사람 이런 추상적인 지금 예정 담론을 펼치는 게 아니에요. 지금. 그런 점에서는 참 너무 안타까워요. 신학자들이. 특수한 맥락에서 노예와 노예를 압제하는 파라오의 이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 하나님은 파라오가 아니라 히브리 노예를 선택해서 긍휼을 보이고자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히브리 노예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누가 막았어요? 파라오가 막았단 말이에요. 파라오가 막았는데 하나님이 이 파라오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주셨어요. 그런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라오가 진노의 그릇으로 자기를 완성해 갑니다. 자, 이런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혹시 요 본문 때문에 약간 어렵다고 느낄 수 있어서 제가 19절부터 말합니다. 그런데 ‘어 김회권 목사보다 바울은 훨씬 더 강경하게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지금 설명하는데 김회권 목사는 하나님의 명예를 살리려고 애를 엄청 쓰네! 하나님이 현대인이 보기에도 마음씨가 좋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는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어요. 왜 그렇게 오해할 수 있냐 하면 19절 이하 때문에.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자의적으로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이렇게 정했다면은 하나님이 내가 진노의 그릇이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절대 주권적으로 정했다면은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항의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여기서 저보다 좀 더 강경하게 합니다.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이 한 그릇은 토기장이, 한 그릇은 천한 그릇, 한 그릇은 귀한 그릇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파라오를 천한 것으로 삼고, 히브리 노예를 귀한 그릇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왜 하나님이 히브리 노예들과 파라오를 동시에 둘 다 착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는가, 그렇게 항의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왜 파라오 같은 진노의 그릇을 고치지 못했는가, 이렇게 항의할 수 없다는 거죠. 파라오가 파라오의 완악함을 완성해 갈 때는 파라오가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를 끊임없이 누적적으로 사용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마냥 임의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임의적으로 보이는 이 하나님의 선택과 이런 예정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누가 보더라도 공의를 만족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파라오와 파라오에게 압제 받는 히브리 노예들을 선택과 비선택으로 가르는 이유는 파라오와 파라오의 압제 받는 노예들을 비선택과 선택으로 가르는 이유는 사회정의로 볼 때 사회정의감으로 볼 때도 그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파라오를 심판의 그릇으로 진노를 드러내는 그릇으로 쓴다 하더라도 이 맥락에서는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반영입니다.
여러분, 제가 내일 좀 더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15분에서 20분 사이에 메시지를 끝내려고 합니다. 너무 길게 하면 여러분 힘들 것이고, 출근 시간이 힘들기 때문에요. 제가 내일 다시 이것을 이어서 한다는 마음으로 지금 끊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요 본문을 읽을 때 아까 읽었던 창세기 12장, 빌립보서 2장,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먼저 가지고, 하나님의 큰 사랑 마음에,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먼저 확신하고 또 중요한 것은 이 선택과 예정이라는 이 특수한 교리가 나오는 요 지점은 ‘추상적인 모든 인간에게 예정과 선택교리를 적용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파라오와 그의 압제 받는 노예들 사이에 특수 문맥에서 하나님이 지금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울의 논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이 말씀을 하나님 중심으로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이 말씀을 쓴 사도의 마음에 공감하는 방식으로 깨닫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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